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바람소리(손진길 소설)

천년의 바람소리47(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2. 1. 8. 00:46

천년의 바람소리47(손진길 소설)

 

65212월에 백제의 사비성에서 돌아온 차남 윤하신이 압량군주인 부친 윤책에게 보고하는 내용이 두가지이다; 하나는, 마침내 백제가 당나라와의 외교관계와 교역을 일체 끊고 왜나라하고만 교류하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의자왕의 적자 출신 왕자들과 서자 출신 왕자들 사이에 갈등을 부채질하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첫번째의 내용은 그 전해 곧 651년에 신라의 요청으로 당나라가 백제왕에게 신라에서 빼앗은 성들을 전부 돌려주라고 압력을 크게 행사한 결과에 따른 백제의 대응조치이다. 군주 윤책이 벌써 알고 있는 내용이 구체화된 것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그 다음 내용은 크게 관심이 간다.

왜냐하면, 백제 의자왕이 자신의 적자인 왕자 6명에게 조정의 최고관직인 좌평의 벼슬은 물론 그에 해당하는 큰 식읍을 주는 것을 보고서 서자 출신 왕자들 35명을 대표하고 있는 서장자 부여궁이 반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분위기를 사비성의 고급요정 월궁의 행수로 일하고 있는 월녀가 일광스님과 윤하신에게 전했다.

그에 따라 일광과 하신은 월녀의 오라비인 월광에게 지시했다; “월궁의 수입으로 얻은 재물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부여궁에게 접근하고 그와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도록 하라. 공작의 내용은 의자왕이 적자인 왕자들을 우대하고 서자인 왕자들을 차별하는 것을 불합리하다고 계속 떠들게 만드는 것이다”.

그 결과 월광이 부여궁의 신임을 얻었으며 그의 심복이 되어 사비성에서 활약을 개시하고 있다. 월광의 계획은 부여궁을 움직여 적자인 왕자들과 서자인 왕자들 사이에 분란을 크게 조장하는 것이다. 그 공작이 서서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만약 의자왕이 그 분란을 잠재우고자 하면 서자 출신 왕자들에게도 적자 출신 왕자들처럼 좌평의 벼슬과 그에 해당하는 식읍을 떼주어야 한다. 그것은 귀족들의 출세길을 막는 행위이며 그들의 재산을 크게 축내는 것이다. 결국 백제 의자왕에게 충성하는 귀족의 수가 줄어들고 왕족과 귀족들의 갈등으로 백제군은 외적의 침입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참고로, 백제(百濟)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수많은 지방세력들이 모여 만들어진 나라이다;

그와 같은 보고를 받은 압량주의 군주 윤책은 윤하신을 서기 653년초에 다시 백제의 사비성으로 보내면서 두가지 지령을 내린다; “첫째, 좌평의 대접을 받고 있는 적자 왕자들 가운데 장남인 부여효가 태자이고 똑똑한 다섯째 왕자 부여풍이 왜나라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나머지 4명의 적자왕자 가운데 외세의 힘을 빌려서라도 대권을 얻으려고 하는 꿈을 꾸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라. 그리고… “.

재사 윤책의 두번째 지령이 다음과 같다; “둘째, 왕자들이 권력을 차지하고 자신의 식읍을 가지게 되면 사병을 키워서 대권을 차지하려는 욕심을 부리게 된다. 그리고 왕자들에게 자신의 식읍을 빼앗기게 되는 귀족들이 늘어나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에 급급해진다. 결국 귀족들이 자신들의 백성들을 관군으로 보내기를 싫어하고 재산을 지키는 사병으로 활용하게 된다. 그 점에 유의하여 백제의 관군의 수가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라”.

윤책이 두가지의 지령을 내려 보냈지만 그 결과에 대한 고급정보를 얻게 된 것은 한해가 저물어가는 서기 653년말이다. 그때 일광스님이 몰래 백제의 국경을 넘어 신라로 들어와서 윤책 군주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한 것이다; “먼저, 의자왕의 4명의 적자 왕자 가운데 태자의 꿈을 꾸고 있는 자가 있습니다. 그가 부여융입니다. 그는 장남인 부여효가 자질이 부족하고 약골이라 태자로는 불안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대권에 욕심을 내고 있어 외세와도 손을 잡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

일광스님의 보고 가운데 백미가 다음과 같다; “사형의 말씀 그대로 왕자들과 귀족들 사이에 사병확보 전쟁이 벌어지고 있어요. 따라서 관군의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각 성으로 보면 평균 5천명씩의 병사가 있어 도합 40개 성으로 계산하면 전체적으로 20만명의 지방군이 있는데 그들의 성격이 일종의 사병과 같아요. 그러니 수도인 사비성이 위기에 처하게 되면 지방군이 구원군으로 동원이 될지 장담할 수가 없어요… “;

 

그 말을 듣자 윤책이 일광에게 묻는다; “그러면 사비성을 지키고 있는 관군의 수는 어느 정도인가?”. 일광이 즉시 대답한다; “사형, 그 수가 적어요. 사비성과 그 주변의 수비병의 수를 전부 합한다고 해도 10만명을 넘지 못해요. 그러므로 전시상황에서 의자왕이 즉시 동원할 수 있는 군사의 수가 10만명 정도이지요… “.

그 말을 들은 윤책이 사제인 일광스님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문제는 지방의 각 성에 분산되어 있는 병사들을 중앙에서 활용하지 못하도록 각 성주의 개인사병의 성격을 더욱 지니게 만드는 것이겠군. 그것은 의자왕에 대한 지방성주의 충성심을 떨어뜨리는 일인데 그 일에 관한 공작이 혹시 이루어지고 있는가?... “.

