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라는 말의 의미(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12. 14. 13:25

제목;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라는 말의 의미”(1:1, 1:12-13) (참고구절들; 12:1-4, 15:2-6, 17:17-21, 22:12-18, 삼상24:6-7, 11:1, 12:46-50)

설교일; 주후 20211219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1214일 화요일 작성)

 

오늘 제가 강해설교의 제목으로 선택한 것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라는 말의 의미는 신학교 졸업을 앞둔 학생들에게 마지막 시험의 문제로 출제하면 딱 좋을 것입니다. 그 시험의 질문을 이해하기 쉽도록, “신약의 시작을 알리고 있는 말씀 곧 마태복음 제1장 제1절 말씀에 대하여 성경신학적으로 한번 풀이를 해보세요라고 정하면 더 좋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의 시작이 되고 있는 구약 곧 모세오경 첫머리인 창세기 제1장 제1에 대해서는 익숙하게 잘 알고 있습니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는 말씀을 그대로 믿고서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나의 인생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여호와의 종으로 한평생 살아가게 되면 에녹이나 엘리야처럼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새 언약에 대해서 비로서 설명하기를 시작하고 있는 마태복음 제1장 제1절을 살펴보게 되면 상당히 이상합니다. 그 구절이 정확하게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1:1)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말씀 다음에 제시되고 있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족보를 참조하면 새로운 세상의 창조를 위한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가장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유익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은 그 점을 한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참고로, 오늘은 강해 설교할 내용이 마치 조직신학의 경우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주제를 먼저 다음과 같이 제시하면서 관련구절들을 찾아서 자세하게 말씀드리는 방법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마태복음 제1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족보 이야기를 먼저하고 있는 것은 요한복음 제1장 가운데 12절과 13의 말씀을 참조하면 그 의도가 무엇인지 비로소 드러나고 있습니다;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1:12-13);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8:35).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의 삶은 이 세상의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들의 뜻으로 마련되어 있는 제도나 기득권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오로지 영이시며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 곧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으로 선포하고 가르쳐서 만민을 구원하여 함께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선민 유대인들이 혈통적인 이스라엘을 강조하고 자신들만의 할례와 제례의식으로 완전한 죄사함과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그러한 세상적인 논리와는 진작에 결별하고 있는 것이 만민구원의 복음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또다른 족보가 누가복음 제3장에 실려 있습니다. 그 마지막 구절 곧 38.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1:38)는 말씀은 의인의 족보 가운데에서 육체적인 혈통을 뛰어넘는 영적인 여호와신앙의 모습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조상이 육체적으로 다윗이나 아브라함이라고 주장하는 선민우월사상을 뛰어넘어 이 세상 만민과 만물의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진정한 생명의 주인이심을 발견하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비로소 이해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그들이 여호와의 종이며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정직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셋째로, 마태복음 제12장 뒷부분에서 이상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창 복음사역하고 계시는 현장을 모친과 동생들이 방문합니다. 많은 백성들에게 천국의 복음을 선포하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12사도를 모아 놓고서 별도로 천국복음에 대하여 더 깊은 내용을 가르치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그 교육시간을 방해하지 아니하려고 제자 한사람이 예수님께 조용하게 모친과 동생들의 방문사실을 알려드린 것입니다. 그때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말씀이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선포가 되고 있습니다; “48.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12:48-50);

 

 한마디로, 혈통 중심의 가족 개념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한평생 하늘에 계신 영적인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인생을 살아간 자가 영생의 천국에서 새로운 가족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창조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종은 혈통에 따른 선민사상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에 따라 전부 구원하는 일에 나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아브라함처럼 육적인 아버지 데라의 집을 떠나서 영적인 아버지이신 여호와의 뜻을 받드는 선지자이며 제사장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과 요셉이라는 믿음의 4대가 어떠한 여호와신앙을 지니고 한평생 살아갔던가 하는 점을 알기 쉽게 이야기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간략하게 말씀드림으로써 저의 강해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첫째, 훗날 사도 바울에 의하여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게 되는 아브라함은 자신과 혈통적으로 밀접한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모두 떠나고 있습니다(12:1-4). 그것이 변방의 이방민족 가나안사람들에게 여호와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선지자 활동의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믿음의 후계자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무엇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거론하고 있습니다;

(1)  아브라함 자신의 뜻으로 결정한 젊은 가신 다메섹 엘리에셀이 믿음의 가문의 후계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15:2-6).

