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229강(창41:8-14)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3월 13일(목)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賢人, 지혜자)들이 모두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없는 이유(창41:8)
세상에는 두 가지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의식할 수 있는 세계가 있으며 의식을 할 수 없는 세계가 있습니다”. 사람이 의식을 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감각기관을 통하여 감지가 되어오는 정보를 두뇌가 식별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차적으로는 경험이나 자료를 통하여 얻은 지식을 체계화함으로써 감각기관이 미처 감지하지 못한 것을 다시 식별하여 보완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는 자율신경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는 기관에 대한 정보도 포함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완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전혀 의식을 할 수 없는 세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의식할 수 없는 무의식의 세계는 따로 시공간을 달리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시공간에서 항상 함께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감각기관이나 지성적인 인지의 기능으로 포착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차원에 속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한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감각과 이성의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하게 될 때 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비로서 열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감각은 굉장히 제한적인 것입니다. 오감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들이 감지할 수 있는 범위가 무척 좁습니다. 눈과 귀만 하더라도 너무 작은 것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동시에 너무 큰 것도 보거나 들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현미경이나 망원경 그리고 청진기와 초음파 등의 도구를 사용하여서 그 한계를 보완하고는 있지만 그것 역시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이성적인 판단능력을 사용하여 나타나는 현상을 보고서 그 존재성을 추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미 그 점을 갈파하고 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6-8).
그런데 어떤 능력을 사용하더라도 감지할 수 없는 그 세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도 두 가지로 분류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이미 발생했던 일이 다시 발생하는 경우입니다. 다른 하나는 전혀 색다른 일이 창조적인 방법으로 새로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전자에 대해서는 익숙합니다. 그 이유는 비록 영적인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성적인 정보로 받아들여서 상당히 체계적인 설명을 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영적인 사실을 인간의 지혜로 체계화하고 있습니다.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고대사회에도 있습니다. 본문에서 그들의 직업적인 이름이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이 바로 그들입니다”(창41:8).
그런데 바로의 꿈은 그들의 분석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전혀 새로운 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사건을 창조적으로 발생시키는 것은 누구의 소관일까요? 그 해답을 이사야 선지자가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네가 들었으니 이 모든 것을 보라, 너희가 선전하지 아니하겠느냐? 이제부터 내가 새 일 곧 네가 알지 못하던 은비(隱秘,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것)한 일을 네게 듣게 하노니, 이 일들은 지금 창조된 것이요, 옛 것이 아니라. 오늘 이전에는 네가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네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알았노라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사48:6-7). 바로가 꾼 꿈은 전혀 새로운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새로운 만민구원의 일을 행하시기 위하여 그에게 전주곡으로 예시해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꿈은 하나님의 지혜를 얻고 있는 사람만이 해석이 가능합니다. 여기서는 요셉이 그 역할을 맡고 있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 앞에서 자신의 죄를 토설하고 있는 이유(창41:9-14)
바로가 자신이 간밤에 꾼 꿈의 내용을 신하들에게 모두 설명했습니다. 측근신하들이 먼저 해몽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정확한 해석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왕궁에 있는 점술가와 지혜자들을 모두 불러 왔습니다(창41:8a). 그들도 마찬가지로 해석을 하지를 못합니다(창41:8b). 이제 어떡하면 좋습니까? 바로가 역정을 내는 날에는 누구의 목이 먼저 떨어질지 모를 형편입니다. 초긴장 상태입니다.
그와 같은 상황을 넉넉하게 짐작할 수 있는 비슷한 경우가 역시 구약에 실려있습니다. 다니엘서에 기록되어 있는 다음의 내용입니다; “너희가 만일 이 꿈을 내게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를 처치할 법이 오직 하나이니, 이는 너희가 거짓말과 망령된 말을 내 앞에서 꾸며 말하여 때가 변하기를 기다리려 함이라. 이제 그 꿈을 내게 알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 해석도 보일 줄을 내가 알리라 하더라”(단2:9), “왕께서 물으신 것은 어려운 일이라. 육체와 함께 살지 아니하는 신(神, god)들 외에는 왕 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나이다 한지라. 왕이 이로 말미암아 진노하고 통분하여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다 죽이라 명령하니라”(단2:11-12).
바로 그와 같은 긴박한 순간에 술 맡은 관원장의 머리에 2년 전의 사건이 마치 필름처럼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창41:9a). 드디어 요셉을 바로 앞에 세울 때가 되었기에 하나님께서 그 관원장에게 그 동안 2년 동안 닫아버렸던 기억의 문을 다시 여신 것으로 보입니다(창40:23, 20:17-18, 그것은 마치 태를 열고 닫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임). 술 맡은 관원장은 인간적으로 요셉의 부탁을 전혀 기억하지를 못하고 2년 동안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 자신의 불성실함 때문인 것으로 자책이 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황제인 바로가 보기에 자신이 은혜도 모르는 사람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신의 허물부터 고하고 있습니다;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창41:9b).
술 맡은 관원장은 처신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당장 바로에게는 기이한 꿈을 해석해줄 지혜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로가 관원장 자신의 작은 허물쯤은 문제로 삼지 아니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간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관원장은 자신 있게 자신의 경험과 요셉의 뛰어난 해몽의 실력을 바로에게 즉시 보고를 드리고 있습니다; “바로께서 종들에게 노하사 나와 떡 굽는 관원장을 친위대장의 집에 가두셨을 때에 나와 그가 하룻밤에 꿈을 꾼즉, 각기 뜻이 있는 꿈이라. 그곳에 친위대장의 종 된 히브리 청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말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 사람에게 해석하더니, 그 해석한 대로 되어 나는 복직되고 그는 매달렸나이다”(창41:9-13).
바로는 머뭇거릴 여유가 없습니다. 당장 그 히브리 청년으로부터 자신의 꿈의 해석을 들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즉시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놓은 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창41:14). 사람의 운명이 바뀌고 있는 순간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요셉이 끝까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의지한다면(창40:8) 그의 믿음대로 새로운 경지의 삶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지금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로(창20:7) 그리고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는데 사용이 되는 가장 의미가 있는 사람으로(창45:5, 50:20) 살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착각을 하게 된다면 그 때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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