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220강(창39:21-23)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3월 4일(화)
국면의 전환, 종살이에서 감옥살이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의도(창39:20-21)
사람들은 과연 최선의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최선의 선택을 하자면 먼저 자신의 인생의 목적과 과업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 다음에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길을 찾아서 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의외의 변수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설정하고 있는 인생의 목적이 과연 가장 행복한 것이며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있는 것인지 확신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개인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으로는 더욱 그러합니다. 다수결에 따른 투표에 의하여 집단의 의사결정을 해나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헬라 철학에서는 세상과 인생의 이치를 꿰뚫고 있는 소위 ‘철학 왕’이 다스리는 공동체가 가장 좋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근세에 들어와서는 철학자들이 개인보다 더 탁월한 안목을 지니고 있는 ‘일반의지’가 공공의 선을 위하여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와 같은 주장들은 결국 인간이란 자신의 삶을 모두 알 수도 없으며 무엇이 최선의 길인지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학문과 철학 그리고 과학의 한계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창조주의 말씀과 지혜 앞에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창세기의 기록을 살펴보면서, 특히 두 번의 큰 우여곡절을 겪고 있는 요셉의 일생을 관찰하면서 더욱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지혜에 대하여 탄성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가나안에서 대 족장 이스라엘의 후계자로 손꼽히고 있던 요셉이 갑자기 이복 형들의 배신으로 노예신세가 되고 맙니다(창37:2-4, 28, 36). 애굽에서는 보디발의 종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던 요셉이 안방마님의 무고로 급기야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창39:1-5, 17-20). 왜 그와 같은 두 번의 인생역정이 요셉에게 필요한 것일까요? 당장은 도저히 그 해답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서 요셉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
요셉이 대 족장 이스라엘의 후계자로 가나안 땅에서 군림을 한다고 하더라도 7년 흉년에서 만민의 생명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보디발의 종으로 출세를 한다고 하더라도 애굽의 국가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없습니다. 유일하게 애굽과 주변국 백성들의 목숨을 7년 흉년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로부터 전권을 위임 받는 수석총리가 되는 길뿐입니다(창41:30-45). 요셉이 17세가 되었을 때 벌써 20년 후에 발생할 흉년을 대비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창37:2, 7, 9, 36, 41:46). 22년 후가 되면 17세에 가나안에서 헤어진 부친과 형제들을 애굽에서 다시 만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창45:6, 28). 아버지 이스라엘의 가문도 구하고 애굽의 백성들도 구하고 주변의 모든 백성들도 7년 흉년으로부터 구해내어야만 하는 책무가 요셉에게 짐 지워지고 있습니다(창45:7-8, 50:20).
그렇지만 당사자인 요셉은 그 일이 발생할 때까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유익하고 의미가 있는 인생입니다(신30:20). 그 이유는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도구로 사용하기 위하여 알 수 없는 연단의 길, 성숙의 길로 인도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요21:18-19). 훗날 진실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정확한 인생살이의 모습이 역사 가운데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입니다(빌2:5-11). 그때부터 성도들은 자신들의 인생살이의 우여곡절에 관하여 더 쉽게 이해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제자가 스승의 뒤를 쫓아가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요13:13-17, 34-35, 마16:24).
관계와 인생과 환경의 변화 가운데 유일하게 변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의 은혜(창39:21-23)
요셉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시작하고 있습니다(창39:20-21). 그는 자신이 모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주인 보디발에게 발설을 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보디발이 집안의 치부를 드러내지 아니하기 위하여 요셉을 암살해버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변을 당하지 아니한다고 하더라도 그 동안 주인으로 섬겼던 보디발이 웃음거리가 되고 급기야는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하나님께만 자신의 무고함을 아뢰고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창39:19-20).
이미 똑 같은 경우를 한번 당한 바가 있습니다. 그는 17세에 가나안 아버지 집에서 형들의 배신으로 애굽에 팔려온 사람입니다. 처음 애굽에 도착을 했을 때에는 너무나 기가 막히고 분하여 잠을 제대로 이룰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애굽 사람들이 알아 듣지도 못하는 히브리 어로 자신의 신세한탄을 해보아도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하나님께만 기도로써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요셉으로서는 하루빨리 애굽의 말과 풍속을 익히는 것이 긴요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애굽에서 보디발의 종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 만에 의금부 옥에 갇혀버리는 더 기가 막힌 사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또 다시 앞이 캄캄합니다. 역시 하나님께 죽기살기로 매어 달리는 방법 외에는 아무런 대책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유일한 방법이 이번에도 통했습니다. 의금부 감옥의 간수장이 요셉의 재능과 사람 됨됨이를 보고서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마치 그 옛날의 주인 보디발처럼 간수장이 옥중의 제반 업무를 요셉에게 차츰 위임하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창39:21-23a). 한 마디로, 형통하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가 감옥에서도 발생한 것입니다(창39:23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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