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창세기 강해 제238강(창42:5-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1. 22. 05:14

창세기 강해 제238(42:5-8)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320()

 

요셉의 형들이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42:6), 마침내 22년 만에 실현이 되고 있는 요셉의 첫 번째 꿈(37:6-8)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인생 가운데 반드시 만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원수입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는 죽어서 청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생전에 청산이 되도록 설계가 되어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피해자를 죽여버린 가해자의 경우에는 어떻게 그 무죄한 자의 피가 복수를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창세기 제4장에서 이미 그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카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카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여호와께서 카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4:8-12). 두 가지 심판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인과응보에 의한 심판이 먼저 있습니다. 그것으로 무죄한 자의 핏값이 모두 청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죽은 다음에 영생을 걸고 내리는 창조주의 최종심판이 존재하고 있습니다(5:29).

그 두 가지 가운데 요셉과 그의 이복 형들 사이의 은원(恩怨, 은혜와 원한)관계에 있어서는 전자의 경우가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 22년 만에 살아 생전에 인과응보의 기회가 요셉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이복 형 10명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42:8). 그들은 그저 흉년 때문에 가나안의 식솔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애굽에 들어왔습니다(42:5). 그리고 양곡을 살 수 있는 최종허가를 얻기 위하여 애굽의 총리 앞에 서 있을 뿐입니다(42:6).

22년 만에 곡식을 사기 위하여 열 명의 이복 형들이 애굽에 나타났습니다(42:5). 지금 총리인 요셉 앞에서 땅에 엎드려 큰 절을 올리고 있습니다(42:6). 짧은 순간이지만 요셉은 만감이 교차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17살에 헤브론 집에서 꾸었던 그 기이한 꿈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형들의 볏단이 자신의 볏단을 향하여 절을 올리고 있던 그 장면이 떠오르고 있습니다(37:7). 두렵고도 무서운 일입니다. 그것은 그냥 지나가는 꿈이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오랜 고난과 인내의 과정을 통과한 후에 현실로 마주치게 되는 꿈입니다. 그것이 일종의 예언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주고자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열명의 이복 형들을 하나님께서 애굽 총리의 집무실에까지 보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강력한 메시지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비전은 반드시 살아 생전에 성취가 되는 현장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고난과 고통의 순간들을 참고 끝까지 인내하며 사람들의 생명 살리기에 힘써는 자에게는 그 영광이 주어집니다. 그러한 자는 자신의 원한을 직접 갚지 아니하고 그 일을 하나님께 기도로써 맡겨드린 자라고 하겠습니다”(42:6, 45:5-7, 12:17-21).

 

요셉의 형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42:7-8)

 

17살짜리 철부지가 그 옛날의 요셉이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편애만을 믿고서 거들먹거렸습니다(37:2). 대 족장인 이스라엘은 죽은 애처 라헬을 못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소생인 요셉을 총애하여 채색옷을 입히고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있습니다(37:3). 열명의 이복 형들은 그 마음이 대단히 불편했습니다(37:4). 그 결과 그들은 공모하여 요셉을 22년 전에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아버린 것입니다(37:25-28). 다소 양심에 찔리는 일이기는 하지만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사실 요셉은 그가 하고 있는 얄미운 일로 미루어본다면, 형들을 아예 무시했기에 그 정도의 응보는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먼 나라로 노예로 팔려 가버린 동생을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형들의 머리에는 그저 17살의 철부지 요셉의 잔상만이 어쩌다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지금 르우벤을 비롯한 열 명의 형제들이 큰 절을 올리고 있는 상대방은 어린 애굽의 황제를 뒷바라지하고 있는 막후의 실력자입니다. 그는 수석총리일 뿐만 아니라 애굽에서 최고의 지혜자로 불리며 바로의 사부이기도 합니다(45:8-9). 그 이름도 애굽식으로 사브낫바네아로 바뀌어져 있기에 요셉의 형들은 그의 정체를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41:45, 42:8). 더구나 전임 황제가 히브리인 요셉의 신분을 철저하게 세탁하기 위하여 요셉을 애굽 최고가문의 사위로 만들었습니다(41:45). 그리고 7년 풍년 후에 연속 흉년이 찾아 들자 애굽의 국력은 더욱 욱일승천하고 있습니다. 지역패권이 훨씬 공고해지면서 바로의 절대권력이 더욱 강화되고 있습니다(47:13-26). 그 모든 것이 수석총리인 요셉의 공로입니다. 그러므로 애굽 땅에서는 감히 요셉의 전력(前歷, 옛날의 경력)에 대하여 입을 놀릴 자가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브낫바네아는 애굽 및 주변국에 있어서 오로지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일 뿐입니다. 반면에 요셉은 열명의 이복 형들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보고 있습니다(42:7). 그만큼 그들의 모습은 크나큰 상처가 되어서 자신의 뇌리 속에 깊숙이 박혀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