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219강(창39:10-20)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3월 4일(화)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그가 거절을 하다(창39:10-12), 그 결과 자존심이 극도로 상하게 된 여자가 잔인하게 요셉에게 복수를 하다(창39:13-15).
사람의 정욕의 힘이 어느 정도일까요?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에 본능적인 세 가지의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생존의 욕구입니다. 가장 기초적으로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에 식욕(食慾)이 가장 앞서고 있습니다(창1:29). 둘째, 번식하고 땅을 정복하여야 하기 때문에 성욕(性慾)이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습니다(창1:27-28). 셋째,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으며 가까운 가족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창2:18-25). 위와 같은 본능적인 세 가지 욕구만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에 또 다른 사회적인 욕구가 분출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원초적인 욕구를 넘어서는 이차적인 욕구입니다. 이차적인 욕구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차원이 다른 그 욕구의 핵심에는 자신의 의사와 인격이 사회적으로 절대 무시를 당해서는 아니 된다고 하는 강력한 이기주의와 강박관념이 뿌리깊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둘째, 일종의 집념이며 집착이기 때문에 무지하게 끈질긴 것입니다. 셋째,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의 의견과 주장으로써 남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남을 자신의 의사로 더 많이 더 강하게 지배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얻고자 투쟁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보디발의 아내는 처음에 젊은 미남자 요셉을 단지 욕정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창39:7a). 그 다음에는 은밀하게 잠자리를 함께 하자고 유혹을 하고 있습니다(창39:7b).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그 뜻을 따르고 있는 요셉은 하나님 앞에 악을 범하고 싶어하지를 않습니다(창39:9). 더구나 모든 것을 맡기면서 자신을 신임하고 있는 주인 보디발의 은혜에도 보답을 하고자 하는 충직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의 처신은 안방마님의 진노를 불러오고 있습니다. 자신의 요구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아니하자 보디발의 아내는 분노하고 있습니다. 원초적인 욕구가 집착으로 그 다음에는 지배욕으로 단계적으로 발전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모세가 알기 쉽게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 본능적인 욕구의 끈질김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창39:10). 둘째, 마지막 유혹마저 통하게 되지를 아니하자 여인은 자존심에 극심한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러할 때에 요셉이 그의 일을 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사람들은 하나도 거기에 없었더라.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신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그 여인이 요셉이 그의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창39:11-13). 셋째, 분노에 치를 떨고 있는 보디발의 아내가 자신의 의사를 무시하고 자신의 뜻을 끝까지 반대하고 있는 요셉을 해치우려고 합니다. 그 방법이 실로 잔인합니다; “그 여인의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 도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그가 나의 소리 질러 부름을 듣고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그의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이 말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 왔으므로 내가 소리 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하여 나갔나이다”(창39:14-18).
질투와 모함이라는 환난 속의 요셉, 그가 잠잠한 이유(창39:16-20)
바로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이 애처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 있습니다. 그는 무관이지만 동시에 글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무예만 뛰어난 자를 친위대장으로 옆에 둘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위에 친위대장 밖에 없을 때에는 황제인 바로가 정책에 관하여 그의 의견을 물어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친위대장의 자리는 일반 무인이 맡고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자질이 반드시 요청되고 있는 중책입니다; 첫째, 당연히 무예에 뛰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첫 번째의 가장 기본적인 자격요건입니다. 둘째, 무예뿐만 아니라 문에도 밝아야 합니다. 나름대로 국가정책에 대한 식견과 정치의 흐름도 읽을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친위대장은 정치적인 풍향과 무관한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셋째, 황제의 신임이 돈독해야만 합니다. 신하 가운데 황제 앞에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친위대장입니다. 가장 확실하게 황제를 암살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친위대장입니다. 황제는 그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겨놓아야만 합니다. 그 만큼의 절대적인 충성심이 필요한 자리입니다. 한 마디로, 측근 중의 측근이 바로 친위대장입니다.
