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믿음의 정의와 관련하여(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12. 7. 12:10

제목; “믿음의 정의와 관련하여”(11:1-4)

설교일; 주후 20211212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127일 화요일 작성)

 

흔히 히브리서 제11장을 이름하여 믿음의 장(, chapter)’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와 믿음생활에 전념했던 선진들의 사례가 그 장()에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제11장 제1절에 과연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11:1). 그렇지만 막상 그 구절의 뜻이 무엇인지를 한번 정확하게 풀이하여 설명을 해보라고 하면 막막합니다;

그만큼 믿음이란 한마디로 정의하기에도 그리고 일단 잘 정의가 되어 있다는 그 구절을 이해하기에도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믿음이란 사람의 눈으로 확실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역사할 때에 비로소 영적인 눈이 떠져서 마음속으로 확신할 수가 있는 그러한 성격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초대교회 시대에 익명의 히브리서의 저자가 그 문제를 두고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모세오경을 비롯한 히브리정경에 기록되어 있는 믿음의 선진들의 생애를 참조하여 그들이 얻었던 믿음의 증거들을 나름대로 설명함으로써 제1절 믿음의 정의를 보다 쉽게 이해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한 그의 의도가 벌써 제2절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11:1-2);

 

그와 같은 맥락에서 히브리서 제11장에 실려 있는 긴 40절의 말씀을 전부 공부하고 그 의미를 묵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하여야 제1절에 기록되어 있는 믿음의 정의에 관하여 보다 생생한 이해를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저는 무려 40절에 이르는 그 모든 구절을 강해 설교할 시간이 없습니다.

따라서 부득이 히브리서 제11장의 첫머리에 기록되어 있는 구절 곧 제1-4절만 가지고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한번 제 나름대로 자세하게 말씀을 드려보고자 합니다. 아울러 구절 설명에서 파생하고 있는 메시지를 함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증거,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11:1-2);

(1)  사람들이 소망하고 바라는 것들이 실재(實在, 실제로 존재함)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하면 알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원칙적으로 그 소원이 성취가 되어야 비로소 확인할 수가 있는 것들입니다. 물론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그 시점은 현재가 아니고 미래입니다. 따라서 현재라는 시간대만을 살아가고 있는 피조물인 사람의 입장에서는 당장 무엇을 소망할지라도 필수적으로 일정한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자신의 소원이 성취가 되는 미래를 마주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녕 현재의 시점에서는 미래에 달성되고 있는 그것을 전혀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것일까요? 그 유일한 방법을 히브리서의 저자는 여기서 한마디로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1:1a).

(2)  그런데 여기서 히브리서의 저자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 곧 실상이라는 말 때문에 두가지의 큰 이슈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보이는 세계를 허상으로 동시에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실상인 본질의 세계로 개념 규정하고 있는 헬라의 영지주의와 비교할 때 히브리사상에서 출발하고 있는 기독교사상이 과연 무엇이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얻을 수 없는 것들을 마치 유토피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설명과 그것은 착각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는 기독교사상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3)  먼저 첫번째 이슈를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첫째, 초대교회 시대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세상은 물질적으로 현존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허상의 세계이다. 실상의 세계는 따로 존재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세계이다. 보이지 아니하는 그 실상의 세계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 허상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둘째, 그와 같은 영지주의자들의 견해는 사람이 살고 있는 피조세계와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살고 계시는 보이지 아니하는 천국을 분리하여 생각하는데 있어서 참으로 편리한 도구입니다. 따라서 초대교회 시대에 그 도구를 유용한 설명의 틀로 사용하자 그리스도의 복음이 영지주의 관념을 가지고 있는 헬라 사람들에게 빠른 속도로 널리 퍼져 나가게 됩니다;

(4)  셋째,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그와 같은 영지주의 방식에 의거한 복음 설명이 큰 부작용을 초래하고 맙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니골라 당의 폐해입니다(2:6, 6:5). 그것은 퇴폐적인 쾌락주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육체적인 쾌락을 정당화하고 있는 그들의 설명이 이러합니다; “영은 유익하지만 육은 무익하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지니고 있던 더러운 육을 벗어버리고 영혼만이 깨끗하게 천국으로 돌아가서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므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마음껏 육체적으로 향락을 누리며 아무리 악하게 살아도 자신의 영혼이 영생의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는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이다”;

