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255강(창44:6-10)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4월4일(금)
자기 의에 넘치는 요셉의 형제들의 주장의 의미(창44:9)
요셉은 자신의 형제들을 가나안으로 떠나 보내면서 모종의 장치를 하고 있습니다. 양식과 돈을 넉넉하게 주고서 그 속에 은잔을 하나 숨겨두는 것입니다(창44:1-3). 물론 베냐민의 자루 속입니다. 그 이유는 베냐민을 가나안으로 보내지 아니하고 애굽 총리의 관저에 붙들어 두고자 함입니다. 그에게 애굽 총리의 은잔을 훔쳐간 도둑의 누명을 씌운다면 길 가는 도중에 그를 붙잡아올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요셉의 의도이며 계략입니다. 요셉은 미래지사를 일부 알고 있습니다. 7년 흉년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두 해째 흉년이 들었으니 앞으로 5년의 흉년이 애굽과 가나안 땅에 남아 있습니다(창45:5). 그 긴 세월을 견뎌내기가 무척 어려울 것입니다. 그 지옥과 같은 기아의 땅으로 친동생 베냐민을 결코 떠나 보내고 싶지가 아니한 요셉입니다.
요셉의 지시로 그 일을 행하고 있는 자가 애굽의 총리관저의 책임자인 청지기입니다. 그는 주인의 지시로 먼저 떠난 요셉의 형제들을 추격합니다. 그들을 만나자마자 혹독하게 질책하면서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는 자들이라고 비난합니다(창44:4). 그리고 주인이 애지중지하는 귀한 은잔을 도둑맞았으니 그들의 자루를 조사하겠다고 말합니다(창44:5-6). 그 말을 들은 요셉의 형제들은 기가 막힙니다. 그들은 은혜를 아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는 그래도 각자가 각 지역의 족장으로 군림을 하고 있는 자들입니다(창37:12-17, 38:1, 48:22). 그런데 무엇이 아쉬워서 그까짓 은잔을 도둑질 하겠습니까? 특히 그들은 양식이 떨어지면 애굽 총리에게 다시 와서 그의 허락을 구해야만 하는 처지입니다.
어제 낮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고 크게 신세를 졌으므로 그 은혜를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 그들입니다. 그런데 애굽 총리의 은잔을 훔쳤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불성설(語不成說, 말도 되지 아니하는 소리)이며 억울한 모함입니다. 따라서 아직 자루의 검색이 있기 전에 다음과 같이 큰 소리를 치면서 자신들의 무죄함을 논리적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내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당신의 종들이 이런 일은 결단코 아니하나이다. 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의 주인의 집에서 은 금을 도둑질 하리이까?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창44:7-9).
요셉의 형제 11명은 자신이 만만합니다. 자신들은 절도죄를 범한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자기들이 의롭다고 하는 자신감이 충만한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만약 절도죄를 범한 형제가 있다면 그를 죽여도 좋습니다. 그리고 그의 형제 10명이 모두 은잔 주인의 노예가 되어도 좋습니다”. 요즘 말로 바꾸면, 죄인은 일벌백계로 다스리고 우리 형제들에게는 연좌제의 책임을 물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고대사회에서는 그러한 무거운 징벌이 가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흔히 반역의 죄를 그렇게 일벌백계로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고대왕국에 있어서는 반역의 죄인을 능지처참에 처하고 그들의 가족은 삼족을 멸합니다. 황제가 다스리고 있는 제국에 있어서는 더욱 가혹합니다. 옛날 중국의 경우를 보면, 아예 삼족의 삼족인 구족까지 멸문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의로움을 너무 믿다가 보면 큰 코를 다치게 됩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자기보다 정의롭지 못한 자를 맹렬하게 비난하게 됩니다. 자기만 깨끗하고 잘난 줄로 착각하고 있으니 그 오만과 편견이 오죽이나 하겠습니까? 그 앞에 엔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의를 너무 믿고 있는 사람 앞에서는 함께 신앙생활을 하기가 참 힘이 듭니다. 자기 의를 믿고서 자기 고집대로 밀어 부치고 있으니 분란이 일어나고 공동체가 시끄러워집니다. 둘째, 자신의 의를 가지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기에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싸웁니다. 그래서 세상의 법정에 가서 옳고 그름을 가려달라고 호소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승리를 얻으면 무엇을 합니까? 그것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들어가자면 세상의 법정이나 산헤드린 공회에서 옳다고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법정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였다는 판결이 필요합니다(마7:21). 그 판결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으로 행하고 복음으로 죽어가는 생명을 살릴 때에 주어집니다. 그런데 자기의 고집대로 자신의 의를 행하는 경우에는 주관적인 자신의 심증만 있을 뿐 객관적인 합의와 지지의 증거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과는 달리 다음과 같이 행동을 하고만 것입니다; “자신의 방식이 옳다고 마냥 밀어 부칩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과 처지 그리고 그들의 의로움을 전혀 살피지를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을 죄인으로 취급하여 아예 상종도 하지를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구원의 기회도 없다고 단죄를 해버리고 맙니다. 그 결과는 주님의 책망만을 초래할 뿐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눅6:42). 그 점을 사도 바울이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10:2-3).