윤책은 다분히 희망적인 뜻으로 사제에게 한번 물어본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들려온다; “어떻게 사형이나 아들 하신이나 생각하는 것이 그렇게 똑 같나요?... 지금 하신이가 사비성에서 전념하고 있는 공작이 바로 그것이지요. 허허허… “.

무슨 말인가 싶어서 윤책이 귀를 기울이자 일광스님이 신이 나서 말한다; “구체적으로 왕자들과 귀족들 사이의 갈등을 계속 증폭시키는 한편 성충이나 흥수와 같은 충신들을 조정에서 쳐내고 간신들이 득세할 수 있도록 바닥 민심을 조작하고 있어요. 하신이가 그럴싸한 소문을 만들어 사비성에 계속 퍼뜨리고 있는 중입니다. 하신이가 이렇게 말하던데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라고요. 하하하… ”;

  

그 말을 듣자 윤책이 사제 일광스님에게 당부한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끈질기게 공작을 계속하라고 말해 주세요. 새해에도 그런 방향으로 지속적으로 일을 추진하면 좋겠어요. 반드시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보이네요. 그리고 그 일에 필요한 자금은 내가 계속 지원할 테니 조심해서 지니고 가세요… “.

압량주의 군주인 윤책이 진덕여왕 통치 8년째가 되는 서기 654년에도 그와 같은 비밀업무를 추진하면서 그 내용을 오인회 구성원들에게 은밀하게 알리고 있다. 그 정보를 공유하게 되는 김춘추와 김유신 그리고 최추랑과 김흠순이 비밀리에 그 일을 돕고 있다.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세작을 백제로 보내어 그 일을 측면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서기 6543월이 되자 보령 60여세인 진덕여왕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만다;

 

 여왕의 정식남편은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 배우자 역할을 하고 있던 80대 연령의 상대등 알천이 그렇게 슬퍼한다. 자신보다 20살이나 어린 여왕이 앞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화백회의의 구 귀족들이 슬퍼하고 있는 알천공을 찾아와서 정치적으로 권면한다; “이제 여왕이 붕어를 하셨으니 이 나라의 어른은 상대등 알천공이십니다. 즉시 보좌에 올라 왕국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 하지만 슬픔에 빠진 알천공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비통해 하는 심정으로 알천공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신라의 마지막 성골께서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제 진골들이 너나없이 나서서 보좌의 주인이 되겠다고 할 것입니다. 벌써 80대 중반의 상노인인 나 알천은 그들을 다스리고 신라를 정치적으로 그리고 군사적으로 안정시킬 수 있는 힘이 없어요. 그러니… “.

 뒷일을 걱정하는 알천공의 단호한 입장이 나타나고 있다; “나는 그 힘이 한창이고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 능숙한 52세의 이벌찬 김춘추 공이 후사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춘추공이 진지왕의 아들 김용수와 진평왕의 장녀 천명공주의 아들이니 진골 가운데는 그 서열이 가장 앞서고 있어요. 그러니 부디 그렇게 화백회의에서 결정해주세요… “;

 

신라의 최고 어른이며 진골 중의 진골인 화백회의 의장 상대등 알천공이 그와 같이 확실하게 말하고 있으므로 구 귀족들이 더 이상 김춘추 공의 국왕 추대에 대하여 이의를 달 수가 없다. 따라서 만장일치로 춘추공을 신라 제29대 국왕으로 의결하게 된다. 물론 그 화백회의에 신라의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김유신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진덕여왕이 8년간 신라를 다스렸지만 사실은 김춘추와 김유신이 신권과 군권을 쥐고서 여왕을 적극 보좌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왕이 서거하였지만 춘추공이 그 뒤를 잇게 되자 일사천리로 신라는 국가발전을 위하여 아무런 공백이 없이 전진하게 된다.

다만 한가지 차이점은 훗날 신라의 제29태종 무열왕으로 불리게 되는 김춘추가 개인적으로 백제의 의자왕에게 원한이 있는 인물이기에 백제를 자신의 손으로 멸망시키고자 작심하고서 이제는 국왕으로서 당에 대한 외교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강력한 신라의 정책이 두가지 나타나고 있다; 하나는, 나당 연합군을 형성하여 일시에 백제를 멸망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결정적인 시기를 만들기 위하여 백제의 조정에 간자를 더 많이 심고 의자왕과 충신들 사이를 이간질하는 간신배들의 활약을 계속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그 시기에 압량주의 군주인 재사 윤책은 백제의 적자 왕자 가운데 야심이 큰 부여융에게 자신의 차남인 윤하신을 붙여서 대권을 넘보도록 계속 부추기고 있다. 그 결과 부여융은 스스로 태자가 되어 외세를 끌어들여서라도 백제의 보좌를 차지하고자 욕심을 부리게 된다.

그와 같은 공작이 훗날 한가지 부작용을 낳게 된다. 그것은 부여융이 당의 간자와 직접 연결이 되어 다른 제안을 하기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다; “당나라가 백제를 접수하는 경우 백제 땅에 도독부를 세우고 그 책임자로 부여융 자신을 임명하여 달라는 것이다. 신라의 국왕에 대한 책봉도 대당의 황제가 시행하고 있으므로 그렇게 되면 자신은 대당의 황제가 인정하는 백제의 왕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서기 660년에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지만 그 열매를 당 고종이 독식하고자 한다. 명분상 당나라에 충성하는 부여융을 백제의 태자라고 부르면서 그를 앞세워 백제 땅에 당의 웅진도독부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시도를 막기 위하여 김춘추와 김유신 그리고 재사 윤책은 백제의 유신(遺臣) 및 유민들과 힘을 합하여 당군을 격파하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의 멸망과정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