(5)  넷째, 사도 바울의 설명과 같이 복음주의는 육체적인 쾌락주의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올바로 전파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제자 답게 영육 간에 거룩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범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 복음에 장애물이 되지 아니하도록 거룩한 인생을 살아가는 이른바 성화의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구원을 이루고 많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방편이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6)  다음은 공산주의자들의 사고방식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사람이 바라는 것들은 자신이 이룩할 수가 없는 것들을 마치 미래의 유토피아에 존재하는 것처럼 상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므로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이며 허깨비와 같은 것일 뿐이다는 것이 유물론자인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입니다;

 

 과연 기독교가 그러한 허무한 실상을 추구하고 있는 종교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그 점을 기독교는 창세기 제1장에서부터 설명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살고 있는 물적인 세계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든 것이다(1:1).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 세상을 아름답게 그리고 주인의 뜻에 맞게 경영이 되도록 역사를 섭리하고 계신다(1:31)”.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은 여호와의 청지기로서 당연히 주인의 뜻을 파악하고자 영적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과 소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 생활이며 동시에 올바른 영성 생활입니다.

(7)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11:1b)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히브리정경을 믿고 있는 선민 이스라엘 사람들은 창세기 제1장 제1절의 기록에 따라 여호와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있으며 제2절에 의거하여 우주의 바깥에 여호와의 처소인 천국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과의 영원한 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4:6a). 그러나 사도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복음은 그 정도만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시고 또한 천국으로 올라가시는 놀라운 소통의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4:6b).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이 세상에 탄생하여 복음사역을 하시고 스스로 만민구원을 위한 대속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고전15:3). 그리고 3일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여 영의 몸을 입으시고 40일후에 승천하여 천국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고전15:4-8, 22-28).

(8)  또한 사도 바울은 보혜사 성령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성도들의 심령속에 성전을 만들고 지금도 복음사역을 위하여 내주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4:6c, 고전6:19).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31체 하나님이 기독교 복음의 주인공입니다(4:5). 그와 같은 측면에서 성도들이 자신의 심령속에 임재하여 계시는 31체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통하여 믿음을 강화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9)  히브리서의 저자는 유대인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동족인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친절하게도 제2절 말씀을 덧붙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11:2). 신약성경이 완성되어 있지 아니한 시절이므로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구약인 히브리경전에서 영생의 구원과 믿음생활의 비결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슈도 그 해답을 히브리경전에서 먼저 찾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방법은 구약을 하나의 풍성한 사례집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어떠한 여호와신앙을 지니고 믿음생활을 했던가 하는 점을 살펴보는 것이 믿음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손쉬운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의 증거를 히브리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믿음의 선진들에게서 발견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제4절의 말씀을 강해하면서 다시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둘째로,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11:3); 사람이 믿음을 지니고 있는지 아닌지를 금방 식별할 수 있는 방법이 여기서 가장 알기 쉽게 제시가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주인이 인간이냐? 아니면 하나님이냐?를 물어보고 그 대답을 들어보면 단번에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만든 창조주가 살아 계시며 지금도 이 세상의 역사를 섭리하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는 유신론자이며 신앙생활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주인이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에 자신도 주인의 말씀의 뜻을 따라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신실하게 살아갈 때에 그는 믿음을 지닌 자입니다.

그와 반대로, 이 세상을 무주물(無主物, 주인이 없는 물건)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무신론자이며 믿음이 없는 자들입니다. 설혹 창조주가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버려버리고 떠나 버렸기에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차지하고 지배하는 자가 새로운 주인이 되는 법입니다. 한마디로, 만민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피의 역사만이 나타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와 약간 성격은 다르지만 색다른 주장을 하는 범신론적인 유물론자들이 역사 가운데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태초에 위대한 에너지나 우월한 영적인 법칙 또는 원리가 존재하여 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그 원리나 영적인 지식을 깨닫고 습득하게 되면 득도를 하여 스스로 신이 되거나 철학왕이 되어 이 세상을 보다 낫게 통치하며 어리석은 백성들을 계도할 수가 있다는 견해입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헬라의 영지주의, 인도의 브라만 사상, 불교의 해탈, 그리고 도교의 득도사상 등을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일종의 자력적인 구원사상이라고 부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그것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기 위하여 창조주가 인간을 찾아와서 진리를 깨닫게 하고 믿는 자에게 영생의 부활을 약속하여 주는 타력 구원적인 기독교사상(3:20)과는 전혀 다른 것들입니다.

