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창세기 강해 제224강(창40:9-1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1. 12. 07:39

창세기 강해 제224(40:9-13)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38()

 

포도나무와 포도주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40:9-11)

 

창세기는 히브리 정경으로 편집이 되어 있는 39권 가운데 제일 첫 번째 책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모세오경의 다섯 권의 율법서 가운데 첫 번째의 것입니다. 그 창세기를 신 구약 66권을 편집하여 정경화하고 있는 기독교에 있어서도 첫 번째 책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뜻은 두 가지로 보입니다; 첫째, 성경전체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서론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와 개념들에 대하여 먼저 쉽게 정의를 규정하고 동시에 전체적인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 체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창세기는 성경전체에 대한 입문서이며 동시에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이야기 형식으로 기술이 되어 있는 책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내용과 관련하여 창세기에서의 개념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포도나무와 포도주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포도주에 관한 이야기는 홍수심판이 끝난 다음에 창세기 제9장에서 다음과 같이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을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이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9:18-23). 간략하게 세 가지 정도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노아는 왜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주를 만들어서 마셨을까요? 둘째, 그 결과 어떠한 현상이 발생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셋째, 현대인류에게 무엇을 시사해주고 있는 내용일까요?

첫째로, 현대인류의 조상이 되고 있는 노아는 당장 포도주가 필요했습니다. 도저히 제 정신을 가지고서는 남은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을 정도로 쓸쓸하고 외로웠기 때문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세상에서 노아의 집안만 살아남고 다른 족속들은 모두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노아는 홍수심판 후의 새로운 세상에서 그의 아내와 세 아들 그리고 세 며느리와 함께 살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은데 그 8명의 식구만이 살아남은 것입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보자면, 절망입니다. 다 죽고 자기들만 살아 남았으니 행운이며 좋지 않겠느냐고 말할지 몰라도 그것은 죽음보다도 못한 것입니다. 친구들과 친척들이 모두 죽고 없는데 자기 식구들만이 외로이 살아남아 있으니 적막강산입니다. 그것은 마치 북조 이스라엘 왕국에서 당대에 하나님 신앙을 가진 자가 자신 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절망에 빠져버린 선지자 엘리야의 경우와 같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남조 유다 왕국의 남부 브엘세바로 도망을 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탄원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혼자서 하나님 신앙을 지키고 있는 것은 너무 외로우니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소연을 하고 있습니다”(왕상19:3-4).

친구 한 사람 없는 노아는 먹고 살기 위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한쪽 밭에는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 즙을 짜서 발효를 시킨 다음에 술을 빚었습니다.  그리고 포도주를 매일 마신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취하지 아니하면 살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신앙인들이 잘난 체하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만 자신을 보호하고 인도하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으며 외롭지 아니하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온 세상에 온갖 피조물이 그득하고 수 많은 족속들이 살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친지들이 그 옆에 있으며 복음을 들을 자들이 즐비할 때에 사명감에 넘쳐서 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만일 이 세상에 자기 식구들 외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다고 가정해보십시오. 과연 하나님 만으로 만족하면서 행복하게 여생을 사실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하나님 만으로도 살 수가 없고 자신의 가족만으로도 살 수가 없습니다. 이웃과 함께 공생하고 있을 때에 비로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포도나무와 포도주는 노아에게 있어서 이웃을 대신해주고 있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둘째로, 포도주를 마시면 두 가지 현상이 발생을 합니다; 첫째, 시름을 잊어버리고 잠시 행복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둘째, 많이 마셔서 취하게 되면 추태를 부리게 됩니다. 노아는 전자에 이어서 후자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벌거벗은 추태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역시 두 가지로 창세기는 분류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 허물을 가려주지 아니하고 상대적으로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광고를 하는 경우입니다.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러했다고 모세는 기술하고 있습니다(9:22). 그냥 함이라고 말해도 충분한 표현인데 구태여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족속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는 우상숭배자들입니다. 그 의미를 부여하여 그 조상 함이 역시 아버지를 존경하지 아니하는 불효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허물을 가려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경우입니다. 장자인 셈과 막내인 야벳이 그러합니다(9:23). 훗날 그들은 노아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9:26-27). 셈 집안은 대대로 하나님 신앙을 파수하는 가문이 됩니다. 그 전통이 데라를 거쳐서 아브라함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11:31-12:5). 야벳 족속은 서세동점(西勢東占, 서양세력이 동양을 점령하는 것)이 이루어지면서 하나님 경외사상을 지니게 됩니다(1:8, 11:17-18).

셋째로,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사는 문제는 이방인이나 선민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포도농사를 지으며 포도주를 만들어서 마시게 되는 목적과 방법에 있어서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은 노아와 같이 외로워서 포도주를 친구 삼아 마십니다. 아니면 삶의 풍요를 포도주를 마시면서 만끽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주님께서는 포도주를 달리 사용하고자 하십니다. 천국잔치자리에 사용하십니다. 그것도 성도들로부터 예물로 받아서 함께 즐기고자 하십니다. 그와 같은 목적과 사용방법을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4:25).

참고로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포도주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시고 있습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15:1-2). 예수 그리스도가 참 포도나무가 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옛날 이스라엘이 포도나무이지만 참 포도나무가 되지 못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을 말하고 있는 구약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80:8),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주의 오른 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그것이 불타고 베임을 당하며 주의 면책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오니”(80:14-16).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포도원지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7:2-3).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참 포도나무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선민 이방인 구별하지 아니하시고 주님을 생명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자들을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게 접을 붙이고 있습니다. 깨끗한 성도의 삶으로 좋은 포도나무 열매를 맺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좋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포도나무와 포도주입니다. 그것을 바로에게 바치는 꿈을 술을 맡은 관원장이 꾸었다고 합니다. 이제 그 좋은 꿈을 요셉이 해석을 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요셉이 그 꿈을 해석하다(40:8, 12-13)

 

술 맡은 관원장의 꿈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40:9-11). 요셉이 하나님께 지혜를 얻어서 그 관원장의 꿈을 다음과 같이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는 사흘이라.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키리니 당신이 그 전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의 손에 드리게 되리이다”(40:12-13).

자신이 꾼 꿈을 자신이 잘못 해석을 하고 잘못 믿게 되었을 때에는 문제가 발생을 합니다. 엉뚱한 선택을 하고서 인생길을 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습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남의 꿈을 잘못 해석을 해주었을 때입니다. 그것이 예언의 꿈이면 더욱 그러합니다. 지금 요셉이 하나님의 지혜에 의지하여 술 맡은 관원장의 꿈 풀이를 자신 있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것도 삼일 후에 당장 일어날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3일 후에 그 일이 달리 발생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두 관원장과 친위대장 보디발과는 잘 통하고 있는 사이입니다. 그 관원장이 가만있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 부담을 요셉이 기꺼이 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요셉이 확신하고 있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응답을 분명히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간단하게 생각하고 해몽을 해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꿈을 주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그 꿈에 대한 해석까지 듣고 있는 요셉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옥중에서도 형통함을 누리고 있는 요셉의 신령함과 경건함 그리고 믿음의 성숙이 어느 정도에까지 이르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