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창세기 강해 제249강(창43:25-2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1. 27. 16:05

창세기 강해 제249(43:25-28)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330(주일새벽)

 

예물을 드리고 요셉에게 다시 절을 하고 있는 11명의 형제들로 말미암아 성취가 되고 있는 요셉의 두 번째 꿈의 예언(43:25-26, 37:9-10).

 

애굽의 실권자인 총리의 관저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유추할 수 있는 문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총리의 청지기가 요셉의 형제들 11명을 총리의 관저로 인도하고 있습니다(43:24). 그들은 정오에 오찬모임이 시작되기까지 대기실에서 손발을 깨끗하게 씻고 일단 기다리게 됩니다(43:25). 둘째, 총리 사브낫바네아가 청사에서 오전의 집무를 마치고 관저로 돌아오고 있습니다(43:26a). 요셉의 형제들이 접견실로 인도가 되어서 총리에게 예물을 드리고 땅에 엎드려 절을 하고 있습니다(43:26b). 셋째, 접견이 끝나고 나면 관저의 식당 귀빈실에 마련되어 있는 오찬의 장소로 함께 이동을 하게 됩니다(43:31). 좌석의 배치는 의전의 관례에 따라서 서열순서로 정해지고 있습니다(43:32-33). 넷째, 이상과 같은 관저의 구조는 손님을 맞이하고 각종 행사를 치르기 위한 건물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 외에 관저에는 총리가족의 생활공간청지기와 비서들의 거주와 활동공간이 별도로 갖추어져 있습니다(41:50-52, 43:32-33). 오늘날 총리나 국회의장의 공관의 배치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이복 형들은 애굽을 두 번째 방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두 번째로 애굽의 총리 사브낫바네아를 예방하고서 절을 올리고 있습니다(43:26). 그것이 반(, half)절이 아니라 완전히 땅에 엎드려서 올려 드리는 대례(大禮, 큰 절)입니다. 그와 같은 오체투지(五體投地, 온몸을 땅에 던져서 큰 절을 올리는 것)에 해당하는 절은 신자(信者)가 자신이 믿고 있는 신()에게 또는 신하가 왕에게 올려 드리는 경배의 형식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자신이 애굽에 오지 못하기에 대신 올려드리는 이스라엘의 예물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막내인 베냐민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풍경은 22년 전에 요셉이 헤브론에서 꾸었던 두 번째 꿈이 비로서 실현되고 있는 장면이라는 사실을 쉽게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37:9-10, 43:26).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이 요셉에게 절을 하듯이(37:9)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혈족들과 백성들이 경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당시 애굽 땅과 주변국가의 연이은 흉년을 극복하게 해줄 유일한 사람이 요셉입니다. 그에게 양식을 사게 해달라고 누구인들 사정을 하지 않겠습니까?(41:54-57). 목숨을 유지하게 해줄 사람에게도 그와 같이 오체투지를 하여야만 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모든 피조물들은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그 질문을 하고 있는 대목이 바로 본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해답은 훗날 베드로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5:8).

 

야곱의 안부를 묻고 있는 요셉에게 그의 형제들이 이스라엘을 주의 종 우리 아버지라고 지칭을 하다(43:28).

 

요셉의 형제들은 아직 애굽 총리의 정체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가 22년 전에 헤어진 요셉인 줄을 전혀 짐작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배알하고 있는 애굽의 총리는 어디까지나 애굽의 귀족이며 정치적인 실세인 사브낫바네아입니다(41:45a). 총리의 신분이 애굽의 명문거족인 수도권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사위(41:45b)라는 것도 대단하지만 더 대단한 것은 그가 지니고 있는 권세입니다. 그는 양식을 팔 수 있는 권한을 독점하고 있는 사람입니다(41:54-57). 연이은 흉년으로 말미암아 애굽의 양식을 살 수가 없으면 주변국의 백성들은 모두 기아로 죽고 맙니다. 그러한 실정이므로 한 마디로, 이웃나라의 백성들의 목숨 줄을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인물이 바로 사브낫바네아 총리입니다. 그러니 그 앞에서 누가 몸을 굽히지 아니하겠습니까?

양식을 사기 위하여 이웃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분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저 요셉에게 오체투지로 군신의 예를 올리더라도 양식을 팔겠다는 허락만은 꼭 받아내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요셉의 형제들도 아버지 야곱이 보낸 예물과 함께 요셉에게 대례를 올린 것입니다(43:26). 더구나 아버지 이스라엘의 안부를 묻고 있는 요셉에게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43:28a). 가나안에 있는 이스라엘 야곱이 졸지에 애굽 총리인 요셉의 종으로 묘사가 되고 있는 장면이 연출이 되고 있습니다. 그 말의 진실성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이 요셉의 형제들이 다시 머리를 숙여서 요셉에게 절하고 있습니다(43:28b).

그와 같은 묘한 상황은 물론 창조주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 이유는 그 옛날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꿈을(37:7-10) 요셉의 이복 형들이 다음과 같이 철저하게 무시를 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 도다. ,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37:18-20). 그들은 사람의 인생과 사회의 역사를 경영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무시한 것입니다. 그 결과 철저하게 굴욕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훗날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게 되면 이복 형들은 얼마나 무안하며 부끄러워할 것입니까?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서 대성통곡을 하고 형들과 함께 우느라고 그 장면이 그냥 지나가게 됩니다(45:14-15). 그렇지만 완전한 화해가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 이스라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요셉이 그의 이복 형들을 용서해주고 그들의 자손들까지 보호해주고 있는 것으로 이복 형들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45:9-11). 따라서 막상 아버지 이스라엘이 애굽에 이민을 온지 17년 후에 돌아가시게 되자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합니다(47:9, 28-29, 50:15). 그 결과 부디 살려달라고 동생 요셉에게 다음과 같이 매어 달리게 됩니다;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50:17-19),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50:21).

소인배와 같은 요셉의 형들입니다. 그 반면에 대인과 같은 요셉입니다. 그와 같은 차이가 왜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요셉이 오랜 기간 고생과 고난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45:5),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모든 사람들의 인생과 인간관계가 모두 합력하여 결국은 많은 생명을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어가는 도구로 쓰임을 받고 있다는 요셉의 깨달음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들입니다. 참고로, 사도 바울이 그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고 선언하기 1,900년 전에 벌써 요셉이 그 깨달음을 얻고 있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