그 자리를 꿰차고 있는 자가 바로 보디발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아내가 고발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금방 파악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아내는 당일 일어난 일을 매끄럽게 진술하고 있습니다(창39:17). 물증으로 요셉의 윗도리 겉옷까지 대령을 하고 있습니다(창39:18). 그러나 그 정도의 진술과 물증을 준비하자면 좀더 신중했어야만 합니다. 당일 일어난 일을 설득력 있게 체계적으로 진술하자면 가장 빠른 방법이 주체와 객체를 뒤바꾸어버리는 것입니다. 안방마님이 한 일을 요셉이 한 것으로 바꾸어 진술하게 되면 간단하게 완벽한 허위진술이 마련되는 법입니다. 그것은 마치 한반도에서 AD 660년에 백제가 망하고 나자 왜국이 독자적인 일본화 노선을 추구하면서 역사책을 허위로 마련한 것과 동일합니다. 그들은 주체와 객체를 바꾸어서 단숨에 ‘일본서기’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단시간에 새로운 역사책을 쓸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한반도 남쪽 바닷가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가서 작은 나라들을 세우고 식민지를 경영한 역사가 있습니다. 그것을 간단하게 뒤집어서 기술하면 됩니다. 마치 일본의 토착세력이 한반도의 남해안을 식민지로 만들어서 지배했다고 역사책을 쓰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위 ‘임나식민지 경영설’입니다.
또 하나 보디발이 진상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두 사람을 구태여 대질심문할 필요가 없습니다(창39:19-20). 그 이유는 보디발이 지난 5년 이상의 세월을 요셉과 함께 지내왔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조상의 신인 여호와를 철저하게 경배하고 있는 신실한 사람입니다. 성품이 곧고 반듯한 청년입니다. 특히 주인 보디발에 대하여 종으로서의 법도를 정확하게 지키고 있는 자입니다. 그와 같은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에 대하여 범접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이제 20대 초반인 요셉에 비하면 보디발 자신의 아내는 나이가 많은 편입니다. 출중한 용모를 자랑하고 있는 아름다운 청년 요셉이 무엇이 부족하여 나이 든 여인 그것도 주인의 아내를 탐하겠습니까? 자신의 발목을 찍을 정도로 요셉은 절대로 우둔한 인물이 아닙니다. 반면에 보디발 자신의 아내는 탐욕스러운 귀족 가문의 딸입니다. 그 정도의 판단을 할 수 있는 영리한 보디발입니다.
그렇지만 당장의 위기를 벗어나자면, 그것도 잡음을 최소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요셉을 전격적으로 옥에 가두어버리는 것입니다. 마침 친위대장의 집에는 의금부 옥사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보디발은 가정총무인 요셉에 대하여 심히 노한 것으로 보입니다(창39:19). 그 의미는 꾸며서라기 보다는 진정한 실망과 분노도 그 속에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평소 보디발 자신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요셉입니다. 그는 현명하고도 일 처리가 깔끔합니다. 그런데 오늘 요셉의 처신은 한 마디로 실망스럽습니다. 요셉은 안방마님의 성격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귀족의 딸인 그녀가 얼마나 제멋대로이며 자존심이 강한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요구가 무엇이었는지는 몰라도 요셉이 제대로 처신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결과 온 집안이 시끄럽고 망신스러운 일이 초래되고 있습니다. 소문과 소동을 단숨에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요셉을 바로 감옥에 집어넣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도 분위기를 안다면 입을 다물 것입니다”(창39:19-20).
요셉도 주인 보디발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불가피하게 자신으로 말미암아 주인집의 체면이 손상이 되고 있습니다. 주인 보디발의 명예에 누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진상을 밝힌다고 입을 열므로 말미암아 주인이 더 난처한 국면에 처하게 되는 것을 요셉은 결코 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만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보디발을 보호하고자 눈을 질끈 감고 있습니다. 그저 묵묵히 도살장에 끌려가고 있는 소처럼 의금부 옥사로 들어가고 있을 뿐입니다(사53:7). 그러나 그것은 장기적으로 보면, 불이익이 아니라 큰 이익이 기다리고 있는 길입니다. 그곳 의금부 옥사에서 요셉이 바로에게 나아가는 길이 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옥문이 바로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문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남아공의 만델라와 한국의 김대중 씨가 그 문을 통과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장은 분통이 터지고 참기 어려운 수모이며 억울함입니다. 남의 허물과 죄를 뒤집어 쓰고서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주인 보디발을 살리고 탐욕스러운 그의 아내까지 살리는 방법, 곧 당사자 모두를 살리고자 하는 대속의 길은 십자가의 길만큼이나 힘들고 외로운 길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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