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바람소리19(손진길 소설)
6. 윤책이 원광법사를 모시고 당나라를 다녀오다.
사람은 한 식경 후의 일도 모른다고들 서라벌에서 흔히 말하고 있다. 그 말이 맞는 모양이다. 왜냐하면, 진평왕 47년인 서기 625년 2월 초순에 윤책이 스승 원광법사의 부름을 받고 황룡사에 잠시 들렀더니 전혀 예상 밖의 임무가 그에게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84세의 노인이지만 아직 정정한 사부 원광스님이 사랑하는 제자 윤책에게 정색을 하고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책아, 나는 국왕의 명으로 잠시 산동에 있는 신라소와 장안에 있는 당나라의 조정에 다녀와야 한다. 국왕의 친서를 지니고 당나라 황제를 알현하러 가는 길에 내가 비서로 책이 너를 데리고 가겠다고 국왕에게 말하고 벌써 허락을 받아 두었다. 그러니 나를 수행하여 당나라를 다녀올 준비를 하도록 해라… “;
전혀 상상밖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윤책은 33살의 나이에 대국 당나라를 방문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데 사부를 잘 만나서 덕분에 큰 나라를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래서 두말 하지 아니하고 당장 답변한다; “잘 알겠습니다, 스승님. 그런데 언제 출발하실 예정이십니까?... “.
원광법사가 ‘헐헐’하고 웃으면서 대답한다; “3일후 서라벌을 출발하여 2월 중순에는 당항성에서 당나라 산동으로 들어가는 가장 빠른 배를 타려고 한다. 그러니 서둘러야 할 것이야. 내가 군부에는 책이 너의 사정 이야기를 해 놓을 것이니 아무 염려하지 말고 나와 함께 당나라에 사신으로 편히 다녀오도록 하자구나!... “;
3일후 사제간에 나란히 서라벌에서 말을 타고 당항성으로 달린다. 오늘날의 경상도 경주에서 경기도 수원 화성으로 가는 셈이니 그 거리가 상당하다. 하지만 문제는 며칠이 걸리는 먼 거리이므로 도중에 숙식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민들 같으면 그것이 대단히 불편하다. 오늘날과 같은 여관이나 식당이 발달하지 아니한 고대국가 신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신라 국왕의 사신의 자격으로 길을 떠나고 있는 원광법사와 그를 수행하고 있는 신라의 관리 윤책이므로 관아의 도움을 얻을 수가 있다. 말을 달리다가 오후 늦은 시간에 현지에 있는 작은 성이라도 들어가게 되면 그곳 성주의 대접을 제대로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신라의 불교계가 그 정보와 조직에 있어서 가히 전국적이다. 실제로 길가는 도중에 스님을 만나서 원광법사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게 되면 서로 자신의 절에 모시려고 한다. 그렇게 큰 스님이 되면 신라 천지를 마치 제집처럼 돌아다닐 수가 있으니 그것이 참으로 편리하다.
윤책은 스승이신 원광법사를 수행하면서 비로소 그와 같은 사실을 깨닫고 있다. 그 결과 별로 불편함이 없이 두 사람은 무사히 당항성에 도착하여 제때에 당나라로 가는 큰 배를 타게 된다. 윤책이 처음으로 배를 타면서 그 모양을 살펴보니 큰 돛을 두개나 달고 있는 큰 무역선이다;
신라의 상인들이 지금은 당나라와 활발하게 무역하고 있다. 하지만 서기 550년 이전에는 그것이 그림의 떡이었다. 왜냐하면, 서해안이 아니라 신라의 남해안에서 배를 타고 중국까지 먼 바닷길을 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의 제24대 진흥왕이 백제를 물리치고 한강유역을 차지하게 되자 그때부터 서해에서 중국으로 직행하는 신라의 바닷길이 열린 것이다. 그로부터 70여년의 세월이 지났으니 이제는 신라의 상인들이 신나게 당나라와 교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큰 무역선을 타고서 서해를 가로질러 당나라의 산동성으로 직행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거리가 상당하기에 여러 날이 걸린다. 자연히 윤책이 사부이신 원광법사의 말동무가 되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다.
젊은 시절 중국에 두차례나 유학하고 그곳에서 현지인들에게 불경을 가르치면서 오래 지낸 경험이 있는 원광법사이기에 차제에 제자 윤책에게 유용한 정보를 많이 알려주고 있다. 그 가운데 윤책이 오래 기억하고 있는 내용만 추려보아도 다음과 같다;
첫째로, 산동에 들리게 되면 그곳에 신라소, 백제관, 그리고 고구려방이 있다고 한다. 백제는 육지로 중국으로 갈 수가 없어서 오래 전부터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서 중국과 왕래했다. 백제는 중국과의 해상교역이 활발한 것이다. 따라서 산동지역에 많은 백제인이 중개무역을 하면서 살고 있다. 그들이 객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따라서 백제의 여관이 많다는 뜻으로 백제관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와 달리 신라는 75년전 진흥왕 때 비로소 한강유역을 차지하여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해지고 있다. 그것도 초기에는 신라의 조정이 중국의 대국과 외교를 하기 위하여 중간지점으로 산동지역을 활용한 것이다. 따라서 신라의 연락사무소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의미에서 신라소라고 불리고 있다.
