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창세기 강해 제264강(창45:14-2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2. 3. 00:45

창세기 강해 제264(45:14-20)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413(주일)

 

친형제와의 포옹과 이복형제와의 포옹의 차이는 무엇인가?(45:14-15)

 

자신의 정체를 밝힌 요셉이 22년만에 친동생인 베냐민과 감격적인 포옹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장면에 대하여 모세는 다음과 같이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45:14). 그저 다른 말은 소용이 없습니다. 한없이 서로가 목을 안고 울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서로가 목을 껴안고 울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직 목숨 줄이 붙어 있는 동안에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나게 되니 그것이 너무나 감격스럽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그 목을 놓고서 서로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자기들도 모르게 그 속에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와 달리 요셉이 이복 형들과 포옹을 하는 장면은 자연스럽지가 못하고 약간 어색합니다;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45:15). 아무리 형제간이라고 하더라도 키스를 하는 것은 옛날 조선과 같은 동방예의지국에서는 희귀합니다. 그러나 고대중동에서는 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서 더러 엿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라반이 그의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며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29:13). 늙은 라반이 생질 야곱을 평생 처음 만나게 되자 그 감격에 휩싸여서 자연스럽게 남자끼리 안고 입을 맞추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형들과 22년 만에 만나서 그 감격으로 인하여 입을 맞추고 포옹을 하며 운다고 하는 것도 고대 중동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그 키스가 있고 나자 비로서 그들 이복 형의 말문이 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45:15)는 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대목은 마치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장면과 비슷합니다(6:5-8). 이사야는 자신과 같이 부정한 사람이 선하신 하나님을 만났으니 화를 당하게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그때 그 말을 하고 있는 이사야의 입술을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보좌 앞에 있는 화로의 숯불로 지져서 영적으로 깨끗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사야는 자신이 하나님의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겠다고 서원할 정도로 그 말문이 트이고 있습니다(6:8). 따라서 절대자의 신뢰를 얻었으며 자신이 깨끗함을 얻었다고 하는 자신감이 그 입맞춤을 통하여 전해지고 있다고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창세기에는 친동생 베냐민에 대한 만남과 이복 형들에 대한 만남이 절묘하게 모두 담겨 있는 형제상봉의 장면이 또 하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헤어진 지 20년만에 야곱이 쌍둥이 형 에서를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 대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야곱)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33:4). 쌍둥이 형제이지만 그들은 숙적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너무나 친밀하면서 동시에 한없이 어색한 관계입니다. 그 결과 친밀한 친형제사이의 포옹이 목을 어긋맞추어 우는 것으로, 그리고 어색한 만남이 입을 맞추고 말하는 것으로 각각 표현이 되면서 그 두 가지의 행동이 자연스럽게 하나의 문장을 이루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요셉의 친지들에게 영주권과 엄청난 선물을 주려고 하는 바로의 태도가 말하고 있는 것(45:16-20)

 

애굽의 황제인 바로는 총리인 사브낫바네아 요셉에게 엄청난 호의를 베풀고 있습니다. 요셉의 혈족들이 가나안에서 애굽의 수도로 찾아와서 형제간의 상봉이 극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서 바로는 신하들과 함께 마치 자신들의 일인 것처럼 기뻐하고 있습니다(45:16). 그리고 바로는 온 애굽 조정의 기쁨을 대신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선물을 요셉의 친족들에게 베풀고 있습니다; 첫째, 영주권은 물론 애굽의 좋은 땅을 떼주어서 그들이 기름진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입니다(45:17-18). 둘째, 늙은 부친과 연약한 부녀자들과 자녀들을 편안하게 모시고 애굽에 이민을 올 수 있도록 애굽의 좋은 수레를 빌려주겠다는 것입니다(45:19). 셋째, 먼길을 오는데 가재도구 등이 큰 짐이 될 수 있으므로 그것들을 구태여 가지고 오지 아니하더라도 한 살림을 애굽에서 마련해주겠다는 바로의 친절하신 말씀입니다(45:20).

이상과 같은 호의와 친절은 황제와 신하의 평범한 관계를 상당히 넘어서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 바로가 자신의 형제를 가나안에서 맞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어째서 요셉이 애굽의 조정에서 그 정도의 예우를 받고 있는 것일까요? 다시금 당시의 바로와 애굽 조정의 수장인 총리 요셉과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생각나게 해주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기록을 참고하면 두 가지로 요셉은 애굽의 황제에게 큰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 세누스레트2세와 3세를 섬기면서 7년 연속 풍년과 흉년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잘 극복하고 있습니다. 둘째, 그 위기를 잘 관리함으로써 애굽의 황제인 바로의 권력이 엄청나게 커지고 있습니다. 전체 애굽의 귀족들은 물론 주변국의 왕가의 운명까지 애굽의 황제인 바로가 모두 한 손에 틀어쥐게 됩니다.

첫째로,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서 7년 동안 풍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황제 세누스레트2세가 꾼 꿈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41:15-32). 요셉은 자신이 공약했던 정책을 그대로 실시하여 전국의 창고에 굉장한 양의 곡식을 저장하고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41:33-36, 54). 이제 내년에 다가올 흉년을 관리하면 됩니다. 바로 그때에 세누스레트2세가 별세합니다. 현명한 황제는 애굽의 장래가 다가올 7년의 흉년을 총리인 요셉이 어떻게 극복해내는가에 달려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 바로의 장래를 요셉의 손에 부탁을 합니다. 아들로 생각하고서 잘 섬기며 애굽의 장래를 책임져달라는 간곡한 당부입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요셉의 진술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45:8).

둘째로, 7년 흉년 동안에 애굽의 모든 신민(臣民, 신하와 백성)과 이웃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애굽의 황제인 바로 만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먹을 양식의 생산이 한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땅과 재산이 있으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먹을 양식이 없어서 모두가 굶어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천하에서 오직 양식을 저장하고 있는 곳은 애굽의 창고입니다. 그 창고의 문은 바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총리 요셉의 명령이 있어야만 열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탄원을 하고 있습니다. 부디 양식을 살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41:53-57).

그렇지만 7년 연속 흉년 동안에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재산을 가지고서도 충분한 양의 곡식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곡식의 값이 너무나 귀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돈과 재산, 토지와 가축, 심지어는 자신들의 목숨까지 모두 바로에게 바치고 나서야 목숨 줄을 이어갈 수 있는 곡식을 7년 동안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47:13-26). 그 모든 재화와 권력을 요셉이 고스란히 바로에게 바쳤습니다. 바로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 강력한 황권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도중에 총리 사브낫바네야 요셉이 극적으로 가나안에서 온 형제들을 상봉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자연스럽게 바로의 기쁨이요 온 애굽 조정의 경사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4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