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기름 부음 받은 왕 나기드가 범하기 쉬운 실수 4가지(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11. 9. 10:27

제목; “기름 부음 받은 왕 나기드가 범하기 쉬운 실수 4가지”(28:1-10)

설교일; 주후 2021 11 14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119일 화요일 작성)

 

선민 이스라엘 사회에서 왕을 멜렉(מֶ֛לֶךְ)이라고 부르고(삼상8:5) 여왕을 말카(מַֽלְכַּת)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왕상10:1). 여기서 두 용어 곧 멜렉말카는 전부 통치하다(מֹלֶ֥כֶת)에서 온 말입니다(왕하11:3).

그런데 오늘의 본문 제2절을 살펴보면 선지자 에스겔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동족들에게 전하면서 두로의 왕을 특이하게 두로의 나기드’(לִנְגִ֨יד צֹ֜ר)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28:2). 그것은 제12절에서 두로의 왕을 두로의 멜렉(מֶ֣לֶךְ צֹ֑ור)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과는 다른 표현입니다;

 

나기드’(נְגִ֨יד)라고 하는 용어는 선민사회에서 백성들의 지도자라고 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부친은 왕이 아니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당사자가 백성들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고 마침내 왕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경우에 사용되고 있는 신위적인 용어인 것입니다.

그 점을 엿볼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가 구약 말씀 곧 히브리정경 가운데 다음과 같습니다;

(1)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선지자 사무엘이 베냐민 출신 사울에게 이스라엘의 지도자이며 초대왕으로 삼는다는 의미로 기름을 붓고 있습니다; “16.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사람을 네게로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נָגִיד֙ 나기드)로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았노라 하셨더니”(삼상9:16), “1.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נָגִֽיד)로 삼지 아니하셨느냐”(삼상10:1). 여기서 나기드’(נָגִֽיד)는 여호와께서 직접 세우시는 백성들의 통치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2)  사울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행동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새로운 왕을 세우고자 하십니다. 그 점을 선지자 사무엘이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14. 지금은 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נָגִיד֙ 나기드)로 삼으셨느니라 하고”(삼상13:14). 그 자가 바로 청년 장군 다윗임을 유다의 백성인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30.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נָגִ֖יד)로 세우실 때에”(삼상25:30);

 

(3)  여호와 하나님께서 독생자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새로운 왕으로 보내신다는 사실을 선지자 다니엘이 증거할 때에 바로 나기드라고 하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נָגִ֔יד 통치자)이 일어나기까지 7이레와 62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26. 62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נָגִ֤יד 통치자)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9:25-26).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들의 통치자에게 선지자가 기름을 붓는다는 뜻입니다.

이상과 같이 세속의 통치자인 왕 곧 멜렉과 구별되는 것이 또다른 히브리어 나기드의 개념입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신의 백성들의 지도자 또는 통치자로 세우게 되는 새로운 형태의 왕을 의미하고 있으므로 나기드를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이나 사울 왕의 혈통이 아니면서 하나님의 뜻으로 그 뒤를 잇게 되는 다윗 왕에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나기드라고 하는 용어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만민의 왕으로 세움을 받게 되는 그리스도에게 사용되고 있는 고귀한 용어입니다;

 

 그런데 그 용어를 오늘의 본문말씀에서는 선지자 에스겔이 두로의 왕에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두로의 왕의 사례를 가지고 왕과 같은 제사장인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역사적인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벧전2:9). 두로의 왕이 자신을 부유한 해상왕국 두로의 통치자로 발령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세상적인 성공과 형통함에 젖어서 다음과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1)  영적인 실수; 자신을 감히 신()이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2)  지적인 실수; 세상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3)  재정적인 실수; 세상적인 부유함으로 형통의 복을 얻었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4)  선민적인 실수; 두로의 왕은 마치 육체적인 할례를 자랑하고 마음속의 할례를 잊어버린 선민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왕 같은 제사장인 성도들도 마찬가지의 위험에 빠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벧전2:9).

요컨대, 그와 같이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는 두로 왕의 모습을 보면서 영적인 교훈을 얻으라는 말씀입니다;

  선지자 에스겔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두로의 왕은 그 엄청난 특권과 부를 가지고 한 세상 방탕하게 그리고 교만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왕국인 두로의 백성들도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동일한 죄악을 범하고 맙니다.  

