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256강(창44:11-15)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4월 5일(토)
요셉의 이복 형들의 변화(창44:11-13)
애굽 총리의 청지기가 요셉의 11명의 형제들의 자루를 전부 검사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형제들이 짐을 나귀에서 풀어서 급히 땅에 내려놓고 있습니다(창44:11). 검사는 장남인 르우벤부터 시작하여 나이 순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창44:12a). 10명의 이복 형들의 자루를 전부 풀어보았지만 애굽 총리의 은잔이 없습니다. 이제 막내인 베냐민의 자루만 검사하면 됩니다. 지금까지 아무 것도 없었으니 모두들 제법 안심을 하고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막내의 자루 속에서 그 은잔이 나타나고 있습니다(창44:12b). 깜짝 놀란 형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습니다. 다른 형제들이 아니라 하필이면 막내 베냐민의 자루에서 그 은잔이 발견이 되고 있다니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습니다. 베냐민만은 가나안으로 데리고 가야만 합니다. 아버지 야곱에게 철석같이 약속을 하고서 그를 애굽으로 데리고 왔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장자 르우벤이 자신의 아들 두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맡기면서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리고 갔다가 무사히 데리고 오겠다고 제의를 했습니다(창42:37). 그래도 아버지 야곱은 결코 베냐민을 내어주지를 아니했습니다(창42:38).
시간이 경과하여 드디어 양식이 모두 떨어졌을 때에 4남 유다가 자신의 목숨과 영생을 걸고서 베냐민의 무사귀환을 약속했습니다(창43:1-5, 9). 그 방법이 아니면 모든 식솔들이 굶어 죽게 되는 형편이 되었을 때에 아버지 야곱이 비로서 베냐민을 내어주었습니다(창43:13-14). 그렇게 힘들게 베냐민을 빌려서 동행을 했는데 이제 큰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를 가나안에 데리고 갈 수가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베냐민을 애굽 총리의 종으로 내 놓아야만 합니다(창44:10). 요셉의 이복 형들 열 명은 모두들 앞이 캄캄합니다.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그들은 막내 베냐민을 애굽에 두고서 가나안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베냐민이 애굽 총리 집에 종이 되고 말았다고 아버지에게 보고하는 그 순간 130세의 노인 야곱은 이 세상을 작별할 공산이 크기 때문입니다(창47:9). 그래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통분만 하고 있습니다. 그 장면이 바로 자신들의 옷을 애꿎게 찢고 있는 것입니다(창44:13a). 돌이켜보면, 그 옛날 22년 전에 그들은 동생 요셉을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에게 은 20에 팔아버린 사람들입니다(창37:28). 그 때는 아무런 죄책감과 안타까움이 없이 그저 요셉의 채색 옷에 짐승의 피를 묻혀서 그가 마치 광야에서 짐승에게 물려서 찢겨 죽은 것으로 허위보고를 했습니다(창37:31-32). 그 때 그들은 처음으로 아버지 야곱의 엄청난 슬픔과 애통함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창37:33-35). 그리고 그것이 참혹한 범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이복 형들은 22년 만에 그와 같은 불효를 다시 저지르게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되고 있습니다(창44:10, 12). 그들과 그들의 식구들이 모두 먹고 살자고 똑 같은 범죄를 아버지에게 또다시 저지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열 명의 이복 형들은 모두들 자신들의 짐을 꾸려서 가나안이 아니라 애굽 총리의 관저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창44:13). 한 마디로, 베냐민의 목숨과 아버지 이스라엘의 목숨이 같은 운명의 줄로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창44:30). 그리고 그 줄이 애굽에서 양식을 다시 살 수 있는 유일한 구명(救命, 생명을 구함)의 줄이라는 사실도 실감하고 있습니다(창42:20, 34). 요컨대, 그 줄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자녀들의 목숨에도 연결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비로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옛날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아먹을 때에는 조금도 알지 못했던 그 진리가 왜 지금 나이가 들어서야 그들의 가슴을 저리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이제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모두들 애굽의 수도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창44:13).
베냐민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요셉의 모습이 상징하고 있는 것(창44:14-15)
애굽의 총리인 요셉은 자신의 친동생인 베냐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창44:14). 흉년이 애굽과 주변나라 가나안에 앞으로도 계속이 될 것입니다(창45:6). 가뭄과 기근이 극심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세상에 자신이 사랑하는 동생 베냐민을 계속 살게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은잔을 그의 곡식자루에 은밀하게 넣어두었습니다(창44:2). 그 은잔은 그를 자신이 살고 있는 애굽의 총리관저로 다시 불러들일 수 있는 빌미가 될 것입니다. 이제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청지기가 베냐민을 일단 절도범으로 몰아서 체포해올 것입니다. 사실은 절도범이 아니라 요셉이 사랑하고 있는 친동생입니다. 그가 무죄임을 요셉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요셉은 빨리 베냐민을 자신의 집에서 다시 만나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났는데도 총리의 청사로 등청도 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베냐민을 다시 만나고 양식이 있는 애굽에서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것 그 이상으로 더 긴요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베냐민이 도착하면 그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힐 예정입니다. 22년 전에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친형 요셉이 버젓이 살아 있으며 그것도 애굽의 실세인 총리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베냐민이 얼마나 놀랄까요?(창37:33, 45:4-8) 그 모습을 미리 상상하면서 요셉은 초조한 마음을 달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예상과는 달리 베냐민 뿐만 아니라 그의 뒤를 따라서 이복 형들 열명이 줄줄이 들어오고 있습니다(창44:14). 이제는 요셉이 더 놀랄 차례가 되고 있습니다.
동생 베냐민을 기다리고 있는 요셉의 애타는 마음과 모습은 예수님의 이야기 한 토막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것은 바로 미리 재산을 상속받아서 큰 도시로 떠나버린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눅15:20). 재산을 다 날려버린 탕자이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용서를 해주고자 합니다(눅15:22-23).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는 큰 아들은 그와 같은 아버지의 처사가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래서 탕자를 다시 아들로 맞아들이고 동네잔치까지 베풀고 있는 아버지에게 항의를 하고 있습니다(눅15:28-30). 그 모습은 마치 하나님 사랑으로 똘똘 뭉쳐있다고 하는 유대교인들인 이스라엘의 행태와 그들의 선민사상을 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여기서 요셉은 보기에 따라서는 선민 이스라엘과 같습니다. 그는 베냐민의 자루 속에만 애굽 총리의 관저로 되돌아올 수 있는 ‘calling’ 용도의 ‘은잔’을 넣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복 형들에게는 그 은잔을 넣지 아니했습니다(창44:2). 그들은 22년 전에 자신을 죽이려다가 어쩔 수 없이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에게 돈을 받고서 노예로 팔아버린 원수들이기 때문입니다(창37:20, 28).
그런데 어이가 없게도 재산을 축낸 탕자와 같은 그들이 베냐민과 함께 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창44:14). 기다리지 아니한 그들이 베냐민과 함께 돌아오고 있기 때문에 요셉은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합니다. 그 방법이 바로 그들이 함께 돌아온 이유를 그들의 입으로 직접 설명하게 하는 것입니다(창44:15). 과연 요셉이 이복 형들로부터 어떠한 이야기를 듣게 되면 마치 이방인을 향하여 두 팔을 활짝 벌리고 기다리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과 같은 사랑의 소유자로 변화할 수가 있을까요?(사65:1-2, 롬10:21) 창세기의 기록은 이제부터 그 대목에 관한 설명을 시작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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