셋째로,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11:4);

(1)   창세기 제4장 첫머리의 말씀을 읽다가 고개를 갸웃할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에 대해서는 퇴짜를 놓으셨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히브리서의 저자는 본문에서 그 이유를 두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아벨이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기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11:4a). 반면에 가인은 믿음으로 제물을 드리지 아니했기에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받지 아니하셨다는 설명입니다. 또 하나는, 믿음으로 바친 그 제물을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고 있는 예물이라고 증언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11:4b). 마지막으로 히브리서의 저자는 한가지 말씀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벨이 이 세상에서 짧은 생을 마치고 죽었지만 그가 믿음으로 바친 그 예물로 말미암아 지금도 믿음이 무엇이며 그것으로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는지를 많은 사람들에게 밝히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11:4c). 이제 항목을 달리하여 차례로 설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2)   첫째, 아벨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더 나은 제물을 바쳤다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여기서 말하고 있는 믿음이란 두가지의 인식의 기초 위에 서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하나님께 바치고 있는 제물이 사실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것이기에 그 소유주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1:21).  그와 같은 인식을 가지고 제물을 바치고자 하는 자가 아벨과 같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한 인식이 전혀 없는 자가 가인과 같은 불신앙의 인물입니다. 또 하나는, 어느 것을 바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것의 본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결정하고 시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보기에 좋은 대로 골라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인본주의적인 생각에 불과합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의 의사를 무시하고 종이 주인의 뜻을 모두 통달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제멋대로 사고하며 함부로 조치하는 교만한 행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예를 제멋대로 제사를 드리고 전투에 임한 사울 왕의 경우에서 생생하게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삼상13:8-14).   

(3)   둘째, 아벨이 믿음으로 바친 그 제물을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고 있는 예물이라고 달리 말씀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모세오경에서는 흠이 없는 제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3:6). 그런데 대선지서 이사야에 오게 되면 그 말미에서 이방인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그들을 여호와신앙인으로 삼아 하나님께 예물로 올려드리는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복음사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66:20).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시게 되면 더이상 가축을 제물로 삼아 속죄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 대신에 영원한 대속의 제물이신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고서 그 제자로 신실하게 살아감으로써 이방인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그러한 예물을 준비하는 성도의 삶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거룩한 산 제물의 삶이며 진정한 예물인 예배인생인 것입니다(12:1-2).

(4)   셋째, 형 가인에 의하여 살해를 당한 아벨이 어떻게 하여 오늘날에도 믿음이 무엇인가를 많은 사람에게 설명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의 삶이 인생의 전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름하여 현세주의자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가르침은 그와 다릅니다. 부활과 영생이 성경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구약의 욥기 제19장에서 기이하게도 욥이 메시아를 바라는 자신의 믿음과 부활하여 여호와를 뵙게 되는 영광을 진술하고 있습니다(19:23-27). 그리고 출애굽기 제3장에서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이름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모세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3:15-16). 신약으로 오게 되면 더 분명합니다; 이미 이 세상을 떠난 모세와 엘리야가 변화산상에서 주님의 옆에 나타나서 대화를 나누고 있기 때문입니다(17:1-3);

 

 그리고 예수님께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모두 영생의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 있음을 밝히 말씀하고 계십니다(8:11).

(5)   이제는 창세기에 등장하고 있는 믿음의 4대 곧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발견하고 있는 여호와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간략하게 말씀 드림으로써 믿음에 대한 정의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소나마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1)    아브람은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을 믿고서 부친 데라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할 수 있는 장남의 권리를 포기한 채 변방 가나안 땅으로 오로지 여호와신앙을 전파하기 위하여 떠나온 사람입니다(12:1-4);

 

 그러나 십년이 되어도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하는 축복의 언약 제1조도 실현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헤브론 땅에서 호족으로 잘 살게 된 아브람이 가신 가운데 젊은 다메섹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아 편안하게 여생을 지내고자 합니다(15:2-3).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반대를 하십니다. 그리고 또다시 축복의 언약이 반드시 성취가 될 것이라고 강조하십니다(15:4-5). 그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고 있으며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의로움의 근거로 삼으셨다고 창세기에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15:6).