그에 따라 철옹성 두로 왕국이 신()바벨론제국의 황제인 느부갓네살(재위 주전 605-562)의 갈대아 군대의 침공에 13년간이나 저항합니다. 그렇지만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가 침입하자 결국에는 주전 332년에 처참하게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깊이 생각하면서 성도들은 옷깃을 여미고 여호와 앞에 겸손한 종으로 끝까지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생각하면서 이제부터 본문말씀을 한 구절 씩 풀이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도출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거늘, 3. 네가 다니엘보다 지혜로워서 (창조주 하나님의) 은밀한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 없다 하고”(28:1-3);

(1)  1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라고 선지자 에스겔이 기록하고 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환상 중에 자신을 찾아와서 계시의 말씀을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와 같이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일찍이 창세기 제15장 첫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모세가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After this,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Abram in a vision, NIV)”(15:1a). 그와 같은 맥락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천국에서 관장하시던 독생자께서 이 세상에 성육신하셔서 인격적으로 제자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가르쳐 주셨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11:27, 1:14, 8:28).

(2)  2절 첫머리에서 인자’(人子, son of man)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두가지 경우에 사용하고 있는 용어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지칭하여 부르실 때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 세상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미에서 스스로 인자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비록 천국에서 독생자의 영광을 지니고 계시지만 피조세계에 오시기 위하여 인간의 아들로 태어나셨기에 공생애 기간 중 여호와의 종이라는 뜻으로 자신을 그와 같이 낮추신 것입니다.

(3)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에스겔에게 특별히 두로의 왕에 대하여 예언의 말씀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예언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에스겔이 두로를 방문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에게 그 말씀을 전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두로 왕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은 선민과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는 두로의 왕을 비유하여 도대체 어떠한 예언의 말씀을 가르쳐주고 계시는 것일까요? 이제부터 그 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4)  가장 먼저 본문에서 두로의 왕을 특이하게도 두로의 멜렉으로 표현하지 아니하고 두로의 나기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28:2b). 이미 모두(冒頭, 글의 첫머리)에서 설명을 드린 바와 같이 히브리어로 멜렉은 세속적인 왕입니다. 따라서 멜렉은 부왕으로부터 왕좌를 승계하거나 아니면 반역을 통하여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와 달리 나기드는 여호와께서 뜻이 계셔서 백성 중의 하나를 지도자로 삼으시고 그를 통치자의 자리에 나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18:18).

(5)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는 초대 왕 사울이나 제2대 왕 다윗의 경우가 그러합니다(삼상9:16, 10:1, 13:14, 25:30). 그리고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고 있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가 또한 그러합니다(9:25-26, 3:16-17). 그들은 하나같이 혈통적인 승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른 특별한 계승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에 합당한 자가 바로 왕과 같은 제사장인 성도들이라고 하겠습니다(벧전2:9). 그러한 입장을 헤아리게 되면 두로의 왕에 관한 에스겔의 경고의 말씀이 바로 성도들에게 주고 있는 교훈임을 확연하게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6)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두로의 왕이 된 나기드가 여호와의 말씀의 뜻을 어기고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점을 이제부터 선지자 에스겔이 여호와의 말씀의 계시를 받아서 구체적으로 지적하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잘못을 본문 제2절과 제3절에서 거론하고 있는데 그것이 영적인 교만입니다. 교만의 작태가 구체적으로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스스로 자신을 신격화하여 ’(אֵ֔ל)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28:2c). 일종의 정치적인 우상화 작업입니다. 그것은 애굽의 황제인 바로가 자신을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7)  또 하나는, 선지자 다니엘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의 말씀만을 받아서 그것을 풀이하여 주는데 그쳤지만 두로 왕은 그것이 아니라 스스로 신의 계시를 발할 수 있는 신적인 지혜자라는 주장입니다(28:3). 그와 같은 주장은 자신을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그 보좌를 높이고자 시도한 그 옛날 타락한 천사장 루시엘과 동일한 패역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14:12-15);

 

 따라서 두로의 왕은 멀지 아니하여 여호와의 역사섭리로 말미암아 처참한 죽임을 당할 것이며 역사적으로 그의 왕국은 주전 332년경 마침내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28:8).   

둘째로, “4.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과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5. 네 큰 지혜와 네 무역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말미암아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 6.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 하였으니, 7. 그런즉 내가 이방인 곧 여러 나라의 강포한 자를 거느리고 와서 너를 치리니, 그들이 칼을 빼어 네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치며, 네 영화를 더럽히며, 8. 또 너를 구덩이에 빠뜨려서 너를 바다 가운데에서 죽임을 당한 자의 죽음같이 바다 가운데에서 죽게 할지라”(28:4-8); 본문에서는 두로 왕의 두가지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가 지적인 교만입니다. 또 하나가 재정적인 자랑입니다.

