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창세기 강해 제226강(창40:16-1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1. 14. 08:12

창세기 강해 제226(40:16-19)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310()

 

떡 굽는 관원장의 꿈 이야기와 그 해석(40:16-19)

 

술 맡은 관원장의 옆에는 떡 굽는 관원장이 있습니다(40:2-4). 그들은 같은 날 똑 같이 꿈을 꾸었습니다(40:5). 그리고 해석을 할 줄 몰라서 근심에 싸여 있습니다(40:6). 그 가운데 술 맡은 관원장이 아무래도 더 적극적인 사람 같습니다. 그가 요셉에게 먼저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해주고 그 해몽을 얻고 있기 때문입니다(40:9-13). 그것은 길몽(吉夢, 좋은 꿈)입니다. 요셉은 사흘 안에 신원의 회복이 있을 것이라고 확언하고 있습니다(40:13). 그와 같이 명쾌한 요셉의 해석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다른 관원장이 기대를 가지고 자신의 꿈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40:16).

그런데 떡 굽는 관원장의 꿈 이야기는 술 맡은 관원장의 것과 상당히 닮아 있지만 그 내용이 약간 다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은 첫째, 포도나무 가지가 세 개입니다. 둘째, 무사히 포도열매가 맺혔으므로 그 즙을 짜서 바로의 잔에 올려드렸다는 내용입니다. 반면에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은 첫째, 떡 광주리가 세 개라는 것은 비슷합니다. 둘째, 그러나 맨 위에 있는 광주리의 각종 구운 음식을 바로가 아니라 새들이 먹어 치웠다는 내용입니다”(40:9-11, 16-17). 그러므로 요셉이 첫 번째로, 포도나무의 가지가 세 개이거나 떡 광주리가 세 개이거나 모두 같은 의미라고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40:12, 18). 그러나 두 번째로, 포도열매에서 난 것을 바로가 무사히 맛을 보고 즐기는 것과 바로에게 바칠 음식을 새들이 먹어 치우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고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40:11, 19). 전자에게는 복직의 기쁨이, 후자에게는 비극적인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포도열매 그리고 포도즙이나 포도주에 관한 이야기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게 되면 그 의미가 정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그리스도이시고 가지는 성도들입니다. 열매는 성화된 삶과 전도 및 양육의 결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예물로 올려드릴 때 성도는 천국잔치에서 하나님과 함께 포도주를 마시며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15:1-2, 14:25). 한편 떡에 대해서 예수님은 두 가지로 분류를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목숨을 유지하는 만나와 같은 떡입니다. 그것들은 목숨과 육신의 삶만을 유지해줄 뿐입니다. 둘째는 생명의 떡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며 영적인 삶을 영위하게 해주는 양식입니다. 그 두 가지가 영육합일체인 사람에게 다 필요하지만 우선순위가 분명하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4), “먼저 그(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떡과 새의 상징성과 생명의 떡과의 관계(40:17, 19)

 

이 땅에서 생산이 되는 물질적인 양식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생명의 양식이 모두 고갈되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의 참혹한 현실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 가지를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새들이 사람 머리 위에 있는 맨 위의 광주리에서 구운 음식들을 먹어 치우고 있기 때문입니다(40:17). 둘째, 예수님이 씨 뿌리는 비유에서 그 이유를 좀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4:3-9, 15-20). 셋째, 생명의 떡인 자신과 만나와의 차이를 가지고 예수님이 설명을 하시고 있습니다(6:31-36, 54-59).

첫째로, ‘는 무엇이며 구운 음식들은 그 성격이 무엇일까요? ‘사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40:17, 4:15).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복음을 성도들이 올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없도록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복음의 빛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본뜻을 파악해야만 하는데 그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탄은 구약과 신약의 말씀 사이에 갈등을 조장하고 모순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말씀을 생활화하게 되면 세상살이에서 손해를 보게 된다는 생각을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말씀 따로 행동 따로, 나아가서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을 달리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성도의 삶이라고 하는 관념을 보편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생활화하는 기쁨을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넷째, 이 땅에서 생산이 되고 있는 양식도 올바르게 분배가 될 수 없도록 사람들의 탐욕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구운 음식이라고 하는 것은 땅의 소산을 가지고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음식으로 만든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소비를 할 수 있는 식량을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구운 음식을 바로가 먹어야 하듯이 식량은 사람들이 생존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입니다. 하늘의 만나처럼 그것은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정확한 양을 분배 받아야만 합니다(16:13-35). 그런데 그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난 세기에는 공산주의의 이론적 모순이 생산과 분배의 부조리를 조장했고 금세기에는 극도의 이기주의와 집단적인 탐욕이 자연재해와 더불어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을 계속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 가운데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말씀이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30배나 60배나 100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4:14-20). 사탄의 역사, 환난 및 박해,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 등이 모두 생명의 양식을 얻지 못하게 하고 영적인 삶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요인 들이라고 예수님이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더 쉽게 정리를 하자면, 사탄의 영적인 방해, 정치적 사회적인 박해, 경제적인 탐욕과 개인의 야심 등이 이 땅에서 생명의 양식을 갉아먹고 있는 요인들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이 갈릴리 호숫가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연출했을 때에 사람들은 당장 그를 임금으로 삼고자 했습니다(6:15). 하나님의 능력으로 백성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예수님이 해결해주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백성들의 요구를 외면했습니다. 얼른 그 자리를 피해서 산으로 갔으며 어두워지자 아예 갈릴리 호수를 걸어서 가버나움으로 가버리신 것입니다(6:15-21). 예수님이 왜 그들의 요구를 받아 들이지 아니했을까요? 그 이유는 다음의 말씀이 명쾌하게 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6:57-5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6:30-34).

요약을 해보자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와 오병이어의 기적은 모두 식량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목숨을 연장하고 육체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 땅에서 한번뿐인 일생을 사는 것은 그 정도의 의미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기회가 이 땅에서의 삶입니다. 남은 인생을 헛되이 살고 나면 다시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따라서 영생을 확보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론을 묵상하고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의 제자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생명의 떡을 먹고 소화하며 영생을 얻는 유일한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