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217강(창39:1-4)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3월 3일(월)
요셉의 형통의 비밀(창39:1-2)
믿음의 열조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삼대(三代, three generations)의 인생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스라엘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세 사람 가운데 야곱이 가장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매어 달렸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자식이 없었습니다(창11:30). 그렇지만 부자인 아버지가 있었습니다(창11:26, 31). 비록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지 아니하셨지만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의 집에서 그저 장남의 도리만 잘 하고 지내면 그 엄청난 재산을 상속할 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손의 번성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가나안 행을 결정한 인물입니다(창12:1-4). 그때부터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축복과 강력한 보호하심이 함께 했습니다(창12:17, 14:20, 20:3, 18). 그가 절실하게 부르짖지 아니하여도 그의 선택의 공로로 하나님께서 늘 동행해주셨습니다.
둘째로, 이삭의 경우에는 모리아 산에서 자신을 결박해놓고 번제로 바치려고 하는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대해서 살려달라고 적극적으로 매달린 흔적이 없는 사람입니다(창22:9-10). 그리고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의 이름도 엄청난 후계자의 자리도 모두가 예약이 되어 있었던 인물입니다(창17:19). 가나안의 가뭄을 피하여 이주를 할 때에도 먼 곳 애굽이 아니라 가까운 그랄 땅으로 피신을 하기만 하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다 처리해주시겠다고 약속까지 하고 있습니다(창26:2-5).
그렇지만 그의 아들인 야곱의 경우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둘째가 아니라 첫째로 바꾸기 위해서 한없이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매어 달린 사람입니다(창25:27). 오죽이나 그 모습이 보기에 딱하고 처절했으면 하나님께서 사자를 통하여 ‘하나님 및 사람과 겨루어서 승리를 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칭호까지 선사를 했겠습니까?(창32:28)
야곱은 77세가 될 때까지 장가도 아니 가고 자식도 생산하지 아니했던 사람입니다. 아들을 낳아도 에서의 종이 될 운명인데 어찌 그 운명에 굴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로지 이 세상에서 믿을 구석은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를 통해서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 한 조각밖에는 없었던 사람이 바로 야곱입니다(창25:23). 특히 얍복 시냇가에서는 그의 매어 달림이 절정에 달하고 있습니다(창32:24-30).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모든 식구들의 목숨이 에서에게 달려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 순간에 밤새도록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창32:11). 그것은 그냥 간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씨름선수가 밤새도록 하나님의 샅바를 쥐고서 결코 놓아주지 아니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창32:24). 그 결과 그는 어릴 때의 예언을 성취해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최종적으로 얻게 됩니다(창35:9-14). 물론 그의 이름 야곱도 대 족장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바뀌게 됩니다(창35:10). 그렇게 하나님의 샅바를 잡고서 이 세상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백성은 야곱이 그 시조가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위와 같은 분석에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첫째, 하나님의 예언을 가지고 자신의 앞길을 개척하기 위하여 몸부림을 치고 있는 자가 바로 이스라엘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는 아무 것도 맞아 들어가는 것이 없지마는 그것을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며 성도입니다. 둘째,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달라고 전심전력으로 하나님께 매어 달리고 있는 자가 이스라엘입니다. 죽음이냐 생명이냐의 갈림길에서 오로지 자신을 살려줄 수 있는 분이 창조주 하나님 한 분뿐이심을 알고서 그 분에게 죽을 힘을 다하여 매어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두 가지 사실이 야곱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에는 미흡합니다. 그렇지만 야곱의 경우에는 매우 풍성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스라엘의 뒤를 열두 아들 가운데 누가 잇게 되는 것일까요? 놀랍게도 요셉입니다. 그것도 아버지 이스라엘의 비호 하에서 자라나던 요셉이 아닙니다(창37:1-11).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던 요셉에게서 그 가능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창37:28, 36, 39:1-9). 구체적으로 ‘형통’이라는 이름으로 가시화되고 있습니다(창39:2). 그와 같은 측면에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서 황제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시작하고 있던 17세의 히브리 소년 요셉이 어떻게 형통한 자가 갑자기 될 수가 있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요셉은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또한 다른 신분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애굽 제국은 가나안과 다릅니다. 가나안 지역에는 여러 원주민들이 제각각 작은 부족국가를 이루어서 살고 있는 모자이크 식의 지역입니다. 반면에 애굽 제국은 강력한 황제가 나일 강 유역을 전부 통치하고 있는 곳입니다. 다민족국가이지만 하나의 제도로 움직이고 있는 중앙집권적인 제국인 것입니다. 가나안에서는 남부와 중부를 지배하고 있는 대 족장 이스라엘의 어엿한 후계자 감으로 요셉이 집안에서 뻐기면서 살 수가 있었습니다(창37:2-3). 그러나 이곳 애굽에서는 비천한 노예의 신분입니다(창39:1). 어떻게 그 종살이를 견디어 낼 수가 있을까요? 한 마디로, 앞이 캄캄합니다.