청지기의 답변의 의미(창44:10)
청지기는 애굽의 총리인 요셉의 지시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요셉은 오직 그의 친동생인 베냐민 만을 총리의 관저로 데리고 오도록 조치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려서 남들이 보기에는 마치 죄인처럼 압송해오는 것입니다. 베냐민을 일단 그렇게 호송을 해오게 되면 요셉은 자신이 그의 친형임을 밝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듭된 흉년으로 굶게 되어 있는 가나안이 아니라 양식이 풍부하게 저장이 되어 있는 애굽에서 자신과 함께 영화를 누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시나리오가 사전에 잘 짜여 있으므로 요셉의 청지기가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의 말과 같이 하리라. 그것이 누구에게서든지 발견되면 그는 내게 종이 될 것이요, 너희는 죄가 없으리라”(창44:10). 그가 새벽에 베냐민의 자루 속에 은잔을 숨겼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절도범으로 몰아서 남들 보기에 자연스럽게 총리의 관저로 압송을 하면 됩니다. 겉으로는 종으로 삼는 것처럼 위장을 할 것입니다. 잘 따져보면, 청지기의 답변은 세 단계로 변화가 되고 있습니다; 첫째, 요셉의 형제들이 자신만만하게 떠든 소리를 접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의 말과 같이 하리라”고 동의를 했기 때문입니다(창44:10a). 둘째, 죽이지 아니하고 그냥 종으로 삼겠다고 말합니다(창44:10b). 만약 요셉의 형제들이 자신들의 의를 앞세워서 큰 소리를 치는 대로 그대로 행동을 했다가는 그들이 큰 낭패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베냐민은 죽게 되고 그들은 전부 종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청지기의 주인이 원하고 있는 해법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의 조치는 상당히 경감된 처벌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베냐민이 종으로 끌려가지만 요셉에게 인도가 되고 나면 그의 신분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베냐민을 끌고 오라고 하지만 사실은 조용히 모시고 오라는 것으로 청지기가 이미 주인의 내심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청지기는 주인이 왜 그렇게 그 젊은이를 우대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습니다. 눈에 쉽게 뜨일 정도로 총리가 오찬자리에서 유독 베냐민에게 눈길을 많이 주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젊은이에게 5배의 음식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불편한 것이 없는지 자주 베냐민의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습니다”(창43:34). 그러므로 청지기는 주인이 애지중지하고 있는 베냐민을 어떻게 해서든지 나머지 형제들과 분리시키려고 합니다. 그 대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내게 종이 될 것이요, 너희는 죄가 없으리라”(창44:10c).
무조건 베냐민을 총리의 관저로 끌고 가려는 청지기는 율법에 비추어보면 일종의 무리수를 두고 있습니다; “도둑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둑질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 도둑질한 것이 살아 그의 손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막론하고 갑절을 배상할지니라”(출22:3-4). 고대 율법사회에서는 남의 것을 도둑질하게 되면 두 배로 배상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베냐민이 은잔을 훔쳤다면 그것을 되돌려주면서 그 만큼의 돈을 또 지불하면 됩니다. 그들의 자루 속에 요셉이 돈을 많이 넣어주었으므로 그것으로 배상을 하면 될 것입니다(창44:1-2). 그런데 청지기가 그 율법을 어기고 있습니다. 바로 종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것은 율법에 비추어보면, 의도적인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청지기의 마음이 앞서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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