(2)  아브라함이 젊은 씨받이 첩 하갈과 동침하여 얻은 튼튼한 아들 이스마엘도 믿음의 후계자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17:17-21). 이스마엘은 비록 서자이지만 아브라함의 혈통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믿음의 후계자가 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혈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종으로 주인의 뜻을 살피고  그 뜻을 실천하는 인생을 살아가겠다고 결단하는 그 믿음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영적인 종의 모습을 조금도 지니고 있지 못한 들사람이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그는 세상적인 축복에 만족하며 자신의 지배영역을 계속 넓혀 나가는 데에 관심이 지대합니다.

(3)  이삭은 이미 경수가 끊어진 89세의 할머니 사라가 99세의 남편 아브라함과 합방하여 얻은 기적의 아들입니다. 특히 사라는 평생 불임 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불임여성이 가임 여성으로 변하고 89세의 할머니의 몸과 99세의 할아버지의 몸이 젊은이의 것처럼 함께 회춘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연의 질서를 뛰어넘는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약속의 아들 이삭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상속하도록 특별히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들어준 아들입니다. 그와 같은 새로운 창조의 모습은 인간의 상식적인 혈통과 육정 그리고 인간의 뜻을 애초부터 뛰어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은 자신 있게 그의 복음서 제1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1:12-13).  

둘째, 이삭이 독자적인 여호와신앙인의 모습을 창세기에서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모친 사라가 127세의 일기로 헤브론에서 별세하고 나자 부친 아브라함이 후처 그두라와 함께 여생을 재미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25:1-4). 아브라함은 그 옛날 브엘세바에서 자신이 쫓아낸 첩 하갈과 서장자 이스마엘의 생각을 전혀 하지 아니하고 젊은 후처 그두라와 헤브론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서 37세의 젊은이 이삭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고 맙니다. 그는 가나안 땅 남쪽 브엘라해로이로 이주하여 수르 광야에서 지내고 있는 형 이스마엘과 서모 하갈을 자주 만나고 있습니다(24:62). 그들에게 여호와신앙의 모범을 보이고 있는 자가 약속의 아들 이삭입니다. 그 역시 아버지 아브라함의 집을 일찍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2)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불려가 헤브론에서 신부감 리브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아버지 집이 있는 헤브론이 아니라 다시 브엘라해로이로 되돌아와서 그곳에서  리브가와 오래 살게 됩니다(25:11). 그렇게 살아감으로써 부친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들을 돌보고 변방의 이방인들에게 여호와신앙인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이삭입니다.

(3)  이삭은 여호와신앙이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합니다(24:63). 그리고 가나안 땅의 흉년을 피하여 타국으로 이주할 때에도 먼저 여호와의 뜻을 묻고 있습니다(26:1-4). 그렇게 함으로써 아브라함과 달리 세상적인 시행착오를 크게 줄이고 있습니다.

(4)  블레셋 연맹왕 아비멜렉이 관장하고 있는 그랄 평야에 들어가서 살면서 여호와의 종에게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그들에게 눈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26:12, 18-22). 그것은 일찍이 부친 아브라함에게 주신 여호와의 축복이 약속의 아들인 이삭에게 승계가 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셋째, 야곱은 쌍둥이 동생으로 태어났기에 형 에서에게 세상적인 족장권을 빼앗긴 인물입니다. 고대 가부장 족장사회에서 지차가 된다고 하는 것은 형이 족장으로 세움을 받게 되면 그때부터 족장의 신하가 되며 자신의 자손들은 족장의 종이 되는 신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세상적인 잘못된 불이익을 받지 아니하려고 한평생 발버둥을 치고 있는 자가 바로 야곱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모친 리브가에게서 듣고 있는 여호와의 예언 한 토막을 평생동안 명심하고 있습니다; “23.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5:23);

(1)  그 예언이 언제 어떻게 성취가 되는 것일까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믿는 마음으로 77세의 중늙은이가 될 때까지 결혼도 하지 아니하게 줄기차게 모친 리브가의 장막에서 함께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있는 인물이 바로 야곱입니다(25:27).

