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235강(창41:50-52)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3월 18일(화)
요셉의 가정생활과 첫 아들 므낫세의 탄생(창41:50-51)
요셉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고 있습니다(창39:2-3). 그 이유는 요셉이 만민의 생명을 구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창45:5, 7-8, 50:20).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생애를 통하여 정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7),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9),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10:10-11).
하나님의 예언을 믿고서 애굽의 총리로서 일하고 있는 요셉입니다(창41:29-36, 39-41). 7년 풍년 때에 많이 생산이 되는 곡물을 전국의 창고에 잘 저장함으로써 이어서 찾아올 7년 흉년을 대비하고자 그는 진력하고 있습니다(창41:45-49). 애굽의 백성들과 흉년을 함께 경험하게 될 주변국의 백성들의 목숨을 모두 건져내고자 하는 것입니다(창41:55-57). 그것이 예언을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지만 막상 예언이 현실적으로 그대로 실현이 될 것인지 아닌지는 그 때가 되어보아야만 알 수가 있습니다. 미래지사를 믿기는 하지만 아직 실증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창조주의 예언을 믿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변수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믿음이 흔들리고 불안합니다. 혹시 예언대로 이행이 되지 아니할 경우에는 자신의 목숨을 정치적인 희생양으로 내어놓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7년 풍년이 예언대로 실현될 때까지 요셉은 고난의 세월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요셉의 마음 속에는 다른 사람에게 그 속내를 밝힐 수 없는 크나큰 고통이 있습니다. 이웃나라 가나안 남부에 살고 있는 부친과 형제들 때문입니다. 이복 형들은 공모하여 자신을 죽이려고 하다가 종래에는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리고 말았습니다(창37:20, 28). 그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그 마음이 심히 괴롭습니다. 당시 헤브론 본가에 계셨던 아버지 야곱과 친동생 베냐민은 그 진상을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의 이복 형들은 요셉 자신이 전령으로 세겜의 형들을 찾아서 오다가 그만 짐승에게 잡아 먹혔다고 거짓보고를 했을 것입니다(창37:20, 31-34). 아버지와 동생은 그 말을 믿고서 자신을 찾지도 아니하고 있을 것입니다. 산채로 죽은 사람으로 취급을 당하고 있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고 비참합니다. 그 과거지사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속에서 분노가 쌓이고 마음 속에서 통증이 심해질 따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고통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언대로 이루어지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애굽의 총리 요셉의 정치적인 고난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언대로 이루어지도록 풍흉을 섭리하고 계십니다. 아울러, 요셉에게 그 모든 고난과 고통을 잊어버릴 수 있도록 큰 선물을 주시고 있습니다. 요셉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 있는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요셉의 사랑하는 아내이자 온 지방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인 아스낫이 흉년이 들기 전에 요셉에게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창41:50).
요셉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놀라운 선물을 기뻐하면서 풍년과 흉년을 기다리고 있는 초조한 마음을 달래고 가슴에 응어리져있는 고향 아버지 집에서의 기억까지 지워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그와 같은 결심을 아예 장남의 이름자의 의미로 삼고 있습니다(창41:51a). 그 결과 장남 므낫세의 이름자의 뜻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창41:51b).
차남 에브라임의 탄생의 의미(창41:52)
요셉은 30세에 기적적으로 애굽의 총리가 된 사람입니다(창41:46). 동쪽 다른 문화권에서 애굽으로 이주를 해온 사람을 ‘히브리인’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요셉은 정확하게 히브리인입니다(창41:12). 게다가 그는 정식으로 이민을 온 사람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노예로 팔려서 애굽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인이며 노예의 신분이 바로 요셉입니다. 그리고 바로의 친위대장인 보디발, 바로의 신임이 두터운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을 두루 상전으로 모신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노예의 신분이라고 하는 사실에는 법적으로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창39:1-4, 40:1-4). 그렇게 애굽에서 최 하층민으로 분류가 되고 있는 요셉이 하루 아침에 애굽의 수석총리로 발탁이 되었으니 그것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섭리이며 역사의 결과입니다.