2)    여기서 하나님의 칭의를 얻고 있는 믿음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었다는 의미와 더불어 그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신뢰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시작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 약속이 피조물인 인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신 창조의 능력에 의하여 반드시 이 세상에서 실현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의심하지 아니하고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정확한 믿음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기에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자들의 믿음의 조상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4:11-13).

3)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약속의 아들인 이삭은 모리아 산에서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비록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명하셨지만 그 진의는 인신제사를 원하는 것이 결코 아니고 오로지 아브라함과 이삭이 자신들의 가장 귀중한 것을 여호와의 뜻에 따라 인생 가운데 바칠 수 있는지를 알고자 그들을 시험한 것입니다(22:1, 12, 삼상2:30). 그 시험에 아브라함과 이삭이 통과하자 그들에게 숫양을 친히 하사하여 번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22:13-14).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대속자 그리스도를 주시고 또한 하나님 경외자로 한평생 살아가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부활과 영생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11:19);

 

4)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공통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의 태를 닫기도 하시고 열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러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와 같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아브라함 부부가 이민생활을 하고 있던 그랄 땅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20:17-18). 그리고 사라의 불임을 치료하고 아브라함 부부를 회춘시켜 그들의 합방으로 약속의 아들 이삭을 생산하도록 만들기도 하십니다(18:10-14, 21:1-7). 뿐만 아니라 이삭의 아내인 리브가의 불임을 치료하여 쌍둥이 아들을 생산하게 하십니다(25:21-26). 야곱의 경우에는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불임이었으나 하나님의 돌아보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치유가 되어 요셉과 베냐민을 낳게 됩니다(30:22-24). 그와 같은 역사를 통하여 그들 3대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확실하게 믿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같이 이 땅에서의 하나님 경외의 삶을 마치고 헤브론 막벨라 굴에 들어가서 훗날 그리스도를 만나 영생의 천국으로 들어가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49:29-33, 11:16).

5)    마지막으로 요셉의 경우에는 17세가 될 때까지 부친 이스라엘의 총애만 믿고서 서모와 이복형들을 얕보면서 교만하게 행동하고 있습니다(37:2-11). 그러나 이복형들의 보복으로 말미암아 이방의 제국 애굽으로 끌려가서 종살이와 감옥살이를 하게 됨으로써 그때부터 오로지 전능하신 여호와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올바로 처신하는 믿음의 청년으로 변화합니다. 그것이 요셉의 형통의 비밀입니다(39:1-9). 그와 같은 믿음의 사람 요셉을 사용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7년 연속 흉년 가운데 애굽제국은 물론 그 주변의 많은 나라와 족속들을 구원하십니다. 따라서 창세기를 끝내면서 요셉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부친 이스라엘의 위대한 믿음 곧 창조주 여호와께 돌아가 영생의 복을 누리겠다고 하는 생각을 그 아들 요셉이 계승하고 있습니다(50:24-25, 11:16).

결론적으로, 히브리서 저자가 기록하고 있는 모세에 대한 한 대목을 말씀드리면서 결론을 맺어보고자 합니다;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11:24-26);

요컨대, 믿음의 요소를 히브리서 저자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첫째, 세상적인 영광을 누리는 것보다는 많은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원하여 천국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며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섬기는 믿음 생활입니다(24).

둘째, 악한 세상에서 복음의 말씀을 전파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실천하는 것은 한마디로 고난의 삶입니다(25). 그러나 그 고난을 감수할 때에 하나님의 상급이 주어지는 것입니다(26).

셋째,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그렇게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면 그리스도가 얻은 부활과 영생이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성도들이 그대로 얻게 될 것입니다(22:28-30, 3:10-16). 그와 같은 진리를 의심하지 아니하고 믿는 것이 바로 성도의 믿음인 것입니다(14:16-20).

그러므로 아무쪼록 히브리서의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그 믿음의 요소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감으로써 우리 모두 부활과 영생의 기쁨을 하나님의 전에서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