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골고다 언덕에서 모리아 산을 바라보다(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11. 16. 10:12

제목골고다 언덕에서 모리아 산을 바라보다”(본문말씀; 22:6-14) (참고구절들; 3:24, 대하3:1, 27:33-36, 2:19-22, 12:1, 19:20-21, 21:22)

설교일; 주후 20211121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1116일 화요일)

 

주전 1,011년경 이스라엘 왕국의 초대 왕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80세의 나이로 길보아 산에서 죽게 됩니다(삼상31:4-5). 세자인 요나단 뿐만 아니라 두 왕자마저 길보아 산에서 전사하고 맙니다(삼상31:2, 6). 군사령관 아브넬은 전장에서 탈출하여 후방의 왕궁에 있는 막내 왕자 이스보셋을 데리고 요단 강을 건너가 군 요새지 마하나임에서 이스라엘 왕국을 재건합니다(삼하2:8-9).

그러자 사울 왕에게 쫓겨 오랜 세월 도피생활을 하고 있던 정적 다윗이 헤브론으로 돌아와 자신의 지파인 유다의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삼하2:4). 그때로부터 7년반의 세월이 지나자 이스라엘 12지파가 의견을 통일하여 다윗을 전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고 있습니다(삼하5:3-5);

 

헤브론의 위치가 가나안 남부에 치우쳐 있으므로 다윗 왕은 이스라엘왕국의 수도를 그 북쪽으로 옮기고자 합니다. 따라서 여부스 족속이 차지하고 있던 천혜의 요새지 시온산성을 정복하여 그곳에 다윗의 성을 건설하고 천도를 단행합니다(삼하5:7, 9).

그로 말미암아 헤브론에서 75리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평균고도 해발 780미터의 산지 시온이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도성이 된 것입니다. 주전 1,003년경 그때부터 다윗의 성이 있는 그 높고도 넓은 분지 예루살렘이 다윗왕조의 수도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의 구조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다윗의 성이 있는 시온산성은 예루살렘의 동남쪽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훗날 솔로몬 왕이 궁궐을 증축하면서 그 북쪽으로 뻗어 나가게 됩니다(왕상9:10);

(2)  솔로몬 왕이 왕궁을 증축하기 전에 모리아 산성전을 먼저 짓고 있습니다. 그 위치가 예루살렘의 동북면입니다. 모리아 산은 그 옛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의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역사적인 장소입니다(22:1-2). 약속의 아들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지 알고자 한 그 어려운 시험을 아브라함이 통과하였기에 그를 하나님 경외자로 삼고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 모리아 산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3)  예루살렘의 동편에 모리아 산이 있고 그곳에 솔로몬의 성전이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한다면(대하3:1) 그 맞은 편 서쪽에는 골고다 언덕이 있습니다(27:33-35). 주후 32년경 예수 그리스도가 골고다 언덕에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운명하시며 그 언덕 중턱의 무덤에서 3일 후에 부활하시는 놀라운 역사가 전개 됩니다(27:59-60, 28:2-10);

 

그와 같은 지리적인 사실에 유의하면서 이제부터 골고다 언덕에서 모리아 산을 바라보게 되면 어떠한 성경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가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선민 이스라엘의 여호와신앙은 그 중심이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그 이유는 그곳에 성막이 있으며 지성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는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25:22, 삼하6:12-19, 왕상9:3). 그러므로 매년 유대인 종교 달력으로 710일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속죄제물의 피를 뿌리며 백성들의 죄사함을 간구하게 되면 죄를 용서한다는 여호와의 신탁을 얻게 됩니다(16:29-34). 그에 따라 창조주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를 그들 선민 이스라엘 자손만이 독점적으로 누리고 있습니다.

둘째, 율법에 따른 속죄의 제사를 모리아 산 솔로몬의 성전에서 여호와께 드리고 있으므로 말미암아 선민들의 생각으로는 그와 같은 성전제사가 없는 이방인들은 여호와의 진노로 멸망을 당하고 오로지 선민인 자신들만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위 선민만의 구원 사상이며 선민 우월 사상입니다. 그와 같은 폐쇄적인 사상은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하나같이 살리고자 하시는 창조주 여호와의 공의의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가 됩니다. 따라서 역사 가운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여 유대 땅에 오셔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그 잘못을 지적하십니다. 그 뜻깊은 장소가 성전이 있는 모리아 산의 맞은 편에 자리를 잡고 있는 골고다 언덕인 것입니다.

