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252강(창43:33-34)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4월 1일(화)
이상하게도 11명의 형제들이 나이의 순서대로 좌석의 배치가 되고 있으며 또한 막내 베냐민에게는 다섯 배의 음식이 차려지고 있는데 그들은 그 점을 왜 깊이 생각하지를 아니하고 있는가?(창43:33-34)
이스라엘의 11명의 아들은 그 나이 차이가 별로 크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야곱이 77세에 아버지 이삭의 집을 떠나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라헬을 만나고 그녀를 아내로 얻기 위하여 7년간 무료 머슴살이를 하게 됩니다(창29:18-20). 둘째, 7년만에 맞이하는 결혼식 날에 그만 라반의 꾀에 넘어가서 대취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라헬 대신에 못생긴 언니 레아와 합방을 하게 됩니다(창29:22-13). 셋째, 다음날 아침 장인에게 항의를 했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대신 7일 후에 라헬과 초야를 치르고 다시 7년간 무료머슴살이가 연장이 되고 맙니다(창29:30). 넷째, 다음 해 레아가 맏아들 르우벤을 낳고 계속 아들을 생산합니다(창29:31-35). 그러나 정작 야곱이 사랑하는 애처 라헬은 불임입니다. 그래서 몸종을 첩으로 제공하자 아들들이 태어납니다(창30:4-13). 다섯째,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이 라헬의 태를 열어줍니다. 그때 요셉이 태어나고 마침내 합계 무료머슴살이 14년이 끝납니다(창30:22-25). 여섯째, 인색한 장인 라반 때문에 더 처가살이를 해보아야 자수성가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야곱이 철저하게 인식합니다. 따라서 무일푼으로라도 처가를 떠나고자 합니다. 그러나 라반이 그를 붙듭니다(창30:27-28). 그 이유는 야곱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재산을 불려주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야곱의 11아들의 나이계산을 해봅니다; 맏이 르우벤은 처가살이 8년째에 태어납니다. 11번째 아들인 요셉이 처가살이 14년째에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첫째와 11번째의 나이차이가 6살에 불과합니다. 이제 애굽의 총리인 요셉이 39살입니다. 맏형 르우벤이 45세입니다. 모두가 중년의 나이입니다. 그 시기에는 나이차이가 뚜렷이 외모로 드러나지를 아니합니다. 결국 요셉의 이복 형 10명은 나이차이가 매우 적기 때문에 그들을 외모로만 보고서 나이 순서로 배치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더구나 중동사람들은 수염을 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어렵습니다. 그리고 2처2첩으로부터 7년 동안에 11명의 아들을 생산하다가 보니까 그 가운데에는 같은 해에 생산이 된 아들도 있습니다. 생년이 같고 생월만이 다를 뿐입니다. 그들을 어떻게 구별할 수가 있을까요? 그들과 함께 오랜 세월을 지내보지 아니한 사람은 도저히 식별을 할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신들의 나이와 형 동생의 순서를 전혀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는데 나이순서대로 식탁에 좌석이 배정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할까요?
조금만 생각을 해본다면 그 해답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가나안에서 양식을 사려고 온 형제들 외에 그들 집안의 일에 정통한 사람이 반드시 애굽 총리의 관저에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제들은 그 놀라운 사실을 태 무심하게 지나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들 앞에 차려져 있는 엄청나게 맛이 있는 요리 때문입니다. 애굽의 정치적 실세인 수석총리가 먹는 음식이 그들 형제들의 상 앞에 차려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요셉은 22년 만에 만난 친동생 베냐민에게 가장 좋은 음식을 먹이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신기하게도 베냐민 덕택에 아무것도 모르는 이복 형들이 똑 같은 음식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다음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려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요4:37-38). 사실 지난 세월 낯선 나라 애굽에서 무진장 고생한 사람은 요셉입니다. 요셉이 베푼 잔치 자리에 요셉이 사랑하는 친동생 베냐민이 참석을 하고 있습니다. 덤으로 이복 형 열명은 단지 요셉이 베냐민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잔치를 함께 즐기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의 공생애와 대속의 십자가의 고난 그리고 사도들의 고난 덕분에 별다른 공로가 없는 성도들이 천국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은혜와 영광을 얻게 되는 것과 그 이치가 동일한 것입니다.
막내 베냐민의 자리, 그 끝자리에서 얻게 되는 영광(창43:34, 눅14:10)
베냐민은 막내 동생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 앉아있는 좌석의 제일 끝자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나이순서로 배열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43:33). 그런데 요셉의 사랑은 온통 끝자리에 앉아있는 베냐민에게 쏠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요셉이 자기 음식을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창43:34). 요셉이 친동생 베냐민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이복 형들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양적으로 따지더라도 5배나 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똑 같은 형제들인데 애굽의 총리가 초면인 막내 동생 베냐민에게 5배나 많은 음식을 주고 있습니다. 참 이상한 노릇입니다. 이복 형들이 어지간한 눈치라도 있었다고 한다면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 총리와 베냐민 두 사람의 인상착의를 비교를 해본다면 무엇인가 상당히 닮아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복 형들 열 명은 전혀 낌새를 채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애굽 총리가 설마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 22년 전의 요셉이라고 하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요셉이 자신의 음식과 같은 음식으로 충분하게 손님들을 대접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음식만 즐기더라도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베냐민의 상 앞에 5배의 음식이 차려져 있다고 하더라도 별로 신경이 쓰이지를 않습니다. 어차피 다 먹을 수도 없을 만큼 충분한 양의 음식을 모두들 차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많은 잉여의 음식을 베냐민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이복 형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람들은 그렇게 기분이 좋지 아니한 기억은 일찌감치 잊어버리고 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이복 형들이 처음에는 아버지 야곱을 속일 목적으로 요셉의 채색 옷에 짐승의 피를 묻혔습니다(창37:31-34). 그리고 요셉이 길을 오다가 짐승에게 찢겨서 죽은 것으로 허위보고를 했습니다. 그 허위사실이 결국에는 이복 형들의 양심까지 마비를 시키고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자 그들은 모두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하고서 죽은 사람의 이름과 기억을 그들의 메모리에서 깨끗하게 지워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말이 처음에는 남을 속이지만 나중에는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된다는 가설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는 대목입니다.
여기 본문은 그 정도의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훨씬 중요한 깨달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잔치자리의 상석이 아니라 말석이 엄청 은혜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그와 같은 입장에서 한번 음미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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