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창세기 강해 제253강(창44:1-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1. 29. 05:40

창세기 강해 제253(44:1-3)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42()

 

계속 움직이는 신앙인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네 가지(44:1-3)

 

  인생은 계속 변화하며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한 자리에 말뚝처럼 박혀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환경에서 오는 충격이 엄청난 변화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인 변화만 꼽아보더라도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자연환경이 계속 변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노병사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셋째, 환경과 인간관계의 변화에 따라 내적으로 어쩔 수 없이 희로애락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넷째, 인생의 고비마다 생사화복의 선택을 강요 받고 있습니다. 그렇게 변화를 맞이하면서 계속 대응을 하고 움직일 수밖에 없도록 설계가 되어 있는 것이 인생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창조주께서는 성도들에게 더 적극적인 인생을 살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움직이며 변화의 주체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창세기에 나타나고 있는 믿음의 조상들처럼 평생 동안 유목민과 같은 나그네의 삶을 영위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전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의 움직임이 둔화가 되면 하나님은 가뭄과 기근으로 그들을 다시 나그네로 만들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요셉의 형제들도 그러합니다. 그들은 양식을 사기 위하여 가나안에서 애굽의 수도까지 먼 길을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룻밤 애굽 총리의 관저에서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고서 다음날 아침이면 일찍 양식을 가지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43:34, 44:3). 고향 식솔들을 거듭된 흉년의 굶주림에서부터 구해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42:33, 44:17). 그래서 (요셉이) 아침이 밝을 때에 사람들과 그들의 나귀들을 보내니라”(44:3)고 하는 표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향으로 식솔들의 목숨을 구하러 가는 그들에게 요셉이 청지기를 시켜서 네 가지를 제공하고 있습니다(44:1-2); 첫째, 그들이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양의(enough to move) 식량을 자루에 채워주고 있습니다. 둘째,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어줍니다. 셋째, 요셉이 아끼는 은잔을 그 청년 베냐민의 자루에 넣어줍니다. 넷째, 양식 값으로 받은 돈을 다시 그 자루에 넣어줍니다. 그 네 가지의 의미를 조금 확장해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려고 길을 떠나고 있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선물이 그와 비슷할 것으로 생각이 되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생명의 양식과 식량을 모두 주님께서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공급량에 대한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항상 나그네 인생길을 계속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양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enough to move’의 뜻이므로 움직이지 아니할 때에는 공급이 중단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많이 가지고자 욕심을 내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지니고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공급을 제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와 선교의 삶에 있어서 주님께서 주시는 재화의 크기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주시는 것보다 더 많은 깨달음과 재화를 원하고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뜻을 넘어서는 자신의 욕심이나 야망일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반대로 전혀 말씀의 지혜나 생활의 양식이 주어지지 아니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사역이 주님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지 아니하다는 반증일 수가 있습니다.

둘째로, 양식만 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용돈까지 챙겨서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존만을 책임지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소 여유가 있는 생활을 위한 용돈까지 주고자 하십니다. 물과 떡으로만 사는 것이 인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아름다움을 찬양하자면 포도주와 꿀도 필요합니다. 이 땅에서 주님과 동행을 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풍요로움과 인생의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어야 더 풍성한 천국에서의 삶을 동경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죽도록 고생만 하고서 살다가 죽는다면 천국의 풍요로움은 너무나 생소하여 적응하기가 참으로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안식년은 성도들 모두에게 필요한 재충전의 기간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요셉은 자신의 은잔을 은밀하게 친동생 베냐민의 자루 속에 숨기고 있습니다. 그 은잔이 발견이 되면 그는 애굽 총리의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요셉은 베냐민을 흉년과 굶주림이 계속 되는 가나안 땅에 그냥 버려두기를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를 유턴시켜서 자신이 살고 있는 풍요로운 총리의 관저로 데리고 오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Calling’하는 수단이 바로 그 은잔입니다. 그 의미를 모르고 있는 동안에는 그 은잔이 자신의 자루 속에서 발견이 되면 이제는 죽은 목숨이구나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입니다. 이 세상의 기아와 흉년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요셉은 오직 한 사람 자신의 친동생인 베냐민에게만 그와 같은 구원의 은잔을 주고 싶어합니다.

넷째로, 양식을 사기 위하여 지불한 돈을 요셉이 몰래 되돌려주고 있습니다. 아직 흉년이 5년이나 남아 있으므로 계속 곡식을 사기 위하여 애굽으로 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45:6). 돈이 떨어지게 되면 모두들 굶어 죽을 형편이 될 것입니다(47:15-17).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되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지불한 돈을 되돌려주고 있다는 개념은 오늘날에도 적용이 가능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십일조를 하는 등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재화 가운데 일부를 바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굶어 죽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되돌려 주시는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아시는 창조주께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매우 적절한 시기에 ‘refund’를 해주시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한번 구체적으로 다양하게 경험을 해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