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창세기 강해 제247강(창43:16-2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1. 26. 02:27

창세기 강해 제247(43:16-22)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328()

 

애굽 총리 사브낫바네아가 베냐민을 보고서 오찬모임을 마련하다(43:16).

 

탕자의 비유는 의사 누가만이 자신의 복음서에 수록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많은 비유의 말씀 가운데 누가는 탕자의 비유가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15:11-32’에 독점적으로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비유 가운데에는 많은 재산을 생전에 상속을 받아서 가출을 해버린 둘째 아들, 그 탕자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이 너무나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그 애타는 아버지의 마음이 창세기에서는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는 요셉의 마음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셉은 22년 전에 헤어진 친동생 베냐민이 보고 싶어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아니한 채 그의 이복 형들에게 조건을 제시합니다; “베냐민을 데리고 오면 그들에게 양식을 팔겠다는 것입니다”(42:34). 그렇지만 아버지 이스라엘이 막내 아들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42:38). 그 이유는 22년 전의 요셉처럼 또 없어질까 걱정이 되어서 입니다. 그렇지만 막상 가나안에서 양식이 바닥이 나자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라는 각오로 베냐민을 형들에게 내어줍니다(43:14). 마침내 요셉의 이복 형들이 막내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옵니다(43:2, 15).

요셉이 동생 베냐민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동생을 아는 체 할 수가 없습니다. 아직 자신의 정체를 밝힐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동생을 위해서 잔치를 열어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총리관저에서의 오찬모임이 준비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43:16). 여기서 요셉의 잔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복음서로 흘러 들어가고 있습니다. 요셉과 동일한 기쁨을 얻게 된 아버지가 누가복음 제15장에서 돌아온 아들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있기 때문입니다(15:23-24).

덩달아서 요셉의 이복 형 열 명은 베냐민 덕분에 영광스럽게도 애굽의 권력자인 총리의 관저에서 오찬을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43:16-17). 그들은 베냐민을 애굽 총리의 집에 데리고 왔기에 그 공로로 대접을 받게 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종들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양을 찾아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하면 장차 그 잔치자리에 함께 초대가 되어서 천국잔치를 즐길 수 있게 되는 영광이 있게 될 것입니다(15:7, 22:10, 28-18-20, 14:25, 12:3).

 

애굽 총리의 오찬모임에 함께 초대를 받고 있는 이복 형들이 요셉의 정체를 모르므로 여러 모양으로 두려워하다(43:17-22)

 

천국잔치에 초대를 받았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그런데 마태복음 제22장에 기술이 되어 있는 혼인잔치의 비유를 참조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아니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천국잔치의 자리에 참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도 긴급한 일이 이 세상에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보다 더 긴급하고도 소중한 일들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도 마태는 세 가지의 일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첫째, 계절에 맞추어서 농사를 지어야만 하는 일이 바쁘기 때문입니다(22:5a). 둘째, 이미 약속이 되어 있는 사업상의 만남을 취소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22:5b). 셋째, 천국잔치에 참석하라는 그 초청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예 초청장을 가지고 온 하나님의 종들을 잡아서 모욕하고 죽여버립니다(22:6).

어째서 천국잔치에 오라는 초청을 그토록 싫어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한 마디로, 이 세상에서 한 평생 세상적인 방법으로 제 마음 먹은 대로 출세도 하고 돈도 벌고 존경도 받으면서 편하게 잘 살고 있는데 왜 자꾸만 귀찮게 구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서 천국잔치에 참석을 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것이 듣기가 거북하고 아니꼬운 것입니다. 세상에는 그렇게 어렵게 신앙생활을 하지 아니하여도 세상의 복과 천국의 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하는 종교가 많은데 왜 구태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야만 구원을 받고 천국잔치에 참여할 수가 있게 된다고 강변하느냐는 항의를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들은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애굽의 실세인 총리의 관저오찬에 초대를 받았으니 분명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애굽 총리의 속내를 알 수가 없어서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지난 번에 처음으로 애굽에 왔을 때의 일이 자꾸만 생각이 납니다. 자신들을 정탐꾼으로 몰아 부치는 바람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이번에는 또 어떠한 계략을 꾸미고 있는 것일까요?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것 모두를 빼앗고자 수를 쓰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지레짐작을 하면서 겁을 내고 있습니다;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 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43:18).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는 요셉이 들으면 참으로 웃을 일입니다. 노예의 값이 은 30냥에 불과합니다(21:32). 나귀의 값이 소 값보다 비싸다고는 하지만(12:16) 그것이 애굽의 총리의 입장에서야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복 형들은 그것이 큰 재산인 줄 알고서 걱정들을 하고 있습니다. 좁은 가나안 땅에서 평생을 살다가 보니까 그들의 식견이 보통 협량(狹量, 속이 좁고 그릇이 크지를 못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큰 인물로 성장하자면 무조건 큰 제국의 대 도시로 진출을 하고 볼 일입니다.

어쨌든 그들 생각의 중심에는 재물이 결부가 되어 있습니다. 훗날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 따르게 되면 말씀을 들으나 결실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경우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입니다(13:22). 그 말씀이 여기 애굽 총리의 오찬 초청을 받아 놓고서도 두려워하여 떨고 있는 요셉 형들의 경우에 적용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43:18). 그들은 불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기어코 총리의 청지기에게 자신들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들이 요셉의 집 청지기에게 가까이 나아가 그 집 문 앞에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주여 우리가 전번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가지고 여관에 이르러 자루를 풀어본즉 각 사람의 돈이 전액 그대로 자루 아귀에 있기로 우리가 도로 가져왔고 양식 살 다른 돈도 우리가 가지고 내려왔나이다. 우리의 돈을 우리 자루에 넣은 자는 누구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나이다”(43:1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