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바람소리45(손진길 소설)
압량주의 군주인 재사 윤책은 진덕여왕 5년인 서기 651년 12월초에 집안의 혼사가 있어 서라벌을 다녀왔다. 이제 며칠이 지나면 차남 윤하신이 김흠순 고허성주의 막내딸인 신부 김미선을 데리고 압량주로 와서 살게 될 것이다.
아들 부부가 윤책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압량주에 와서 군관생활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윤책은 아버지로서 마음이 든든하다. 기분이 좋아진 윤책은 자신이 서라벌을 떠나 오기 전에 진덕여왕과 상대등 알천이 은밀하게 자신을 불러서 부탁한 내용을 재삼 반추해본다.
궁궐에 들어가서 그들을 만났을 때에 진덕여왕이 윤책에게 다음과 같이 말문을 연 것이다; “윤책 군주, 그대는 선덕여왕에게 나를 후계자로 삼으라는 계책을 김춘추를 통하여 말해준 인물이라고 나는 알고 있어요… “;
세상에 비밀은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윤책이 여왕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긴장한다. 그 모습을 보고서 여왕이 생긋 웃으면서 말을 계속한다; “따지고 보면, 덕만언니의 사촌동생에 불과한 나를 신라의 새로운 국왕으로 세워준 인물은 윤책 그대이요. 나는 그 점을 개인적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더구나… “;
윤책의 긴장이 풀리는 것을 보고서 진덕여왕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한다; “나는 즉위 초부터 상대등 알천을 나의 배우자로 삼고 있어요. 그런데 윤책 군주 그대와 알천 상대등이 이제는 사돈 사이가 되고 있으니 나도 그대를 사돈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겠어요. 그래도 괜찮겠지요?... “.
그것은 굉장히 우호적인 발언이다. 따라서 윤책도 빙긋 웃으면서 대답한다; “비천한 소신이 받들기에는 감히 어려운 폐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 뜻만은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무엇이든지 소신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라도 하문하여 주십시오. 마음을 다하여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 진덕여왕이 진지하게 말한다; “나는 이미 70을 바라보는 나이입니다. 그리고 자녀가 없어요. 상대등도 80세가 넘었지요. 그러니 우리의 세대는 곧 끝이 날 것입니다. 그러면 삼한일통의 무거운 책임은 춘추공이 져야만 하지요. 외부인에게는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내가 해준 것이니 윤책공은 그렇게 아시고 장차 춘추공을 도와 반드시 삼한일통을 원하시는 조상님들의 뜻을 이루도록 해주세요. 천하의 기재인 그대 윤책을 믿고서 짐이 부탁하는 바입니다… “;
윤책으로서는 분에 넘치는 분부이며 당부의 말씀이다. 그래서 겸손하게 말한다; “신라의 대신이라면 응당 그렇게 해야지요. 그런데 어떻게 비천한 소신을 아시고 그런 분에 넘치는 당부의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그것이 궁금합니다, 폐하… “.
그 말을 듣자 그 옆에 앉아 있던 상대등 알천이 여왕에게 고개를 숙여 양해를 구한 다음에 대신 말한다; “사돈, 나와 폐하는 그대 윤책의 이야기를 자주 하고 있답니다. 그 이유가 두가지이지요. 하나는, 서기 600년에 원광법사께서 수나라에서 귀국하여 진평왕의 왕사가 되었을 때 승하하신 선덕여왕님과 폐하께서는 법사님의 설법을 듣고 자랐지요. 따라서 원광법사님의 어린 제자인 윤책공을 그때부터 관심을 두고 지켜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
참으로 오래 전의 이야기인지라 윤책이 경청한다. 알천의 말이 이어진다; “또 하나는, 두 분 여왕님께서는 젊은 인재들로 구성이 되어 있는 오인회의 존재에 대하여 진작에 알고 있었어요. 그들의 목표가 힘이 있는 국왕을 세워 신라가 제24대 진흥대왕이 못다 이룬 삼한일통을 완성한다는 것이지요. 그 일을 추진하고 있는 재사이며 백의정승인 윤책공에 대하여 어떻게 우리가 관심이 없겠어요? 하하하… “;
윤책으로서는 진덕여왕과 상대등 앞에서 마치 발가벗겨진 기분이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두 사람이 ‘허허 호호’라고 웃으면서 대표로 여왕이 말한다; “국왕의 자리와 상대등의 자리가 본래 그렇게 고급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
진덕여왕의 간곡한 당부의 말씀이 이어진다; “이제 우리는 서로 사돈이 되었으니 허심탄회하게 조국 신라의 발전과 번영만을 생각하도록 합시다. 부디 사돈께서는 백제의 의자왕과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무너뜨릴 수 있는 비책을 발견하여 우리 신라가 삼한일통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여왕인 짐이 부탁합니다… “.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윤책 군주는 지금도 상당한 당혹감을 느끼고 있다; “무슨 재주로 내가 백제의 의자왕과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의 약점을 파악하고 그들의 기반을 무너뜨릴 수가 있다는 말인가?... “.