셋째, 환언하자면 모리아 산 성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선민 이스라엘 민족의 여호와 하나님 독점사상이 그 맞은 편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자신의 몸을 대속의 제물로 바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로 말미암아 깨어지고 맙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골고다 언덕 중턱에 자리를 잡고 있는 부자의 무덤에 들어가신  예수님이 3일만에 아버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힘입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죄 많은 육신을 벗고 영생의 몸을 입으시고 부활하셔서 40일 후에 감람산에서 승천하십니다(24:50-51, 1:9-11). 그리고 제자들에게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하나님 뜻을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과 함께 온세상에 전파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28:18-20, 24:44-49, 1:8).  

넷째, 그와 같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의미를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 제2장에서 다음과 같이 알기 쉽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다 하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19-22). 한마디로, 하나님의 역사섭리가 모리아 산의 성전 제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골고다 언덕에서 발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사건으로 말미암아 만민을 구원하는 새 언약 복음 시대로 전개되고 있음을 밝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믿는 자의 시선이 마냥 모리아 산의 예루살렘 성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복음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의 성도들은 골고다 언덕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하면서 사도 바울의 지적과 같이 자신의 거듭난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의 인생을 살아가야만 합니다(12:1).

그와 같은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면 사도 요한이 성경의 마지막에 기록하고 있는 계시록 제21장의 말씀 한 대목을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21:22).

그와 같은 시각을 가지고 이제부터 창세기 제22장에 실려 있는 아브라함의 일대기 곧 모리아 산의 기록을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 본문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한 구절 씩 풀이하면서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22:6-8);

(1)  속죄의 제사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이 번제입니다(22:6a). 그것은 제물의 머리와 4(, 다리나 팔을 말함)를 먼저 절단하고 장작 불 위에서 전부 태워서 그 향기를 여호와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1:6-9);

 

 만약 제물이 번제단에 비하여 크다면 그 몸통을 쪼개어 제단에 올려 한꺼번에 태워야 합니다. 자신을 대신하여 속죄물을 그와 같이 번제단에서 남김없이 전부 태워서 드리며 죄사함을 소원하고 있기에 그것이 진정한 속죄의 제사가 됩니다;

 

 달리 말하자면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면서 이제부터는 남은 인생을 오로지 여호와의 뜻을 실천하는 신실한 종으로 살아가겠다고 하는 중대한 결심을 하면서 그와 같이 가축을 제물로 삼아 번제로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제사의 원형을 본문 곧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 제사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22:9-10).

(2)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여 약속의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물로 바치고자 합니다(22:3-6). 그는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두려운 시험이라는 사실을 사전에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22:1-2). 창세기 앞부분을 살펴보면, 창조주 여호와께서는 피조물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계십니다. 특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가 되어 있는 만물의 영장인 사람의 생명을 더욱 귀하게 보호하십니다(1:26-27, 9:6). 그러므로 짐승이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 경우에는 쳐죽이고 마십니다(9:5a). 나아가서 사람이 타인의 생명을 해친 경우에도 죽음으로 그 죄값을 치루도록 되어 있습니다(9:5b-6). 따라서 사람을 번제물로 바치는 그와 같은 인신제사는 창조주 여호와의 뜻이 아닙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과연 영생의 하나님을 믿고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아들을 바치는 진정한 하나님 경외자인지를 파악하기 위하여 모리아 산으로 약속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가서 번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22:12). 그것은 다음과 같이 실로 엄청난 시험입니다(22:1);

1)    훗날 대제사장 엘리에게 말씀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 같은 맥락의 것입니다; “30.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2:30). 과연 아브라함이 자신의 가문과 선지자의 후사를 이어갈 약속의 아들 이삭을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는 그러한 대단한 믿음을 보여줄 수가 있는 것일까요? 여호와 앞에 영생을 얻고자 현세적인 희망의 끈을 전부 내어 놓을 수가 있을까요?

