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창세기 강해 제225강(창40:14-1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1. 12. 07:40

창세기 강해 제225(40:14-15)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310()

 

술 맡은 관원장에게 자신의 신원회복을 위하여 요셉이 한 가지 부탁을 하다(40:14), 드디어 사람 앞에 털어놓는 요셉의 신상이야기(40:15). 여기서 그 동안 자신이 겪고 있는 억울한 일에 대하여 오직 하나님에게만 기도로써 호소를 하고 있던 요셉이 드디어 자신의 신원회복을 바로에게 직소해달라고 술 맡은 관원장에게 부탁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요셉은 지금 28세입니다(41:1, 46). 그는 11년 전에 17세의 나이로 억울하게 애굽에 노예로 팔려온 사람입니다(37:2, 28). 그 당시 가나안 중부지방 도단에서 양을 치고 있던 요셉의 이복 형들이 그를 상인들에게 20’을 받고서 노예로 팔아버린 것입니다. 처음에 애굽에서 바로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에게 종으로 팔려서 노예로서 일을 하게 되었을 때에 요셉은 기가 막혔습니다(39:1). 그러나 애굽인들의 언어를 모르고 있는 요셉은 자신의 처지를 주인에게 제대로 말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설혹 통역을 통하여 신상이야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가나안에서 발생한 히브리인들의 일을 애굽의 대신(大臣, higher ranking officer)인 보디발이 상관할 리가 없습니다.

만약 보디발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요셉이 주인에게 함부로 그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그와 형들 사이에 벌어진 일은 이스라엘의 수치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처신을 했기에 형들이 동생을 노예로 팔아버리기에 이른 것일까요? 얼마나 형들에게 못되게 행동을 했으면 그와 같은 보응을 받게 된 것일까요? 요컨대, 자업자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조상의 하나님께 하소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아버지 이스라엘의 집에서 철 없이 굴었던 자신의 잘못도 많이 반성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루 아침에 이스라엘 집안의 후계자 자리에서 애굽의 노예로 떨어져버린 자신의 인생의 굴곡에 대해서는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지를 아니했습니다.

그러다가 요셉은 문득 가나안에서 자신이 꾸었던 두 가지 꿈에 대하여 생각이 미쳤습니다(37:5-11). 자신은 그 예언적인 꿈에서 멀어진 것일까요? 아니면 더 가까워진 것일까요? 판단이 서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꿈을 실현한다는 것은 어차피 처음부터 자신의 처지와 능력으로써는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11년의 세월이 지나자 요셉과 함께 의금부 옥사에 수감 중인 두 관원장이 같은 날 비슷한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요셉은 먼저 술 맡은 관원장이었던 전직 고관의 꿈을 풀이해주었습니다(40:12-13). 참으로 길몽입니다. 3일 후에 복직이 될 꿈입니다.

요셉은 자신이 17세에 꾸었던 꿈도 엄청난 길몽이었음을 상기합니다. 그 꿈도 혹시 이곳 애굽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꿈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 틀림이 없다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관원장에게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40:14-15).

 

그 동안 흘러간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 요셉의 꿈이 실현될 수 있는 기반이 어떻게 은밀하게 구축이 되고 있는가?

 

요셉은 애굽에서의 종살이와 감옥살이가 무척 힘이 들었기 때문에 그 고통을 잊어버리기 위하여 자주 옛날의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했습니다. 그 옛날의 꿈은 참으로 신기한 것이었습니다(37:5-11). 지금 자신의 형편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고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지만 요셉 자신이 왕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 예언적인 꿈에서 멀어져 있지만 그래도 그 꿈은 요셉에게 소중한 추억입니다.

만약 요셉의 꿈이 실현이 된다고 한다면 그 무대는 가나안에 있는 아버지의 집과 이스라엘의 지배영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요셉이 그 꿈을 꾸었으며 당시에 그는 대 족장인 아버지 이스라엘의 집에서 후계자 감으로 행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셉은 가나안 땅에서라면 왕이 될 가능성도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요셉은 완전히 딴 세상인 애굽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것도 거대한 제국에 노예로 끌려와서 남의 집 종살이를 거쳐서 감옥살이까지 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신기한 그 꿈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저히 말도 되지 아니하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 절망과 같은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사람의 처지와 형편으로서는 전혀 불가능하며 한 없이 멀어진 그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역설적인 지혜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십자가의 지혜와 같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옛날 출애굽의 신화를 남긴 지도자 모세와 같고 강력한 이스라엘 제국을 건설했던 다윗과 같은 후계자가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로 기대를 모았던 나사렛 예수는 허무하게도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기력하게 십자가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모든 기대와 소망이 사라진 그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요컨대,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만민의 생명을 살리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경우에도 분명히 그러합니다; “바로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요셉이 바닥에서부터 배운 애굽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대신의 집안을 관리하는 그 실무적인 능력이 국가를 관리하는 총리로서의 실력을 갖추게 하는 밑받침이 되는 줄은 상상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감옥에서 만난 두 관원장이 자신을 애굽의 황제인 바로 앞으로 인도해주는 끈이 되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의금부 옥사의 전반적인 실무를 맡아서 관청 일을 처리해본 경험이 훗날 애굽의 전국을 시찰하면서 국사를 원만하게 처리하고 백성들을 구제하는 능력으로 전개될 줄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 과정은 지극히 고통스럽지만 가장 빠른 훈련의 코스이며 몸 속에 마치 유전인자처럼 각인시키는 가장 체험적인 교육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