창세기 강해 제266강(창45:24-26)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4월 15일(화)
길에서 다투지 말라는 요셉의 당부가 의미하고 있는 것(창45:24)
요셉은 이복 형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유다의 말을 듣고서 그들을 용서합니다. 그를 설득한 것은 유다의 설명 가운데 포함이 되어 있는 두 가지 사실 때문입니다;
첫째로, 아버지의 생명과 아들의 생명이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 요셉의 마음을 돌리고 있습니다(창44:30). 아버지 야곱은 요셉 자신이 타의에 의하여 사라지게 되자 그가 죽은 줄 알고서 너무나 슬퍼하였다고 합니다(창44:28-29). 이제 베냐민이 가나안으로 되돌아가지를 못하면 아버지 야곱이 그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십중팔구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창44:31). 그토록 아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은 마치 부자간에 생명의 줄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은 이치는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과 그 독생자의 생명이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유추하게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도 이해가 가능합니다.
둘째로, 막내 베냐민 대신에 유다가 스스로 애굽 총리의 종이 되겠다고 자청했기에 그 사실이 요셉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습니다(창44:33). 유다는 베냐민의 무사귀환을 위해서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고자 합니다. 그의 희생으로 베냐민도 풀려나고 아버지 야곱도 죽음의 슬픔을 맛보지 아니할 것입니다(창44:34). 그리고 앞으로 애굽에서 양식을 계속 살 수 있는 길도 확보가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모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유다의 희생적인 생명살림의 헌신 앞에 요셉의 원한의 응어리가 녹아 내리고 있습니다(창45:1-3). 그것은 십자가의 대속의 사랑 앞에 탕자와 죄인이 눈물의 회개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결과 야곱의 열두 형제들 사이에 극적인 화해가 성립이 됩니다. 서로 얼싸안고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창45:14-15). 그렇게 이산가족의 상봉이 이루어지고 서로의 은원이 해결이 되었다면 모든 일이 끝난 것으로 흔히 착각들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을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이후의 삶이 더 문제가 됩니다. 과연 화해와 용서의 한 마당이 그 다음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이끌어갈 수가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제부터는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일관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두 가지의 문제가 가로놓이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그리고 성화된 성품으로의 변화가 모두 나타나야 성숙한 신앙인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변화가 단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그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친동생 베냐민에게 이복 형들보다 더 많은 옷과 돈을 주면서 한편으로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창45:22). 이복 형들이 막내를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아니할까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 옛날 혼자서 채색 옷을 입고서 집안에서 설치고 다니다가 요셉이 형들로부터 얼마나 미움을 받았는지 모릅니다(창37:3-4). 그래서 뼈아픈 한 마디의 충고를 이복 형들에게 해주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창45:24).
요셉의 근황을 22년 만에 듣게 되자 아버지 야곱이 어리둥절해하다(창45:25-26)
사람의 한평생 가운데 어떠한 기적이 가장 큰 것일까요?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3일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신 사건이 인류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며 기적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래서 20세기 전반의 미국의 정치철학자이며 저명한 신학자였던 라인홀드 니버는 그것을 역사적으로 단 한번 발생했던 “impossible possibility”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야곱이 그와 같은 엄청난 기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미 22년 전에 짐승에 물려서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애굽에 다녀온 아들들로부터 이구동성으로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창45:26a).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요셉이 중근동지방의 백성들의 목숨 줄을 쥐고 있는 애굽의 실세인 총리가 되어 있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입니다(창45:26b).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소식만 해도 복음인데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다니 그것은 복음 위에 복음입니다. 어떻게 그와 같은 일이 인생 가운데 그리고 역사 가운데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그와 같이 믿지 못할 두 번의 기적은 이미 말씀을 드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회복하는 일련의 사건을 미리 맛 보여주고 있는 하나의 예표라고 하겠습니다.
야곱은 죽은 줄 알고서 22년 동안이나 가슴 속에 묻어두고 있었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애굽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그것이 너무나 충격적인 전갈인지라 그 사실을 즉시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창45:26a).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 또는 이성적인 판단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실 등을 접하게 되면 사람들은 한 동안 멍하게 됩니다. 도무지 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부활과 같은 기적의 이야기를 야곱이 접하게 된 것입니다. 요셉이 살아 있다니, 그것도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제 정신을 수습하는데 한참 시간이 걸리게 됩니다. 그 점을 모세는 실감나게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하더니”(창4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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