(2)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자신들의 꾀로 성취하고자 했지만 이삭의 집안에서 리브가와 야곱은 모자간에 생이별의 결과만을 얻고 있습니다(28:1-5). 그러나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동일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 이삭의 집을 떠나 북부 시리아 하란 땅에서 야곱은 여호와의 축복이 무엇인지를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이방인들에게 똑똑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27.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것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30:27).

(3)  세상적으로 상당히 약은 인물이 야곱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보다 훨씬 두뇌회전이 빠른 외삼촌을 장인으로 모셨기에 20년 세월을 무지하게 고생합니다(31:7, 38-42);

 

 하지만 그 옛날 믿음의 종인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믿음의 성숙과 세상적인 형통함을 선물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동일하게 역사하십니다. 그 결과 야곱이 라반의 굴레에서 벗어나며 자신의 타고난 세상적인 운명을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극복하고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는 이스라엘로 세움을 받게 됩니다(32:28, 35:10).

넷째, 야곱을 비록 22첩이 있지만 일편단심 둘째 아내인 라헬만을 사랑합니다.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산고가 심하여 여행중에 길가에서 죽게 됩니다(35:16-19). 그때부터 야곱의 사랑은 애처 라헬의 소생에게 집중되고 있습니다(37:3). 그 결과 17세의 청소년 요셉이 부친 이스라엘의 편애만 의지하여 서모들과 이복형들에게 교만한 행동을 서슴지 아니하고 있습니다(37:2-11). 그와 같은 철부지 요셉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변화시켜 그 옛날 아브라함과 같은 이방인 선교사로 사용하시는 것일까요?

(1)  이복형들이 요셉에게 복수합니다. 그를 미디안 상단에 돈을 받고 노예로 팔아버린 것입니다(37:28). 17세의 청소년 요셉이 애굽으로 끌려와서 권력자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게 됩니다(39:1). 그때 요셉은 아버지 이스라엘 집에서 자신이 누렸던 특권과 특혜가 모조리 사라지고 이제는 언어가 다르고 문명이 다른 이방제국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2)  어떻게 하면 내일의 소망이 없는 그 자리에서 구원을 얻을 수가 있을까요? 두 가지 방법이 창세기 제39장에서 구체적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모든 것을 맡기고 오로지 기도로써 매어 달린 것입니다. 실로 당연한 신앙인의 자세이기에 그에 대한 기술이 생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절망에 빠진 요셉이 이방인의 제국 애굽에서 형통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비결이 바로 그것입니다(39:2-3). 또 하나는, 요셉이 매사 여호와의 전능하신 눈을 의식하면서 신중하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39:9). 그로 말미암아 감옥살이를 억울하게 하게 되는 불이익이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더 큰 축복을 얻게 되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3)  아버지 야곱의 집을 떠나게 하고 이방 땅 애굽에서 종살이와 옥살이를 억울하게 시킨 여호와 하나님의 목적이 과연 무엇일까요? 요셉의 고백을 통하여 창세기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창세기 모든 이야기의 결론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버지의 집과 친척이 살고 있는 익숙한 곳을 떠나 이방인 땅으로 들어가서 그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몸으로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많은 생명을 구원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만민구원의 예물을 가지고 여호와의 종이 마침내 영생의 천국에 그들과 함께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66:20-21).

