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250강(창43:29-31)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3월 31일(월)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소자’라고 부르게 됨으로써 그 의미가 복음에서 되살아 나다(창43:29, 마25:40).
모세는 베냐민에 대하여 네 가지로 그 정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창43:29); 첫째, 요셉의 어머니 라헬의 아들입니다. 둘째, 요셉의 동생입니다. 셋째, 이복 형들의 작은 동생입니다. 넷째, 소자입니다. 똑 같은 사람 베냐민인데 왜 네 가지로 그 정체를 소개하고 있는 것일까요? 도대체 모세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일까요? 쉽게 풀 수가 없는 의문입니다. 그렇지만 요한복음 제1장을 들여다 보면, 어느 정도 그 해답의 실마리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첫째로, 베냐민은 라헬의 특별한 아들입니다. 그 이유는 베냐민을 낳다가 어머니 라헬이 라마에서 객사를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창35:16-19). 따라서 라헬이 자신의 목숨과 바꾼 소중한 아들이 베냐민입니다. 환언하면, 라헬이 자신의 피와 물을 땅에 쏟고 마침내 자신의 이 땅에서의 목숨마저 버리게 되면서 남겨놓은 혈통이 바로 베냐민입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 한평생을 살면서 자신의 혈통만은 끊기지 아니하고 남겨놓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손을 통하여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남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핏줄을 타고서 흘러내려가고 있는 다음 세대이며 혈통입니다.
둘째로, 베냐민은 요셉의 친동생입니다. 요셉이 형제들 사이에서 느끼고 있는 가장 뜨거운 육신의 정은 단연코 베냐민입니다. 그런데 피붙이에 대한 육신의 정은 내리사랑과 치사랑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내리사랑이 훨씬 강합니다. 치사랑이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듯이 그녀의 소생인 요셉과 베냐민을 무지하게 사랑하고 있습니다. 편애로 보이는 그것은 엄청난 육정에 속합니다. 그렇지만 요셉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버지 야곱을 사랑하는 육신의 정이 동생 베냐민을 사랑하는 육정만큼 크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전자가 치사랑이고 후자가 내리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모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북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창43:30),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의 목을 어긋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창46:29-30). 요셉이 베냐민을 만났을 때 그 마음이 억제하기 힘들 정도로 울음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급히 안방으로 뛰어들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야곱을 만날 때에는 아들 요셉보다 이스라엘이 더 감격해 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이복 형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베냐민은 막내 동생에 불과합니다. 아버지는 같지만 어머니가 서로 다릅니다. 그것은 반 쪼가리 형제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2처2첩을 거느렸기 때문에 서로 형제 사이가 된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형제간이 된 것은 자신들의 뜻이 아니라 육신의 아버지의 뜻입니다. 부모가 모두 같은 경우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어머니와 태가 전혀 다르다가 보니까 아버지의 뜻이 우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뜻으로 태어나는 경우에 해당이 되고 있습니다. 그 보다 더한 경우로는 물론 양자로 입양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넷째로,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서 베냐민에게 다음과 같이 축복의 말씀을 해주고 있습니다;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창43:29). 소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요셉이 알고 있습니다. 그 소자의 의미가 구약에서 다음과 같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슥13:7).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 자들이 ‘작은 자’이며 ‘소자’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와 ‘그리스도’가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25:40).
고아와 과부 그리고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나그네 등이 율법사회에서는 사회적인 보호의 대상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레19:10, 신26:12-13). 하나님께서 왜 그들을 보호하시는 것일까요? 다분히 공생과 사회복지를 생각하시고 있기 때문일까요? 더 큰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과 직결이 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며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식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부모님이 자식을 차별하지 아니하듯이 하나님도 사람을 차별하지 아니하십니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두 가지의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것이다. 둘째, 그러므로 차별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선민의식을 가지게 되면 후자의 차별을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그리고 혈통과 육정 그리고 사람의 뜻을 앞세우게 되면 전자의 개념을 받아들이기가 힘들게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면 하나님의 뜻을 먼저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 때부터 복음의 일꾼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 복음의 일꾼은 소자를 돌보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하는 일에 전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은 그 점을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마28:18-20).
막내 동생, 소자를 주님께로 데려감으로써 어떠한 은혜를 얻게 되는가?(창43:30-31, 롬3:25, 5:10-11)
요셉의 이복 형들이 막내 동생 베냐민을 애굽의 총리에게 데려감으로써 큰 이익을 얻고 있습니다; 첫째, 총리가 주최하는 오찬자리에서 즐겁게 먹고 마실 수 있게 됩니다(창43:31, 34). 둘째, 한 가지 시험을 더 거친 후에 요셉이 그들을 용서하고자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창44:9, 16, 33-34). 셋째,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식솔을 전부 애굽으로 이주시켜서 먹여 살리고자 합니다(창45:11). 한 마디로, 그 때부터 이복 형들에게 흉년과 가뭄 가운데에서도 살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해줌으로써 하나님께 칭찬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영생을 얻게 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마25:34-40, 46).
요셉이 친동생 베냐민을 22년만에 만나게 되자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나옵니다(창43:30). 그리고 다시 애굽의 총리로서 공식적인 오찬모임을 준비하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창43:31). 이복 형들의 과거의 잘못을 따지지 아니하고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베냐민으로 말미암아 형들의 허물을 일단 간과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이치는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회개하는 자에게 칭의의 은혜를 베풀어주는 것과 동일합니다; “이 예수로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3:25),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 하느니라”(롬5:10-11).
요컨대, 소자 베냐민 한 사람을 요셉에게 데려다 주었더니 그와 같은 놀라운 은혜가 이복 형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으로 모든 피조물들을 똑 같이 사랑하고 소자의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허물이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마침내 영생을 얻게 되는 놀라운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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