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창세기 강해 제215강(창38:24-2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1. 7. 09:30

창세기 강해 제215(38:24-26)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31()

 

유다의 말, “그가 나보다 옳도다!는 말은 얼마나 귀한 말인가?(38:26a)

 

레아는 아들이 6명이나 됩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그리고 스불론 등입니다(35:23). 그 가운데 가장 좋은 뜻의 이름자를 가지고 태어난 아들이 유다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의미가 바로 유다라는 이름의 뜻이기 때문입니다(29:35).

레아는 남편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한 여인입니다. 동생 라헬은 아름답지만 언니 레아는 못생겼기 때문입니다(29:17-18). 그렇지만 공의의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태를 활짝 열어주셨습니다(29:31). 레아는 아들을 연년생으로 연거푸 생산하면서 일말의 기대를 가졌습니다. 남편이 아들을 보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처소를 자주 방문하고 사랑을 공평하게 나누어줄 줄 알았던 것입니다(29:32-34). 그러나 사람에게 거는 기대는 전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로지 믿을 만한 것은 공평하신 하나님뿐이십니다. 남편 야곱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라헬에게는 불임으로, 사랑을 못 받고 있는 자신에게는 다산(多産)의 복을 주시는 공평하신 하나님입니다(29:31). 그 하나님을 믿고서 남은 생애를 살고자 결심한 여인이 바로 유다의 어머니입니다.

유다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그 마음을 이해하고 그 처지를 동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이름값을 하고 있는 아들이 유다입니다. 그는 일찍이 도단에서 이복동생 요셉의 목숨도 살려주고 다른 형제들의 목숨도 모두 살려줄 수 있는 묘안을 찾고자 했던 인물입니다(37:25-27).

그러했던 유다가 이방인인 가나안 원주민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그녀에게서 세 아들을 낳으면서 신앙적인 위기를 맞이한 것입니다(38:2-10). 하나님 보시기에 악행을 했던 두 아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셋째 아들인 셀라도 어리지만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유일한 아들이 되어버렸기에 그 목숨을 살리겠다고 다말과의 합방을 허용하지 아니했습니다(38:11, 14).

그 때문에 달리 살길을 모색하고 있던 청상과부인 며느리 다말의 계획에 말려든 것입니다(38:13-18). 친정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던 며느리 다말이 수절하지 아니하고 행음을 하여 임신을 한 것입니다(38:24a). 율법에 따라 당연히 죽여버리는 것으로 유다는 명령을 내렸습니다(38:24b). 다말을 임신시킨 사내가 누구인지 궁금은 했지만 그것까지 밝혀서 처벌하고 싶은 마음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가문에 누가 되는 일을 더 까발려서 좋을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다말이 인편으로 사내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증거품을 보내왔습니다(38:25a). 그 물건을 보는 순간 유다는 아차했습니다. 사돈이 살고 있는 산골마을 딤나에 소작인들의 양털 깎는 일을 감독하기 위하여 방문을 하였을 때의 일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38:12).

수아의 딸이었던 아내가 죽고 나서 여러 달이 흘러서 홀아비가 된 자신이 객지 소작인 마을을 방문한 것입니다. 마침 동네 입구에 젊은 창녀가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38:14-15). 객지에서 객고를 풀려고 그녀와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화대를 다음 날 받을 때까지 담보물을 요구했습니다(38:17). 유다는 귀여운 생각이 들어서 순순히 그녀의 요구대로 자신의 족장의 신분과 권위를 상징하고 있는 소장품 세 가지를 전부 맡긴 것입니다(38:18). 도장과 끈과 지팡이입니다. 그 다음날 청지기 히라를 시켜서 화대에 해당하는 염소새끼를 주고 그 물품을 찾아오고자 노력했으나 허사였습니다(38:20). 한 마디로, 유다는 엄청나게 비싼 화대를 치른 셈입니다. 그 이상한 일을 경험하고 나서 세 달이 흐른 지금 그 물건이 뜻밖의 목적으로 등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유다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냥 모르는 물건이라고 시치미를 뗀다면 자신이 족장이며 시아버지이니까 그 억지가 통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말이 죽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그 뱃속에 들어있는 자신의 씨앗도 죽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여 시인을 하자니 보통 창피한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며느리인 줄 모르고 하룻밤을 지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대 지주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집안의 출신인 유다가 할 일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온 동네가 떠들썩할 것이고 자신의 위신은 엄청나게 추락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의 선택은 확실했습니다. 자신의 위신과 체면의 손상을 고스란히 감수하고자 합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38:26a). 재판관인 유다의 그 한 마디로 말미암아 죽어야만 하는 생명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 뱃속의 아기들의 생명도 살아나고 있습니다(38:27-30). 그 한마디의 은혜로 다윗의 가문이 열리고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게 되는 집안이 성립이 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자신의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면서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 생명을 살리는 행위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나게 되는 창조주의 뜻입니다. 그 뜻을 자신도 모르게 받들고 있는 자가 바로 유다입니다. 이미 도단에서 일차 시험을 통과했던 유다가(37:25-27) 이제 거십에서 이차 시험까지 통과하고 있습니다(38:26). 앞으로 3차 시험까지 통과를 하게 된다면 장차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리더로 자리를 잡아가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다말은 왜 죽기살기로 유다 집안의 혈통을 얻으려고 하고 있는가?(38:24-26)