그런데 651년 그해가 가기 전에 서라벌에서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 서라벌 북쪽 윤책의 고향인 기계마을에 이웃하고 있는 안강의 금곡사에서 주지로 오래 지내고 있던 일광스님이 자신의 제자인 오누이를 데리고 압량주의 군주인 윤책을 방문한 것이다.
윤책은 제법 나이 차이가 나는 자신의 사제인 일광에게 반가운 김에 편하게 말한다; “해가 바뀌어 가고 있는데 사제는 어떻게 탁발승의 모습으로 두 젊은이와 함께 나를 찾아오고 있는가? 금곡사는 어찌하고 이렇게 왔는가? 하여튼 반가우이… “.
그 말을 듣자 일광스님이 해맑은 표정으로 목탁을 치면서 익살스럽게 대꾸를 한다; “두 제자와 함께 압량주를 지나고 있는데 마침 세밑이 되어 사형생각이 절로 나더군요. 그래서 문후도 여쭙고 좀 쉬어 가려고 이렇게 염치 불구하고 들렀습니다. 물리치지 마시고 며칠 공양이나 잘 해 주십시오… “.
나이 60이 다 되어 가는 윤책이 그의 말을 들으면서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며칠이 아니라 일년이라도 푹 쉬어 가게. 나야 말벗이 생겨서 좋지 않겠는가?... 그래 사부님께서 선적하신 금곡사는 누가 지키고 있는가? 그리고 두 젊은이는 사제의 제자들인가?... “;
일광스님도 어느덧 40대의 중년이다. 그리고 두 젊은이 앞에서는 존경받는 스님이다. 그런 그가 목탁치기를 서서히 마치면서 말한다; “저는 스승이신 원광법사님께서 선적하신 후에 계속 금곡사를 지켰지요. 그런데 642년 백제군의 침입으로 대야성에서 전쟁고아들이 많이 발생하여 살길을 찾아 서라벌로 몰려들었어요. 그 가운데 소제가 주지로 있는 금곡사에 들어온 고아들이 있었지요… “;
그 말을 듣자 윤책도 마음이 아프다. 그 옛날 앵잠성주로 근무하고 있을 때에도 이웃성에서 백제의 침입으로 전쟁고아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 것일까?... ‘, 윤책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제 일광스님의 말을 잠잠히 듣고 있다.
일광스님의 말이 이어진다; “저는 수 많은 사찰 중에 하필이면 어린아이들이 심산유곡의 금곡사를 찾아 들어온 것도 인연이다 싶어서 그들 중 똘똘한 4명을 선택하여 제자로 삼고 함께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요즘은 수제자에게 주지자리를 물려주고 이렇게 편하게 천하를 떠돌고 있습니다. 마침 제자 중 오누이인 월광과 월녀가 저를 따라 천하유람을 하기를 원하기에 같이 다니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일광스님이 제자인 오누이에게 말한다; “내가 너희들에게 귀가 따갑도록 이야기한 천하의 기재이신 윤책 군주님이시다. 나의 스승이 되시는 원광법사님의 첫째 제자이시지. 그렇게 알고 윤책 사백님께 큰절을 올리도록 해라”;
월광과 월녀가 윤책에게 큰절을 한다. 그 절을 받으면서 윤책이 두 젊은이의 인상을 살핀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단단하면서도 영리하게 보인다. 그러한 젊은이를 제자로 두고 있는 사제 일광스님이 부럽기조차 하다. 그래서 말한다; “참으로 든든한 제자분들을 두었어요. 그래, 월광 사질은 월녀 사질녀와 어떤 관계인가?... “.