고구려는 만주지역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중국대륙으로 진출하기가 용이하다. 다만 많은 물자를 큰 배로 실어 나르기 위하여 서해 바다를 이용하고 있다. 그 일을 돕기 위하여 산동지역에 고구려방이 있다. 그곳에는 고구려조정의 비호를 받고 있는 방주가 있으며 그가 해상무역을 관장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신라와 백제가 반도국가라고 한다면 고구려는 대륙국가이다. 그런데 어째서 중국의 산동지역에 고구려방을 두고서 해상무역을 관장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고구려가 한반도 북방에서 시작된 나라이기 때문이다. 백두산에서 멀지 아니한 졸본성에서 성장하기 시작한 고구려가 동해로 뻗어가면서 해상무역을 중시했던 옥저와 동예 등의 부족국가를 정복한 것이다;
그들의 선박제조기술과 항해술이 고구려의 것이 되어 계속 발전하고 있다. 그 덕분에 고구려의 해군이 동해는 물론 서해에서도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셋째로, 백제는 수백 년간 중국대륙과 바닷길로 교역하면서 선진문물을 꽃피우고 있다. 백제는 그 문명을 섬나라 왜에 전해주면서 그곳을 식민지화하고 있다. 백제의 왕실과 조정은 전략적으로 왕자 가운데 장자를 태자로 삼아 백제왕의 자리를 넘겨주고 지차 가운데 똑똑한 왕자를 왜로 보내어 식민지 아스카 지역의 왕으로 삼고 있다;
그와 달리 고구려는 동해로 진출하여 왜의 북방에 자신들의 세력권을 만들고 있다. 그러한 왜나라로의 진출 움직임에 있어서는 신라가 가장 뒤처지고 있다. 그 이유는 신라의 왕실을 뒷받침하고 있는 화백회의의 귀족들이 전부 농업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단 한번 어업에 밝은 가문이 신라의 왕가를 형성한 적이 있다. 그가 석탈해인데 그는 박혁거세의 사위가 된 후에 한차례 정권을 장악했을 따름이다. 그렇지만 석탈해의 전통이 신라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서기 512년 곧 신라의 제22대왕 지증왕 13년에 오늘날의 강원도에 해당하는 신라의 하슬라주의 군주였던 이사부가 군선을 타고 우산국으로 쳐들어가 그곳을 정벌하여 신라의 속국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로, 역사시대 중국대륙을 통일한 왕조는 진나라이지만 오래 유지가 된 왕조는 한나라이다. 그런데 한나라의 수도가 낙양이므로 한족들은 자신의 수도가 낙양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서기 581년에 선비족 출신인 양견이 통일왕조 수나라를 세우자 낙양에서 그 서쪽인 장안으로 천도를 하게 된다;
그리고 618년에 같은 선비족인 이연이 수나라를 없애고 당나라를 세우게 되자 그 수도가 계속 장안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원광법사는 대당의 수도인 장안으로 들어가서 당고조인 이연을 만나 진평왕의 친서를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로, 한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원광법사가 애(愛)제자 윤책에게 해준다. 그것은 예맥족 3나라와 대당의 국력비교이다. 원광스님이 보기에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개척하는 등 신라의 국토를 확장했기 때문에 이제는 신라가 백제와 비슷한 규모의 인구를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이 300만명정도이다. 그런데 북쪽의 고구려는 그 영토가 무척 넓지만 인구로 보게 되면 500만명 이내이다. 따라서 신라와 백제가 소위 나제동맹으로 서로 군사적으로 연합하고 있으면 고구려가 함부로 남침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중국 대륙에는 한족이 5천만명 정도 살고 있어 인구수로는 예맥족 전체 곧 삼국의 백성을 전부 합친 수의 5배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영토가 참으로 넓다. 신라, 백제, 고구려를 전부 합친 면적보다 15배나 되기 때문이다;
그 점을 깊이 생각한다면, 한족의 나라 대당(大唐)의 국력을 결코 무시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를 한반도의 남동쪽 구석에 밀어 넣고 숨도 쉬지 못하게 만드는 정책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소국 신라를 완전히 고립시켜 마치 하나의 섬처럼 만들게 되면 그 보복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원광법사의 말이다. 신라가 만약 대당과 군사적으로 제휴하여 공격을 감행한다면 백제나 고구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안보상 위기가 도래할 것이라고 원광스님이 예견하고 있다.
그렇지만 원광스님은 그러한 미래만은 결코 원하지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신라가 자력, 자강, 자립에 의하여 예맥족의 일통을 달성하지 아니하게 되면 대당의 군사력에 의하여 신라마저 속국으로 변하고 말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원광법사가 주장하고 있는 신라의 국력신장의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대당과의 외교관계는 중요하지만 결코 군사적인 동맹을 맺어서 사대주의적인 방법으로 예맥족을 일통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신라의 국력을 신장하여 자립 자강으로 삼한일통을 이루자면 다음과 같은 비상한 방책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왕족은 물론 귀족과 평민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사상적 종교적 통합에 진력해야 한다.
둘째, 10대의 청소년들을 화랑으로 그리고 낭도로 삼아 단체생활을 통하여 무예를 닦도록 해야 한다. 화랑제도를 통하여 신라군은 강한 힘을 발휘할 수가 있다;
셋째, 왕족과 귀족들의 전유물이 되고 있는 한문이 아니라 신라백성들이 사용하고 있는 일상적인 말을 그대로 글자로 적을 수 있는 소리글자가 필요하다. 그렇게 되어야 소통이 원활하고 군대의 명령체계가 신속해 진다. 그와 같은 글자를 만들어 빨리 보급하는 나라가 삼한을 일통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 윤책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그래도 중국대륙에 관한 정보는 참으로 유익한 것이다. 따라서 항해과정에 스승 원광법사가 심심파적으로 윤책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을 그는 체계적으로 다시 정리하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항해 끝에 이제는 산동지역에 있는 항구에 도착하고 있다. 두 사람은 산동지역의 신라소에서 어떤 인물들을 만나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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