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207강(창37:30-35)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2월 23일(주일새벽)
르우벤의 고백, “아이(요셉)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창37:30)
르우벤의 계책은 일단 요셉을 물이 없는 웅덩이에 던져 넣고서 그 자리를 피하는 것입니다(창37:22a). 그리고 밤중에 은밀하게 요셉을 구해서 헤브론 아버지 야곱의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창37:22b). 그는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고 동생들의 잘못을 고발할 것입니다. 그 결과 자신은 차기 족장이 되고 동생들은 이스라엘의 분노로 중징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묘안입니다. 그런데 밤중에 돌아와보니 웅덩이에 요셉이 없습니다(창37:29). 벼락을 맞은 것처럼 앞이 캄캄합니다. 유일하게 자신의 신원이 회복이 될 수 있는 방법인데 그것이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너무나 기가 막히고 억울해서 자신의 옷을 찢으며 르우벤이 외치고 있습니다;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창37:30).
성경에는 내가 살고 모두를 죽이는 르우벤의 계책과 같은 그러한 이기적인 구원의 개념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정반대의 구원론을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자신의 삶과 죽음으로 보여준 구원의 개념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모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희생의 제물로 이 땅에 오십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시고 대속의 제물이 되고 맙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정하시는 유일한 만민구원의 방법론입니다. 따라서 창조주께서는 그 사실을 온 천하에 알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부활시키고 승천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성령님을 성도들에게 보내어서 그 진리를 잊지 말도록 조치하고 있습니다”.
신약시대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의미를 깨닫는 성도는 르우벤과 같은 계책을 사용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디로 갈까?”(창37:30)라고 더 이상 묻지도 않습니다. 곧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달려가서 회개를 합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주님을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르우벤의 시대에는 아직 그와 같은 놀라운 은혜가 없습니다. 그래서 르우벤은 한탄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르우벤이 그러하듯이 구약시대의 유대교가 그러합니다; “자신을 살리고 또 자기 편만을 살리고 있을 뿐입니다. 다른 편으로 구분이 되고 있는 이방인들은 진노의 자식들입니다. 집단이기주의는 가문의 영광이 되고 조국에 엄청난 승리를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대주의 선민사상과 시오니즘이 한 때 중동 땅에서 다윗의 제국을 형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주변국의 나라와 백성들은 그들 선민들의 종 노릇을 하느라고 고생했으며 말을 듣지 아니하면 인종청소까지 당했습니다(삼하8:13-14, 왕상11:15-16). 한 마디로, 르우벤의 사상이나 선민사상은 결코 천지만물과 모든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에 입각한 사랑의 실천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르우벤은 “나는 어디로 갈까?”(창37:30)라고 한탄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라도 최소한 유다의 새로운 리더쉽을 배워야만 할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동생들을 짓밟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유다처럼 자신이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를 배워야만 합니다. 그것이 구약의 시대를 살고 있는 르우벤이 자신의 인생 가운데 훗날 메시아를 만나기 위해서(히11:13, 요8:56-58) 반드시 해결을 해야만 하는 숙제라고 하겠습니다.
숫염소의 피에 채색 옷이 적셔짐으로써 요셉이 죽은 것으로 간주가 되다(창37:31-33).
유다의 제안은 사실 고육지책입니다. 죽음의 위기에 내몰린 동생 요셉을 살리기 위해서는 그를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아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살인자로 전락하게 될 형제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요셉의 채색옷을 벗겨서 짐승의 피를 묻혀야만 합니다(창37:31). 마치 들판에서 짐승에게 물려 죽은 것처럼 꾸미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거짓 물증을 제시한다면 아버지 야곱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일단 요셉이 죽은 줄 알고서 단념을 할 것입니다(창37:33-35). 그렇지만 유다는 동생의 채색옷에 숫염소의 피를 묻히는 그 작업이 기쁘지는 결코 않습니다. 유다 자신도 결국은 요셉의 부르짖음과 원망에서 자유롭지는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 증거가 22년 후에 애굽에서 형제들의 입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창42:21).
참고로, “채색옷을 숫양의 피에 적신다”(창37:31)고 하는 것은 세례의 의미와 통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고 연이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성도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롬6:4). 여기서는 채색옷을 숫양의 피에 적셔서 아버지 야곱에게 보냄으로써 요셉은 죽은 자식으로 치부가 됩니다(창37:32-35). 그러나 22년 후에 야곱은 요셉을 애굽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창46:29-30). 요셉은 모든 것이 변하여 있습니다. 철부지 17세 소년이 아니라 당당하게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세례와 같습니다. 별로 쓸모가 없는 죄인이 죽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악한 짐승에게 잡아 먹힌 것으로 판단하는 인간 야곱과 하나님의 위로하심(창37:33-35, 45:25-28).
도단에서 목축을 하고 있던 아들들이 요셉의 피 묻은 채색옷을 야곱에게 보내왔습니다(창37:32a). 그것은 요셉이 형들을 찾아가다가 도중에 짐승에게 찢겨서 죽었다는 물증입니다(창37:32b). 야곱은 그렇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요셉을 다른 형제들과 구분하여 특별히 후계자로 삼는다는 뜻을 담아서 만들어준 귀한 옷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통해하고 있습니다. 요셉을 편애하던 마음이 애통함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위로를 받을 말이 없습니다. 야곱은 그저 나도 요셉을 따라 음부에 가고 싶다고 부르짖고 있을 뿐입니다(창37:35).
아들 요셉이 죽었으므로 이제는 아무런 구원의 방법이 없다고 절망하고 있는 야곱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요셉이 죽은 것이 아니라 그의 신분을 상징하고 있는 채색옷에 숫양의 피가 묻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묘한 상징입니다. 채색옷이 숫양의 피에 적셔짐으로써 요셉이 죽은 것으로 간주가 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린 양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십자가에서 함께 죽은 것으로 간주가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함께 살아난 것으로 의제가 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더욱 생생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요셉이 살아있으며 그것도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와 보혈로 말미암아 믿는 자의 운명이 바뀌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다고 체념하고 있는 야곱에게 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위로라고 하겠습니다. 그 위로하심이 훗날 애굽에서 이루어집니다. 그것도 흥미로운 이야기 체로 기술이 되고 있습니다. 모세의 ‘스토리 텔링’이 주고 있는 장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참으로 복잡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영적인 신비와 개념들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방법 곧 이야기 체로 기술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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