 

언뜻 보면, 청상과부로 아들 하나가 없는 다말이 유일하게 경제적으로 자신의 살 길만을 모색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자도 먹고 살자면 재산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고대사회에서 여자가 재산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자가 먹고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재산을 소유할 수 있고 또한 상속을 할 수 있는 남편이나 아들이 있어야만 합니다. 남편이 이미 죽었으므로 다말은 시집의 재산을 상속하기 위해서 비상수단이 필요합니다; “시동생과 합방을 하여 아들을 낳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수혼제입니다”(38:8). 그런데 시아버지 유다가 마지막 남은 시동생 셀라와의 합방을 전혀 허용하고 있지를 않습니다(38:11). 따라서 다말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시아버지나 시동생을 유혹하여서 아들을 낳는 방법뿐입니다. 그런데 천우신조로 시아버지에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긴 것입니다(38:13-18).

그러나 더 깊이 들여다 보자면,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이방인 가나안 족속들이 살고 있는 산골마을 딤나 출신이 다말입니다(38:13). 그녀는 부잣집의 맏며느리가 되어서 유다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38:6). 그곳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시아버지 유다를 만난 것입니다”. 시어머니는 역시 가나안 족속인지라 하나님 신앙이 없습니다(38:2). 남편 엘이나 시동생들도 신앙심이 없어 보였습니다(38:7-11). 유독 시아버지 유다만이 특이합니다. 그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할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말씀하시고 동행하시며 살길을 열어주신 기적 같은 일들에 관하여 이야기를 해주신 것입니다. 시아버지 유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말은 마치 훗날의 룻처럼 자신도 하나님을 섬기고 언제까지나 시댁에서 살고 싶다고 결심을 했습니다(1:16-17). 그 결심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시아버지 유다의 씨를 받는 방법밖에 없어서 그 길을 선택한 여인이 바로 다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하지 아니하다면 그녀의 후손 가운데서 다윗과 그리스도가 탄생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1:3).

 

유다가 다말을 다시는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다는 증거(38:26b, 대상2:3-4)

 

모세는 유다의 결백함을 두 차례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 창녀로 변장하고 있는 여자가 자신의 며느리 다말인 줄을 정말 유다는 몰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38:16). 둘째, 다말의 호소가 옳다고 판정한 다음에 유다는 다시는 다말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다고 모세가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38:26b).

첫 번째의 증언에 대해서는 확인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두 번째의 언급에 대해서는 그 신빙성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곧 유다의 족보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만약 유다의 아들 가운데 죽은 엘과 오난 그리고 살아 남은 셋째 아들 셀라 나아가서 다말이 낳은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 이외에 다른 아들이 더 있다고 한다면 모세의 증언은 거짓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는 역대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유다의 아들은 에르와 오난과 셀라니 이 세 사람은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이 유다에게 낳아준 자요, 유다의 맏아들 에르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죽이셨고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유다에게 베레스와 세라를 낳아 주었으니 유다의 아들이 모두 다섯이더라”(대상2:3-4). 명백하게 유다는 똑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동네에 살면서도 자신의 하나님 신앙을 지키고 있는 유다입니다. 요컨대, 유다야 말로 칭찬 받아 마땅한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