다섯째로, 여호와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다윗은 어떠한 여호와신앙을 보여주고 있을까요?(13:22). 두가지 가장 특징적인 것만 예시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는, 여호와의 시험을 두차례나 통과하고 있습니다. 수년간 이스라엘왕국의 국왕 사울에게 쫓기어 도망자 생활을 근근이 영위하고 있는 다윗입니다. 그에게 은밀하게 사울 왕의 수급을 취할 수 있는 기회를 여호와께서 두번이나 제공하고 있습니다(삼상24:2-7, 26:5-12). 수하들은 얼른 사울을 해치우고 이스라엘 왕국을 차지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장군이 반대합니다. 여호와께서 기름 부은 자는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인사를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2)  사람인 자신이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왕으로 삼은 자를 사람의 뜻으로 처결해서는 안된다는 논리입니다. 한마디로, 아무리 곤궁하여도 다윗은 여호와의 종의 법도를 어기고 왕국을 찬탈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실천한 인물입니다. 그와 같은 신실한 종의 자세가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입니다(13:22).

(3)  또 하나는, 여호와의 축복으로 이스라엘 12지파의 왕이 된 다윗은 거대한 이스라엘 제국을 거의 완성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요단강 동편 암몬 왕국에 대한 정복전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암몬의 수도인 랍바 성만 얻게 되면 이스라엘 제국이 건설됩니다. 바로 그때에 다윗왕이 랍바 성 공략을 개인적으로 조카인 사령관 요압에게 맡겨 놓고 자신은 예루살렘 왕궁에서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실한 여호와의 종의 모습이 아닙니다. 벌써 세상적인 제국의 황제가 거들먹거리는 태도에 불과합니다.

(4)  그 순간 다윗왕은 부하 장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의 벗은 몸을 우연히 보게 되고 그녀를 왕궁으로 불러서 간음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삼하11:4). 그리고 충신 우리야를 랍바 성 공략의 선봉장으로 세워서 고의로 죽게 만들고 있습니다(삼하11:15-17). 그것은 명백한 살인죄입니다. 다윗은 비록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했지만 제국의 황제 자리에 있기 때문에 왕자무치의 특권을 지닌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에 따라 일벌백계의 정죄를 받아야 할 죄인이 도리어 무도하고도 불법한 처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5)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다윗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십니다(삼하12:7-10). 그 결과 다윗은 자신이 남은 평생 죄인의 모습으로 그것도 칼날 위에서 징벌을 받는 모습으로 살게 될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의 위대한 점은 일단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다음에는 그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징벌을 달게 받은 것입니다;

 

 두차례의 왕자의 난과 베나민 지파의 반란사건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죄악의 깊이를 새삼 발견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끝까지 참회하고 있는 정직한 다윗 왕입니다. 비록 세상적인 제국의 황제이지만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똑같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믿음의 사람이 바로 다윗왕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선지자 이사야가 종말로 이 세상이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며 새 예루살렘성이 이 세상에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65:17-18). 그렇다면,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서 영생의 복락을 누릴 자가 과연 누구일까요?

그 대답이 성경말씀이 끝나기 전 요한계시록 제3장과 제21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3:20-22),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21:1-2).

한마디로, 영생의 천국입성을 소망하면서 한평생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세상에 전파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3:21, 21:26-27). 그들은 현세주의자들이 이기주의와 집단적 이기주의에 사로잡혀서 한평생 살아가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신앙인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을 마태복음 제1장 첫머리에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족보에서 찾아보라고 은근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 숨은 뜻은 하나님 경외자 아브라함의 믿음을 계승하는 한편 세상왕국을 얻는 것보다는 여호와의 뜻과 말씀을 청종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고 있는 다윗의 믿음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종의 그리스도의 믿음 곧 여호와신앙의 뿌리입니다(11:1-2).

그러한 믿음을 승계하게 되면 천국에서 주님은 물론 믿음의 선진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만날 수 있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8:10-13);

 

아무쪼록 마태복음 제1장 제1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믿음의 선조들의 행적을 참조하여 여호와의 신실한 종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한평생 헌신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모두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