둘째로, 요셉은 완전히 다른 문화권에 던져진 것입니다. 그의 조상들은 본래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나안으로 이주를 해왔습니다(창11:31-12:5). 그리고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셈족입니다. 그런데 애굽 제국은 족속이 다르고 문화와 언어가 다릅니다. 우선 셈족이 아니라 완벽한 함족의 나라입니다. 물론 언어도 히브리어가 아니라 애굽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황제숭배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범신론적인 나라입니다. 그렇게 백팔십 도로 달라진 환경 속에서 그것도 종의 신분으로 어떻게 모든 것을 새로 배우고 적응해나갈 수가 있을까요? 요셉은 앞 길을 헤쳐나가기에 자신이 없고 그저 아득할 따름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때에 요셉이 하나의 동아줄을 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매어 달리는 것입니다. 그 옛날 아버지 야곱이 그러했던 것과 똑 같은 일이 요셉에게서 발견이 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시면 그 누구도 자신의 운명을 다시 바꾸어줄 수가 없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인식하고서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그 옛날의 꿈을 의지하여 구체적으로 기도한 것으로 보입니다(창37:6-11).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꿈으로 믿고 있으니 이곳 애굽에서도 그 꿈이 실현이 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보이는 주위의 환경은 정반대입니다. 왕이 아니라 노예입니다(창37:8, 28, 39:1). 그리고 문화와 언어가 모두 생소합니다. 우선 생존문제부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자신의 미래가 그 꿈의 내용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반드시 실현이 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요셉이기에 그와 같은 놀라운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고 추정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그의 아버지 야곱이 그 옛날 자신에게 주셨던 예언을 붙들고서 그것을 실현시켜달라고 매어 달렸던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왜 모세는 그렇게 중요한 사항을 전혀 본문에서 기록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한 마디로, 귀 있는 자는 알아서 들으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마11:15, 계3:22). 밭을 사서 그곳에 묻힌 보화를 캐내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마13:44). 이미 믿음의 열조들을 통하여 충분히 설명해주었으니 그것을 참조하여 스스로 파악을 하고 그 보화를 캐내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라는 음성이 그 속에 숨어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 보화는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실천하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동행을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형통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창39:2).
애굽 황제 바로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이 요셉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눈치채다(창39:3-4)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공생애를 막 시작하셨을 때에 바리새인이며 공회원인 니고데모가 밤중에 은밀하게 방문을 했습니다(요3:1-2). 그리고 천국을 볼 수 있는 방법과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답변하셨습니다(요3:5). 니고데모는 육체적으로 그 말씀을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어른이 다시 모태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의문을 표시했습니다(요3:4).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바람을 볼 수는 없지만 바람이 물체를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성령으로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지를 볼 수는 없지만 그 변화를 실감할 수는 있다고 설명을 하시고 있습니다(요3:6-8). 그 대목이 지금 본문에서 원용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창1:2, 요4:24) 마치 바람과 같아서 사람이 그 실체를 볼 수가 없습니다(요3:8).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인 요셉으로 말미암아 보디발은 자신의 재산이 엄청나게 불어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창39:3, 5). 보디발은 자신과 요셉과의 차이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17살짜리 히브리 종입니다(창39:1). 아직 애굽의 언어에도 서툽니다. 그리고 철부지이며 응석받이 소년입니다(창37:2-4). 하지만 굉장히 빠른 속도로 애곱의 문화와 언어를 익히며 터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맡아서 처리를 하고 있는 일은 마치 신이 그 일을 대신해주고 있는 것처럼 광채가 나고 있습니다(창39:3, 5).
범신론 국가인 애굽인지라 보디발은 요셉의 조상의 신인 여호와가 아무래도 그 소년을 보호해주고 있다고 판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표현이 다음과 같습니다; “그의 주인이(보디발이) 여호와께서 그와(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39:3). 그래서 보디발은 요셉의 신의 힘을 더 빌려보기로 했습니다. 요셉을 일종의 무당으로 생각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의 모든 재산을 요셉에게 맡겨서 엄청난 증식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창39:4b). 그래서 요셉이 그 집의 총무가 되고 있습니다(창39:4a).
보디발과 비슷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랄 땅의 왕이며 전체 블레셋의 ‘아비 왕’에 해당이 되고 있는 ‘아비멜렉’입니다(창20:2, 26:1). 아브라함 때나 그의 아들인 이삭의 때에 아비멜렉의 자리에 올라 있었던 왕들은 모두 지혜가 있어서 히브리인인 상대방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눈치를 채고 있습니다(창21:22, 26:28). 그러므로 상대방에게 혜택을 주면 그 복을 자신들도 받아서 누릴 수가 있으나 반대의 경우에는 진노와 재앙이 임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창12:3, 26:20). 그 결과 아비멜렉은 아브라함 때에도 그리고 이삭 때에도 동일하게 상호불가침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있습니다(창21:31-32, 26:28-31).
한 마디로, 축복의 내용을 보고서 그 축복을 주고 계시는 신의 존재를 인지한다는 것도 엄청난 지혜입니다(창21:22, 26:28, 39:3). 그와 같은 지혜를 아비멜렉과 보디발에게 하나님께서 주시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은혜를 얻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창39:4, ‘은혜를 입어’).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눈치를 챘다고 하여 모두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선지자를 무당쯤으로 생각하고서 그를 통하여 이익만 얻으면 된다고 사고하는 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아비멜렉처럼 보디발도 그러한 유형의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창21:32, 26:31, 39: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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