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218강(창39:5-9)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3월 3일(월)
보디발이 모든 소유를 요셉에게 맡기자 하나님이 요셉을 위하여 하신 일(창39:5)
흔히 서양에서 중세시대를 ‘봉건주의(封建主義) 시대’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봉건주의라고 하는 것은 은급(恩給, 은혜와 반대급부)의 관계가 중심사상을 이루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왕이 자신을 도와준 공신(功臣)들에게 그들의 공로의 크기에 따라서 상급을 나누어줍니다. 그 상급의 내용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 땅을 나누어 줍니다. 그것이 봉토(封土)입니다. 둘째, 그 땅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줍니다. 제후로 임명을 함으로써 명실상부하게 자신이 분배 받은 땅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봉작(封爵)입니다. 그렇게 왕으로부터 상급을 받게 되면 그 은혜를 갚아야만 하는 책무를 지게 됩니다. 그 의무를 올바르게 이행을 하는 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가장 큰 책무는 전쟁이 발생하면 왕을 도와서 전투에 나서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반대급부가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 중세 봉건주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토지의 배분과 권세의 부여에서부터 발생하고 있는 그와 같은 은급의 관계는 사실 훨씬 이전 시대 곧 고대사회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그 시원적(始原的)인 모습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장(章)을 보면, 하나님께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천하의 권세를 주고 있습니다(마28:18). 이 땅에서 영혼을 죽이고 살리는 권세가 주님에게 위임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권세를 가지시고 주님이 이 땅에서 악한 세력을 평정하시면서 사도와 성도들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있습니다(마28:18-20, 행1:8, 엡6:10-12). 종말이 되면 주님께서 그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승리의 예물로 올려드릴 것입니다(고전15:24). 그러한 설명이 정확하게 은급의 관계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있어서 대표적인 경우가 본문의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애굽의 황제인 바로의 친위대장 곧 애굽 사람 보디발이 노예로 팔려온 히브리인 요셉을 돈을 주고서 종으로 사게 됩니다. 요셉의 주인이 된 보디발은 그에게서 신기한 일을 발견합니다. 17세의 소년에 불과하며 애굽의 문물에 서툰 그 종이 작은 가사 일을 맡아서 처리를 하는데 그 일의 처리가 깔끔합니다. 조금 힘든 일을 맡겨보았습니다. 그 일도 잘 처리를 해내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요셉의 능력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을 맡겨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일도 만족스럽게 처리를 해내고 있습니다. 보디발은 이상한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어린 종의 능력이라고 도저히 생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사를 관찰했습니다. 그 결과 진실을 알게 됩니다. 그 종의 히브리 조상들의 신(神)이라고 하는 여호와가 도와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능력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래서 보디발은 큰 모험을 시작합니다. 어린 요셉이지만 그에게 보디발의 집의 대소사(大小事)를 모두 처리할 수 있는 권세를 부여한 것입니다. 요셉이 가정총무가 되어 주인의 집안일과 사업까지 경영을 하게 되자 그 집안에 하나님의 복이 흘러 넘치게 됩니다”(창39:1-5).
그런데 은급의 관계가 정확하게 형성이 되자면 하나의 철칙이 있습니다; “주인이 일단 종을 신임하게 되면 그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완전한 신임을 해야만 합니다. 그때부터 종은 모든 권한을 위임 받았기에 모든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 책임의 중심에는 정확한 분별력과 법도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첫째, 분별력은 주인이 맡긴 것과 맡기지 아니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구별하는 것입니다. 맡기지 아니한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손을 대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법도(法度)는 아무리 전권을 위임 받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신분이 여전히 종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처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인의 눈을 의식해야만 합니다. 주종관계의 선을 정확하게 마음 속에서부터 지키는 것이 법도의 기본입니다.