월광이 공손하게 대답한다; “사백님, 제가 오라비이고 월녀가 제 누이동생입니다. 그 옛날 9년 전에 대야성이 백제군에게 함락되었을 때에 부모님이 변을 당하시고 13살인 제가 11살인 누이를 데리고 서라벌로 도망을 쳤지요. 한해동안 거지꼴로 떠돌다가 안강의 깊은 산속 금곡사를 우연히 들렀는데 그때 일광스님께서 저희들을 불쌍하게 보시고 고맙게도 제자로 거두어 주신 것입니다… “.
윤책이 보기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월광의 눈이 예리하다. 그리고 갓 20살로 보이는 월녀도 지혜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말한다; “내가 보기에 사질과 사질녀도 복이 있지만 사실은 일광 사제가 더 복이 있구만… 이렇게 총기가 넘치는 젊은이들을 제자로 삼게 되었으니 말이지. 하하… 그러면 오늘은 모두들 나와 함께 식사를 하고 밀린 이야기나 실컷 하도록 하세… ”.
며칠간 함께 지내면서 윤책이 일광스님의 유람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 있다. 그 가운데 인상적인 이야기가 있다. 바로 탁발승이 되어 백제를 다녀온 이야기이다. 귀가 번쩍 뜨인 윤책이 사제에게 물어본다; “우리 신라는 백제와 원수가 되어 서로 내왕을 하지 않고 지내는데 사제는 어떻게 그렇게 국경이 없이 다닐 수가 있는가?... “.
그 말에 빙긋 웃으면서 일광스님이 말한다; “사형께서도 참으로 답답하십니다. 국경선을 지킨다고 하여 새가 날아 다니는 것을 막을 수가 있습니까? 저희들 같은 탁발승은 정처가 없이 떠도는 새와 같은 신세이지요. 그리고… “.
사형인 윤책이 크게 관심을 기울이자 일광스님이 신이 나서 말한다; “국경을 넘어 다니면서 장사를 하는 봇짐장사치도 있고요, 술도 팔고 재주도 파는 여인네들도 있답니다;
그것이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이지요... 더구나 우리 신라사람과 백제사람은 본래 말과 글이 같고 인심과 문화가 꼭 같은 하나의 민족이 아닙니까? 하하하… “.
그 말을 듣자 윤책이 진지하게 묻는다; “그래, 사제는 백제를 유람해보니 어떠하던가? 살기가 좋든가? 아니면 백성들이 힘들어 하던가?... “. 일광스님이 즉시 대답한다; “우리 신라나 백제나 마찬가지이지요. 다만 하나의 차이점은 신라는 여왕들이 다스리고 있어서 후사가 없지만 그곳 백제는 의자왕이 자녀가 너무 많아서 왕실에서 재정을 거의 사용하고 있어요… “;
‘무슨 말인가?... ‘, 의아해 하면서 윤책이 귀를 기울인다. 일광스님의 말이 이어진다; “그 영특하던 의자왕이 요즈음 호화사치가 심하고 자녀들의 수가 무려 40명이 넘으니 재정지출이 많아져서 그만큼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고 있지요. 게다가 왕자들이 성가하여 너나없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의자왕이야 든든하고 좋겠지만 그만큼 귀족들의 불만이 생겨나고 있어요… “.
중요한 정보이다. 그 점을 깨닫게 된 재사 윤책이 과연 이제부터 백제의 조정에 대하여 어떠한 묘수를 사용하고자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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