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231강(창41:17-32)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3월 15일(토)
바로가 요셉에게 설명하고 있는 자신의 꿈 이야기의 특징(창41:17-24)
사람의 기억력은 어떻게 보전이 되고 있는 것일까요? 첫째, 딱딱한 법률이나 문법보다는 이야기 형식으로 기억을 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더 오래 기억이 보전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야기 가운데에서도 특징적이고 인상적인 것이 더 강하게 기억이 되고 있습니다. 사소한 것들은 오래 기억이 되지 못하거나 인상적인 것을 풀이하는데 동원이 될 따름입니다. 셋째, 평소 당사자의 관심이 많은 쪽으로 기억이 재구성이 되기 쉽습니다. 처음의 기억이 어느 순간에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관심이 많은 쪽이 우선이 되어서 편집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 기억은 변형과 왜곡이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두뇌 속으로 일단 들어가게 되면 그와 같은 보편적인 기억의 방법으로 일종의 변형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와 같은 실제의 사례를 바로의 꿈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이 엿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아름답고 살진 7암소’(창41:2)가 어느 틈에 ‘살지고 아름다운 7암소’(창41:18)로 형용사의 우선순위가 뒤바뀌어서 진술이 되고 있습니다. 바로의 관점이 아름답다는 미추(美醜, 아름다움과 추함)의식보다는 백성들이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가 더 우선이라는 사실을 여기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과연 큰 제국의 황제답습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이전에 백성들이 행복하게 먹고 사는 그것에 먼저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흉하고 파리한 다른 7암소’(창41:3)라는 표현은 ‘악하고 심히 흉하고 파리한 7암소’(창41:19a)로 각색이 되고 있습니다. 바로의 선악에 대한 가치관이 강하게 반영이 된 결과로 보입니다. 바로는 풍요로운 나일 강 유역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는 못 먹어서 창백하고 흉한 가축에 대해서는 질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제국 내에서는 풍요로움만이 구가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신들과 대신들도 제국의 풍성함을 유지하도록 기여를 해야만 합니다. 그러하지 못한 경우에는 가차없이 악인으로 낙인이 찍히고 제국 내에서 축출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바로는 “그같이 흉한 것들은 애굽 땅에서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진술을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창41:19b).
셋째로, “그 흉하고 파리한 소가 그 아름답고 살진 7소를 먹은지라”(창41:4)는 문장이 “그 파리하고 흉한 소가 처음의 7살진 소를 먹었으며 먹었으나 먹은 듯 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흉하더라”(창41:20-21)로 재구성이 되고 있습니다. 바로가 미추의식보다는 백성들의 생존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흉하고 파리한 소’가 ‘파리하고 흉한 소’로, ‘아름답고 살진 7소’가 ‘처음의 7살진 소’로 자연스럽게 그 표현이 바뀌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게다가 처음의 진술에 있어서는 전혀 없던 작위적인 해설까지 보태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은 첨삭(添削, 첨가와 삭제)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무성하고 충실한 7이삭을 삼킨지라”(창41:7)는 표현이 “좋은 7이삭을 삼킨지라”(창41:24)는 표현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변화는 ‘무성하고 충실한 것’은 ‘좋은 것’이라는 바로의 가치관이 작용한 결과입니다. 여기서 풍요로움을 추구하고 가난과 빈곤을 싫어하는 위정자의 마음을 넉넉하게 읽을 수가 있습니다. 통치자는 예나 지금이나 풍년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부국이 되어야만 합니다. 빈국으로 떨어지게 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통치자의 평판이 하락하고 가난한 유민의 발생으로 반란의 조짐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바로의 꿈 이야기에 대한 위와 같은 각색이 이루어지는데 얼마의 시간이 걸렸을까요? 바로는 두 가지 꿈을 하룻밤에 꾸게 됩니다(창41:1-7). 그리고 그것이 범상하지 아니한 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그 다음날부터 애굽에 있는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그 꿈에 대하여 정확한 해석을 하도록 요청했습니다(창41:8). 그러나 아무도 명확한 해석을 하지를 못했습니다. 애굽은 큰 제국입니다. 그 영토가 엄청나게 넓습니다. 천하의 지혜자와 점술가들을 모두 불러 들이는데 있어서 여러 날이 걸렸을 것입니다. 교통의 수단이라고 해보아야 당시에는 말이나 마차로 달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달 정도의 시간이 경과를 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애굽 제국에서 이름이 알려진 점술가와 현인들은 모두 황궁을 다녀갔습니다(창41:8). 그러나 그들은 모두 실패를 했습니다. 그러자 바로가 이민자나 신분이 천한 자에게까지 문호를 개방한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꿈에 대하여 빨리 정확한 해몽을 얻고 싶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황제의 꿈은 예사로운 것이 아닙니다. 고대사회에 있어서는 제국의 멸망이나 왕조의 흥망성쇠와 직결이 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평소 황궁에서는 점술가와 점성가 그리고 현인들을 기용하여 높은 관직에 두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들이 모두 실패를 하게 되자 마침내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천거한 것으로 보입니다(창41:9-13).
그러므로 바로의 꿈이 요셉에게 설명이 될 때까지는 한 달 이상이 걸렸으며 그 사이에 바로는 전국 각지의 점술가와 현인들에게 자신의 꿈을 수없이 설명을 해주었다고 하겠습니다. 그 결과 그와 같은 가치관의 삽입과 변형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수십 년 또는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다면 그 꿈의 내용은 어떻게 변형이 되는 것일까요? 글로 적어두지 아니하면 더 엄청난 왜곡과 변형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시대적인 가치관의 변화까지 그 변형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미리 인정을 하고서 고대의 문건을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습니다.
바로의 꿈에 대한 요셉의 명쾌한 해석(창41:25-32)
요셉의 해몽은 간단합니다; 첫째, 그 꿈은 개꿈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라는 것입니다(창41:28). 둘째, 그 내용은 7년 풍년에 이어서 7년 흉년이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창41:29). 셋째, 흉년이 너무나 심각하므로 옛날의 풍년을 기억하지도 못할 지경입니다. 나아가서 기근으로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창41:30). 넷째, 같은 내용의 꿈을 겹쳐서 꾸었기에 그 일은 이미 발생하기로 확정이 되어 있다는 풀이입니다(창41:32).
세상의 모든 문제가 그렇습니다. 해답을 알고 보면 참으로 쉽습니다. 그러나 그 해답을 얻을 때까지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창조의 이치와 운영의 이치를 사실 모르고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자신이 창조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피조 세계에 벌거벗은 채 던져진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부딪히는 모든 문제들이 해결하기에 하나같이 어렵습니다. 선조들의 지혜와 대대로 전해오는 지식의 성장에 도움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현실문제에 대한 진단이 어렵고 미래를 대비할 수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의 역사와 인생의 섭리에 대하여 완전한 이해를 한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무의식의 세계에서 의식의 세계로 메시지가 전달되어 올 때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 메시지가 현재화되었을 때에 비로서 깨달을 수 있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여기 바로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지혜자 요셉을 통하여 그 메시지를 사전에 해석한다는 것은 크나큰 행운이라고 하겠습니다.
언제나 알고 보면, 간단합니다. 그러나 모르고 있는 동안에는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따라서 전능하신 창조주를 인정하고 의지해야만 합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법도와 분수를 지키며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 있을 때에 불안을 평안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지혜로서 임하기 때문입니다. 성경말씀은 그 대목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수없이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바로가 불안해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요셉을 보내어주시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이 땅에 오는 선지자가 예나 지금이나 너무나 소중하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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