2)    돌이켜보면, 브엘세바에서 사철 푸른 에셀나무를 심고서 영생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영생의 구원을 달라고 부르짖은 자가 아브라함입니다(21:33). 그 옛날 아담의 아들인 이 자신의 장남의 이름을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을 가진 연약한 인간이라는 의미로 에노스라고 부르면서 함께 창조주 여호와께 영생을 달라고 소원하고 있습니다(4:26);

 

 그와 같은 대단한 소원을 믿음으로 부르짖고 있는 인물이 여기서는 아브라함입니다. 과연 그가 셋과 같은 믿음의 소유자인 것일까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차제에 그 점을 한번 확인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3)    훗날 히브리서의 저자는 당시 아브라함의 믿음의 실체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습니다;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11:17-19). 한마디로, 여호와께서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창조의 능력을 지니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아브라함이 철석같이 믿었기에 자신의 아들 이삭을 감히 번제물로 바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4)    그 점은 족장시대 이방인이면서 여호와의 제사장인 욥의 부활신앙에서도 다음과 같이 엿볼 수가 있습니다;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19:25-26). 대속자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도가 죽은 다음에 영생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벌써 가르쳐주고 있는 놀라운 욥의 영적인 깨달음입니다;

 

(4)  번제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장작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아들 이삭이 지고서 평균고도 해발 780미터나 되는 가파른 산 모리아로 올라가고 있습니다(22:6a). 그로 미루어 보아 이삭의 나이가 17세 정도 되는 청년으로 보입니다. 사람을 태울 수 있는 장작의 양이므로 그 무게가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당시 부친 아브라함의 나이는 117세나 됩니다. 노인이므로 그는 가벼운 불과 칼 만을 소지하고서 등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22:6b). 여기서 불과 칼의 의미가 무엇인지 성경말씀을 통하여 간략하게 알아보겠습니다;

1)    불과 칼이 성경말씀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하고 있는 대목이 창세기 제3장 끝부분입니다;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3:24). 불과 칼이 하나로 되어 있을 때에 그것은 침입하는 모든 자를 죽일 수 있는 막강한 무기가 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천사에게 주어 여호와께서는 실락원의 아담부부나 그들의 후손들이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동산으로 들어오는 것을 물리적으로 막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영생을 얻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방법을 고안하지 아니하시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2)    히브리서 저자가 이미 말하고 있는 그대로 영생이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연약한 육신을 벗고서 영생의 몸을 입게 되는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11:19). 그것은 욥의 영적인 깨달음에 비추어 보더라도 같은 의미입니다(19:26). 동시에 욥은 대속자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9:25). 그와 같은 대속자 그리스도를 앙망하는 욥의 신앙이 벌써 아브라함에게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이해를 하고 보면 사도 요한이 그의 계시록 말미에 기록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전투장면이 죄와 사망의 권세를 자랑하고 있는 사탄의 세력을 불과 칼로 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은 못에 던져지고, 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19:20-21);

3)    훗날 사도 바울의 설명을 참조하면 성령의 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고 있습니다(6:17). 그리고 교회의 역사서인 사도행전에 비추어보면 은 성령님의 능력을 의미하고 있습니다(2:2-4).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의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악한 영들을 물리치면서 온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며 그리스도의 제자를 양성하여 함께 영생의 천국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5)  17세나 되는 청년 이삭이기에 부친 아브라함의 행동이 상당히 이상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들이 준비하여 높은 모리아 산으로 운반하고 있는 것들이 모두 번제를 바치는데 필요한 물건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필요한 제물이 없습니다. 아무도 살지 아니하는 황량한 산에서 어떻게 제물을 구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혹시 그 제물이 이삭 자신이 아닐까요? 의심이 든 이삭이 부친에게 그 점을 묻고 있습니다(22:7). 그런데 영리한 이삭의 질문에 대하여 부친 아브라함의 대답은 너무나 엉뚱한 것입니다;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22:8). 그것은 여호와 이레의 깊은 신앙심을 한 자락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렇지만 여호와께서 스스로 대속물을 준비하여 주시지 아니하신다면 꼼짝 없이 약속의 아들 이삭이 번제물이 되고 말 운명입니다. 그 점을 생각하면서 아브라함이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청년 이삭도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침묵할 따름입니다.  

둘째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 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22:9-12);

 

(1)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대속물을 주셔서 자신의 아들 이삭을 살려 주시지 아니하시면 이삭을 번제로 바칠 것이고 그때에는 죽은 이삭을 여호와께서는 창조주의 능력으로 부활시켜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장작 위에 누워있는 이삭의 목을 칼로 내리치고자 합니다. 그렇게 결행하고 있는 아브라함은 무서운 사람입니다. 더 무서운 사람은 자신보다 힘이 약한 노인 아브라함이 이삭 자신을 결박하여 제물로 바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아니하고 순종으로 일관하고 있는 이삭입니다. 여기서 이삭의 믿음은 무엇일까요? 그 점을 알기 위해서는 이삭의 탄생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2)  이삭은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는 이 세상에 태어날 수가 없는 아들입니다. 왜냐하면, 99세의 노인 아브라함과 89세의 부인 그것도 평생 불임이었던 여성 사라가 합방을 하여 출산한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주의 능력으로 사라의 불임을 치료하는 한편 그들 노부부에게 회춘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에 아들 이삭이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훗날 불임여성 라헬의 고백 그대로 이삭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난 약속의 아들입니다; “22.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2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30:22-23).

