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227강(창40:20-23)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3월 11일(화)
생일날 떡 굽는 관원장을 처형하고 있는 바로는 어떤 사람인가?(창40:20-22)
첫째로, 바로는 애굽 제국에서 절대권력을 쥐고 있는 황제입니다. 그는 사람이지만 애굽에서는 신의 아들로 불리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다민족국가인 애굽에서 제국의 통합을 위하여 황제인 바로를 신격화한 것입니다. 그는 신이기 때문에 보통의 인간과는 격이 다르고 행동양식이 다릅니다. 신으로 자처하고 있는 바로의 생각으로는 일반 백성이나 그의 신하는 그저 자신의 종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주인인 바로가 종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서 그들이 죽고 사는 문제를 손쉽게 결정을 하고 있습니다. 같은 날에 술 맡은 관원장은 살리고 떡 굽는 관원장은 처형을 하는 것이 바로에게 있어서는 그리 어려운 결정이 아닌 것입니다(창40:21-22).
둘째로, 바로는 죽을 때까지 평생 동안 제국을 통치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판단이 빠르고 경험이 많습니다. 신하들을 다스림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공포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감히 자신에게 대들 수 없도록 위엄을 갖추는 것입니다. 필요할 때에는 일벌백계(一罰百戒, 한 사람을 강하게 처벌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강력한 주의신호를 보내는 것)로 강력하게 중징계를 함으로써 신하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본보기 처형의 하나가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떡 굽는 관원장이 무슨 죄를 범했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큰 죄를 지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형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일벌백계식 처형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모두들 기뻐하면서 바로를 축하하는 생일 날입니다(창40:20a). 그 날에 바로가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서 큰 죄를 범한 자를 제외하고 모두들 석방을 하고 있습니다. 의금부 옥사에 갇혀 있던 두 관원장도 그 덕에 풀려난 것으로 보입니다(창40:20b). 그렇지만 바로는 성격이 제멋대로입니다. 생일날이라고 용서할 때는 언제고 같은 날에 또 처형을 명령하고 있습니다(창40:22). 피와 눈물도 없는 비정한 괴물입니다. 인간성을 상실한 자가 바로 애굽을 통치하고 있는 바로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이 사람이면서 스스로 신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자의 행태입니다. 그러한 바로 앞에 훗날 요셉이 총리로 부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창41:46). 그러므로 요셉은 겉으로 보기에는 무지막지하게 출세를 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자면, 바늘방석에 앉아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참고로, 바로와 같은 현인신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떠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우상에 대하여 신의 칭호를 붙이는 것을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극도로 싫어하십니다(출20:3-5, 32:6). 그 이유는 두 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첫째, 피조물이 만든 사상이나 우상을 가지고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에게 대항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데올르기를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신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왕하17:35). 둘째, 감히 창조함을 받은 피조물이 하나님에 대하여 반역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피조물의 형상을 모방하여 우상을 만들어 놓고서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출애굽 당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서 그것을 출애굽의 하나님이라고 지칭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출32:4). 나아가서 피조물인 인간이 스스로 창조주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 보다 더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만든 우상이 하나님이라면 그것을 만든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창조주보다 더 높이 칭송을 받고 싶어하는 그것은 인간들의 끝이 없는 탐욕이라고 하겠습니다. 흔히들 물질적으로 우주를 생성하게 하는 고밀도의 물체의 팽창을 ‘빅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끝없는 욕구는 그 이상으로 팽창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실로 대단한 과대망상증입니다. 그와 같은 욕구를 표출하고 있는 바로와 같은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훗날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계십니다;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내가 갈고리로 네 아가미를 꿰고 너의 강의 고기가 네 비늘에 붙게 하고 네 비늘에 붙은 강의 모든 고기와 함께 너를 너의 강들 가운데에서 끌어 내고 너와 너의 강의 모든 고기를 들에 던지리니 네가 지면에 떨어지고 다시는 거두거나 모으지 못할 것은 내가 너를 들짐승과 공중의 새의 먹이로 주었음이라”(겔29:3-5).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의 부탁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리고 있는 이유(창40:23)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의 부탁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리고 있는데(창40:23)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보입니다; 첫째, 사람의 심성이 본래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쉽게 잊어버리지만 원한은 오래 기억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둘째, 아직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도래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창40:23). 애굽의 황제인 바로가 특이한 꿈을 꾸고서 그 해몽자를 전국에서 찾을 때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그 때가 될 때까지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의 부탁뿐만 아니라 아예 요셉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잊어버리고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 점을 다음과 같이 모세가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창40:23).
참으로 독특한 문장입니다. 그 관원장이 요셉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관원장이 요셉의 부탁을 잊어버렸다”고 평이하게 기술만 하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구태여 은혜를 베푼 당사자에 대한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있는 것으로 강조하여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 관원장은 한번도 요셉을 만나지 못한 것으로 알고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머리 속에서 마치 치매환자처럼 요셉에 관한 모든 기억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그와 같은 일이 가능할까요? 인위적인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때가 될 때까지 철저하게 밀봉을 하고 있습니다(단12:9, 계10:4).
하나님은 사람의 머리 속에서 기억 자체를 지워버리고 있습니다. 반면에 그 때가 이르게 되면 다시 기억을 되살리고 있습니다. 마치 우연한 일처럼 자연스럽게 기억을 다시 삽입하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예가 에스더에 관한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날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령하여 역대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그 속에 기록하기를 문을 지키는 왕의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모르드개가 고발하였다 하였는지라. 왕이 이르되 이 일에 대하여 무슨 존귀와 관작을 모르드개에게 베풀었느냐? 하니 측근 신하들이 대답하되 아무 것도 베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에6:1-3).
나름대로 설명을 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다음 날 동이 트면, 아말렉 왕 아각의 후손으로 보이는 페르시아의 신임재상 하만이(에3:1, 삼상15:8) 아하수에로 황제를 예방할 것입니다. 페르시아 제국 내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토벌하고자 하는 그가 가장 먼저 베냐민 출신 사울 왕의 후손으로 보이는 모르드개를(에2:5, 삼상10:21) 장대에 매달고자 합니다(에5:14). 그 승낙을 얻기 위해서 첫 새벽에 황제를 알현하고자 입궐할 것입니다(에6:4). 바로 그날 밤에 대 반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모르드개가 황제에게 베푼 은혜는 물론이고 그의 존재까지 까맣게 잊어버리고서 잘 살고 있던 아하수에로 황제가 우연히 잠이 오지를 아니하여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궁중의 일기책을 읽게 하고 모르드개의 공로를 기억해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그 이름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아니했으면 기억하지도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섭리가 엿보이고 있는 문장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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