모세는 본문에서 보디발이 모든 권한을 요셉에게 위임한 그 때부터 하나님의 축복이 그 집에 넘쳐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보디발이)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창39:4-6). 세어보자면, “보디발이 모든 소유를 요셉에게 맡겼다”는 똑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그때부터 비로서 하나님의 복이 그 집에 넘치게 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완전한 신뢰가 없으면 하나님의 신령한 복이 땅의 기름진 복으로 흘러나올 수가 없다는 철칙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기본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창조주의 작품인 사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 신뢰의 관계가 자리를 잡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신령한 복이 이 세상에 올 수가 없습니다(막12:30-31).
그 다음에 한 가지 이야기를 더하고 있습니다. 요셉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디발의 집과 소유물에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즉, 보디발이 복의 통로가 아닙니다. 요셉이 복의 통로입니다(창12:2-3). 그 점을 분명하게 적시(摘示)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창세기의 기록에서 하나님의 사람인 의인은 참으로 이 세상에서 귀한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람이 선지자로서 기도를 하면 치유의 은혜가 임합니다(창20:7, 17). 둘째,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하늘의 복이 땅으로 흘러 들어 옵니다(창30:27, 39:5). 셋째, 하나님의 사람인 의인 열명만 있어도 그들이 살고 있는 도성이 심판을 면하게 됩니다(창18:32).
보디발 아내의 은밀한 유혹을 물리치고 있는 미(美)청년 요셉의 마음 중심(창39:6-9)
약관의 나이가 되자 요셉은 아름다운 청년이 됩니다(창39:6). 그 모습을 자주 대하게 되자 그만 보디발의 젊은 아내가 정욕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은밀한 유혹을 시작하고 있습니다(창39:7). 일반적으로 완력을 사용하는 무사들의 아내는 아름답습니다. “용감한 자가 미인을 얻는다”는 말과 같이 무사들이 용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보디발은 자신이 가진 대단한 무예로써 황제의 친위대장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니 그의 아내는 얼마나 젊고 아름답겠습니까? 그렇게 아름다운 부인이 아무도 보지 아니하는 공간에서 젊은 피가 끓고 있는 미청년 요셉을 매혹적으로 유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창39:7, 10-12).
그렇지만 젊은 요셉이 안방마님의 그 끈질기고도 은밀한 유혹에 결코 넘어가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창39:8, 12). 모세는 그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셉의 입을 빌려서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39:8-9). 요셉은 종으로서 지켜야만 하는 법도와 분별력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이 되고 있습니다. 주인 보디발에게 지켜야만 하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만 하는 것 등 두 가지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많이 의식하면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생활에 있어서도 남의 눈을 의식하고서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형통함의 은혜를 입고 있는 요셉의 경우에는 다릅니다. 그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보디발의 아내가 은밀하게 유혹을 하고 있지만 그 유혹을 물리치고 있습니다. 그가 만약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 유혹에 이끌려 들어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남의 눈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마음 속의 눈과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종으로서의 마음가짐을 바르게 지니고 있습니다. 주인 보디발이 맡긴 일과 맡기지 아니한 일에 대하여 정확하게 분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인의 식사와 부인의 문제는 자신에게 맡겨져 있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창39:6, 9). 그리고 주인의 것에 대하여 손을 대지 아니하는 것이 종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법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정도의 이야기 만을 하고 있다면 요셉은 그저 보디발의 충직한 종으로서 기록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가 보디발의 종으로서 올바른 처신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살고 있는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감시하지 아니하고 있으며 보디발의 아내가 남편에게 일체 발설을 하지 아니한다고 하더라도 요셉은 안방마님을 범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도 보지 아니하는 그 공간에서 아무리 은밀한 일이 당사자들 사이에 묵계로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결코 전능하신 하나님의 눈길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남의 것을 탐내는 것, 나아가서 남의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출20:17, 레20:10).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원하지 아니하는 일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신뢰를 잃고 싶지 아니한 것이 요셉의 솔직한 마음중심입니다(창39:9). 요컨대, 그것이 법도이며 율법의 준수이고 마음 속 할례입니다(신10:16, 30:6, 렘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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