그렇게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총리가 된 사람이 30세의 요셉입니다. 바로는 요셉의 신분을 최상급으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수도권 권문세가인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의 결혼을 주선했습니다(창41:45). 그 결과 7년 풍년이 끝나기 전에 두 아들이 탄생을 하고 있습니다(창41:50). 나이 차이가 몇 살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장남의 이름이 ‘므낫세’입니다. 맏아들을 품에 안고서 요셉은 정치적인 근심과 가나안에 살고 있는 형들로부터 받은 마음속 고통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크나큰 은혜입니다. 노예신분이었던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워준 것만큼이나 큰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지내는 사이에 7년 풍년이 계속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마지막 풍년이 들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풍년이거나 흉년이거나 별 상관이 없습니다. 요셉은 마음 속으로 안심을 하게 됩니다. 7년 풍년의 예언이 현실로 이루어진 해이므로 이제는 한숨을 돌리고 내년부터는 애굽에서 번성하는 일만이 남아 있습니다. 예언대로 흉년이 찾아온다면 계획대로 정부미를 방출하면 됩니다(창41:36). 그리고 만약에 평년작이 된다고 한다면 더 좋습니다. 정부미를 아낄 수 있으며 그 다음에 찾아올 흉년을 더 쉽게 대비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정치적인 판단을 하고서 한숨을 돌리고 있는 요셉에게 큰 선물이 또 하나 주어지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태어난 것입니다. 금슬이 좋은 아내 아스낫으로부터 에브라임이 태어난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마음을 담아서 둘째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창41:52).
그런데 요셉의 판단과 결심은 훗날 세 가지 점에서 약간의 문제가 있음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의 운명이 요셉의 생각과는 상당히 다르게 전개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요셉은 ‘에브라임’을 얻음으로써 번성을 직감하고 있습니다(창41:52). 그런데 에브라임은 동생이 없습니다(창50:23). 요셉이 생각하고 있는 자손의 번성에 제동이 걸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 아들만으로 번성이 충분하다는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역설하고 있는 ‘지분사상’(知分思想, 창조주 앞에서 한갓 피조물에 불과한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것, 빌4:11-13) 또는 솔로몬 왕이 주장하고 있는 ‘분복사상’(分福思想, 가족과 함께 먹고 마시며 행복을 누리도록 창조주가 각자에게 나누어준 복, 전5:18-19, 9:9)과 그 맥이 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당대에 세상에 드러나는 번성보다는 먼 훗날에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나타날 번성에 더 집중을 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자면 그와 같은 영구적인 번성은 혈통이나 육정 또는 사람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실현이 되어나가는 번성이라고 하겠습니다(요1:12-13).
둘째로, 요셉은 차남 에브라임이 애굽에서 번성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내가 수고한 땅에서”(창41:52)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요셉의 예상은 빗나가고 있습니다. 훗날 야곱이 애굽에 이민을 와서 요셉의 두 아들을 이스라엘의 가문에 정식으로 입적을 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창48:5-6). 그리고 요셉의 두 아들이 장차 가나안 땅에서 번성하도록 축복의 기도를 해주고 있습니다(창48:13-16).
셋째로, 요셉은 차남 에브라임이 장남 므낫세보다 훨씬 번성하게 될 것임을 몰랐습니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호적에 편입시키면서 힘이 있는 자신의 오른 손을 요셉의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있습니다(창48:17). 요셉이 깜짝 놀라서 바로 잡으려고 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이 말하고 있습니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창48:19).
야곱의 예언은 정확합니다. 훗날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므낫세 지파에서 대사사 기드온이 나타납니다(삿6:15). 사사시대를 통틀어서 가장 공로가 많은 사사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그를 임금으로 삼고자 합니다(삿8:22). 기드온은 한사코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삿8:23). 만약 그가 왕의 자리에 올랐더라면 므낫세 지파는 가장 먼저 왕조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므낫세 지파에 비해서 에브라임 지파는 더 큰 번성을 누리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되는 여호수아(민13:8), 그리고 마지막 대사사인 사무엘(삼상1:1), 나아가서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초대 왕이 되는 여로보암(왕상11:26) 등이 모두 에브라임의 후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다윗 왕가를 배출하는 유다 지파를 제외하면 단연코 에브라임 지파가 그 뒤를 잇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요셉은 7년 연속으로 풍년이 들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 동안 노심초사했던 애굽 땅에서 안심하고 살면서 자손들의 번성을 바라보고 싶어합니다. 때를 맞추어서 두 번째 아들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소망을 아들의 이름에 싣고 있습니다. 그 이름이 애굽에서의 번성을 기원하고 있는 ‘에브라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전혀 다르게 나타나게 됩니다. 애굽이 아니라 요셉의 자손들이 번성하게 되는 약속의 땅은 가나안입니다. 그리고 애굽의 총리집안에 번성의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편입이 되고 있는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번성하고 복을 누리는 것이 상책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은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로운 예루살렘을 말하고 있습니다(히11:16, 계21:1-7). 그곳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번성을 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 안에서 올바른 번성의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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