(3)  이삭이야 말로 사람의 아들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창조주의 능력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점을 부친 아브라함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바 있는 약속의 아들 이삭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을 자신에게 바치라고 하명하시는데 그 말씀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 점을 철저하게 믿고서 부활과 영생의 은혜를 구하면서 번제의 제사를 계속하고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모습을 천국에서 지켜 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얼마나 급하게 조치를 취하시는지 모릅니다. 천사를 보내어 하늘에서부터 우선 음성으로 칼을 내리치고 있는 아브라함을 먼저 막으라고 조치하신 것입니다;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 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말라”(22:10-12a).  

(4)  그 자리에서 천사가 하나님의 선지자 아브라함에게 여호와의 명령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22:12b). 그것은 하나님의 어려운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였으므로 이제부터는 하나님 경외자로서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인류최초로 하나님 경외자로서 성경에 그 이름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훗날 사도 바울이 아브라함을 모든 인류의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확실한 근거가 있는 지적이라고 하겠습니다;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4:18).  

셋째로,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22:13-14);

(1)  사람의 눈은 앞부분 얼굴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뒷면을 보자면 거울을 이용하거나 아니면 일부러 고개를 돌려야만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브라함이 천사가 내려오고 있는 윗쪽을 바라보다가 다음 순간 뒤를 돌아다보고서 수풀에 그 뿔이 걸려 있는 숫양 한 마리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22:13a);

 

 그 말씀은 은연중에 천사가 뒤를 가리키고 있기에 아브라함이 천사를 올려다보던 그 눈길을 거두어서 뒤를 돌아다보고서 그 숫양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뜻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2)  그 숫양을 천사가 가리킨 뜻이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이삭 대신 그 숫양을 번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 있는 인간을 제물로 사용하지 아니하신다고 하는 귀한 교훈을 다시 일깨워주고 있는 생생한 장면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훗날 여호와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사람을 제물로 사용하지 아니하시고 그 대신에 자신의 아들인 독생자를 이 세상에 사람의 아들 곧 인자(人子)로 태어나게 하셔서 대신 십자가의 제물로 삼고 계시는 것입니다.

(3)  그와 같은 여호와 이레의 뜻이 아브라함의 영적인 체험으로 다음과 같이 본문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22:13b-14). 요컨대,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종교적인 노력과 헌신이 집중되어 있는 솔로몬 성전이 자리잡고 있는 모리아 산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몸을 바쳐 인류구원을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 제사를 드린 골고다 언덕을 중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선민들의 성전이 자리를 잡고 있는 모리아 산은 율법에 따른 제례의식의 본산입니다. 매년 대속죄일에 가축을 번제물로 바치고 그 피를 지성소의 성물에 뿌리게 되면 일년동안 지은 모든 백성들의 죄를 용서한다는 신탁의 말씀을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율법과 제례의식 그리고 모리아 산의 성전을 보유하고 있는 선민 이스라엘 만의 특권이라고 여겨질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은 언제 어디에서 실현이 되고 있을까요? 그 해답이 모리아 산 맞은 편 골고다 언덕에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에서 발견이 되고 있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영원한 제물로 이 세상에 오신 대속자 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돌아가시고 3일만에 그 중턱의 무덤에서 부활하십니다. 그것도 썩어지는 육신을 벗고 영생의 새로운 영적인 몸을 입으시고 부활하셨기에 그대로 40일 후에 감람산에서 승천하십니다.

그와 같은 부활과 영생을 장차 제자들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으로 진리의 성령님을 보내어 주십니다(14:16-20, 26-27).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그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생각하면서 한평생 주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제자의 삶을 신실하게 살아가게 되면 주님께서 얻으신 그 부활과 천국입성의 은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22:28-30).   

그와 같은 새 언약 복음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면서 이제는 모리아 산에 세워져 있는 성전과 그것을 닮아 있는 교회의 역할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영생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와 주님의 부활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전과 교회의 기능을 정확하게 파악하자면 모리아 산이 아니라 골고다 언덕에서 그곳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복음의 관점에서 자신의 신앙생활과 성전의 의미를 다시 음미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풍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