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창세기 강해 제239강(창42:9-1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1. 22. 05:16

창세기 강해 제239(42:9-16)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321()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42:9a)

 

요셉은 이제 가나안 땅 아버지 야곱 집의 철부지가 아닙니다. 그는 애굽의 총리로서 9년째 일하고 있는 사브낫바네아입니다(41:45-46). 이미 애굽 제국에서 최고의 지혜자이며 명재상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그는 자신이 17세에 꾸었던 꿈도 재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깊이 생각한 결과, 그 꿈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첫째로, 요셉이 장차 왕이 되고 부모와 형제들의 절을 받게 되는 위치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창세기 제42장 제6절의 기록으로 이미 실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정도의 의미에 머물고 있는 꿈의 내용이 아닙니다. 둘째로, 요셉이 꾼 두 가지의 꿈은 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의 꿈은 요셉의 하나님 신앙이 형제들의 현세주의 사상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고 있다는 의미입니다(37:7, 28:16-18, 1:20-23). 요셉이 수확을 하여 묶어서 세우고 있는 볏단은 그의 인생 가운데 바로 세우고 있는 하나님 경외사상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그의 이복 형들은 오로지 대 족장 이스라엘의 지위와 재산이 탐이 났을 뿐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하나님 신앙이 그들의 물질주의 사상을 이기고 승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의 꿈은 일월성신을 비롯하여 모든 피조물들이 학수고대를 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출현을 의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37:9, 8:18-21).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과(3:16) 그 뜻을 따르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1:12-13) 모든 피조물들이 감사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의 해석에 의하면 요셉의 꿈은 이제 실현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9년 전에 애굽의 수석총리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2년 전에는 더 큰 권한을 얻었습니다. 그 연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7년 연속 풍년이 끝나는 그 해에 공교롭게도 자신을 애굽의 총리로 발탁했던 세누스레트2(재위BC 1897-1878)가 서거하게 됩니다. 죽기 전에 바로는 다가올 7년의 흉년을 대비하고 있는 요셉에게 어린 황제의 장래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수석총리인 사브낫바네아 요셉에게 전권을 위임합니다. 그 이유는 그와 같은 권한의 위임이 없으면 곧 다가올 7년의 흉년을 극복하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제국이 무너질 것입니다”. 그 결과 요셉은 어린 바로의 스승이자 아버지의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45:8-9). 세누스레트3(재위BC 1878-1841)는 부황의 유지(遺志, 남긴 뜻)대로 모든 권한을 수석총리에게 위임을 했습니다.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애굽 온 땅이 굶주리매 백성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양식을 구하는지라. 바로가 애굽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요셉에게 가서 그가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 하니라”(41:55).

이제 두 번째의 해석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왜 요셉에게 그렇게 큰 천하의 권세를 위임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요셉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흉년으로 죽게 될 애굽과 이웃나라 백성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의 총책임자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백성들의 목숨구원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들의 영혼까지 구원한다는 것으로 확대하여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만민구원의 복음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복음의 일꾼이며 하나님의 자녀의 예표가 되고 있는 사람입니다.

복음의 일꾼들은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파송을 받고 있습니다(17:18). 주님께서는 천하의 권세를 가지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는 복음의 일꾼들을 도우시고 있습니다(28:18-20). 일원성신 등 모든 피조물도 구원을 얻기 위해서 복음의 일꾼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글 3:16’절 그리고 사도 바울의 글 8:18-21’절도 모두 그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요셉은 그와 같은 일들이 모두 자신이17세에 꾸었던 두 가지의 꿈에 대한 정확한 해석임을 깊이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42:9a).

 

요셉은 이복 형들을 왜 정탐꾼으로 몰아 부치고 있는가?(42:9b)

 

정탐꾼’(spy)이라는 용어는 민수기에서 더 구체적으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가나안의 남쪽 변방인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 지파에서 한 명씩 선출하여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냅니다(13:2-20, 1:19). 그 땅의 형편과 정복의 가능성을 염탐해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탐꾼은 그 땅의 정복 가능성을 염탐하고자 하는 자입니다. 여기서 요셉은 자신의 이복 형들을 애굽의 곡창지역을 점령하려고 염탐하러 온 자들로 몰아세우고 있습니다(42:9b). 그것은 억지입니다. 이스라엘의 힘으로써는 강력한 애굽 제국을 상대할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의 억지주장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 형들이 옛날 요셉 자신을 노예로 팔아 치우던 그 모양 그대로인지 아니면 개과천선을 하고 있는지 그 사실을 확인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대로이면 혼을 내줄 것이고 만약에 선한 사람으로 바뀌어져 있다면 구원해주려고 합니다(44:33-34, 45:4-11). 둘째, 요셉의 꿈의 풀이와 관련이 되고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볏단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다른 볏단을 만들고 있었습니다(37:7). 그것은 세상적인 소유욕과 정복욕 그리고 지배욕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어린 날 보았던 세겜 사건의 경우가 그와 같았습니다. 그 주동자는 둘째 형 시므온과 셋째 형 레위였습니다(34:25). 그들이 여전히 세상적인 논리와 소유욕에 사로잡혀서 살고 있는지 아니면 형제와 사람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는 자로 바뀌어져 있는지를 요셉이 파악하고자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곧 함께 먹고 살아갈 양식을 구하려고 찾아온 진실한 자임을 증명하는 방법은 무엇인가?(42:10-16)

 

어떻게 하면 세상적인 탐욕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과 피조물들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임을 증명할 수가 있을까요? 요셉이 그 해답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막내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너희 중 하나를 보내어 너희 아우를 데려오게 하고 너희는 갇히어 있으라. 내가 너희의 말을 시험하여 너희 중에 진실이 있는지 보리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과연 정탐꾼이니라 하고”(42:15-16). 막내 아우를 요셉에게로 데리고 오는 것이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막내 아우의 의미에 대해서는 제43장 후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43:29). 작은 동생의 의미가 어느 사이에 소자로 바뀌고 있습니다. ‘소자의 뜻은 세상에서 소외를 당한 자, 돌보아줄 대상자입니다. 구체적으로 고아와 과부 그리고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나그네를 지칭하고 있습니다(14:29). 그들에게 인간대접을 해주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것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5:40).

요셉은 9명의 형들을 가두고 한 사람을 가나안으로 보내어서 막내 동생을 데리고 오는 방법을 바꾸고 있습니다. 반대로 실시합니다; “너희가 확실한 자들이면, 너희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42:19-20). 결국 시므온을 결박하여 옥에 가두어둡니다(42:24). 9명의 형들은 많은 양식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이 과연 시므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훗날 다시 애굽으로 올까요? 요셉은 그 결과를 진지하게 지켜보고자 합니다. 그들이 옛날의 습성 그대로이면 시므온을 희생시키고 자신들만 살고자 할 것입니다(11:50). 마치 요셉을 희생시키고 자신들의 보신책을 구하던 때와 같을 것입니다(37:20, 28, 32). 그러나 만약에 개과천선을 했으면 형제의 목숨을 구하려고 할 것입니다. 참으로 신묘한 계책을 펴고 있는 요셉입니다. 사족을 더하자면 요셉의 관심사가 바로 주님의 관심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