(1)  첫째, 역사적으로 두로 사람들이 육지에서 800미터나 떨어져 있는 바위섬에 철옹성을 건설하고 그곳에서 출발하여 지중해 끝까지 해상무역을 영위하여 부유한 두로 왕국을 형성한 것을 보면 그들의 지혜가 남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상업적인 이익을 얻기 위하여 자신들의 선박으로 애굽의 곡물을 운반하여 지중해 연안도시에 팔았으며 메소포타미아의 선진문물과 기술을 지중해와 홍해 그리고 인도양의 여러 나라에 수출하였습니다. 자연히 페니키아 문명의 중심지가 되고 있는 두로 성은 세상의 물정에 밝고 지식과 지혜에 뛰어난 인물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번성한 해상왕국을 건설한 자신들의 지혜와 지식을 자랑할 만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지혜와 명철함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세상적인 자랑에만 빠져 있는 잘못된 행태인 것입니다(28:4-5a).

(2)  둘째, 지혜가 있다고 하지만 두로의 왕과 상인들이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상적으로 자신들의 부유함을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기 때문입니다(28:5b). 그 결과 중근동의 제국들이 군사력으로 두로의 부를 얻고자 계속 침입하고 있습니다(28:7);

 

 역사적으로 앗수르의 군대와 신바벨론의 군대가 대거 침입하였지만 육지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 바위섬 두로 성이므로 그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그러나 헬라의 군대가 알렉산더 대왕의 명령으로 연육교와 비슷하게 800미터 거리에 폭 60미터의 방파제를 건설하여 쳐들어오는지라 그것만은 막아낼 수가 없게 됩니다. 그 결과 부유한 두로 성이 그만 패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고 맙니다;

(3)  본문에서 선지자 에스겔은 두로 사람들의 지적인 교만과 부자의 자랑이 결국은 영적인 교만함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쉽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4.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과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5. 네 큰 지혜와 네 무역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말미암아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 6.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 하였으니”(28:4-6). 그 결과 그들은 영적인 교만에 빠져서 황금을 우상으로 섬기고 재물과 세상적인 지혜가 자신들의 안전을 책임져줄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4)  그래서 그런지 두로 성에 무역기지를 두고 있는 페니키아의 상인들이 아세라와 같은 아름다운 우상을 조각하여 예술품으로 여러 나라에 팔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중해 연안에 많은 식민지를 개척하여 안전하게 자신들의 재물을 분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세상적인 형통함과 안전보장이 알렉산더 대왕의 전략과 그 군대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한순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그 뒤를 이은 여러 제국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페니키아의 두로 왕국은 결코 그 옛날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점을 선지자 에스겔이 다음과 같이 애가를 지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7. 그런즉 내가 이방인 곧 여러 나라의 강포한 자를 거느리고 와서 너를 치리니, 그들이 칼을 빼어 네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치며, 네 영화를 더럽히며, 8. 또 너를 구덩이에 빠뜨려서 너를 바다 가운데에서 죽임을 당한 자의 죽음같이 바다 가운데에서 죽게 할지라”(28:7-8).

셋째로, “9. 네가 너를 죽이는 자 앞에서도 내가 하나님이라고 말하겠느냐? 너를 치는 자들 앞에서 사람일 뿐이요 신이 아니라. 10. 네가 이방인의 손에서 죽기를 할례 받지 않은 자의 죽음 같이 하리니, 내가 말하였음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셨다 하라”(28:9-10); 여호와를 섬긴다고 하는 선민이나 성도들이 범하기 쉬운 잘못이나 실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선지자 에스겔이 본문에서 다시 한번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두가지입니다;

(1)  하나는, 한갓 피조물이며 여호와의 종에 불과한 선민이나 성도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조금 깨닫게 되었다고 하여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면서 스스로 하나님인 체 처신하는 것입니다(28:9). 그와 같은 잘못을 범하는 자는 선민이거나 성도이거나 상관없이 모조리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28:10).

(2)  또 하나는, 눈에 보이는 성전과 육체적인 할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정경을 가지고 종교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그것만으로 세상의 형통함과 안전보장을 모두 얻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부활신앙으로 얻게 되는 새로운 성전, 심령속에 성령님을 모셔 들이는 마음의 할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실천하는 삶이 있어야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16:24, 28:18-20, 2:18-22, 4:23-24, 22:28-30);

 

(3)  그러므로 육신적이고도 세상적인 선민의 삶을 닮아 있는 두로 성의 왕과 주민들은 하나같이 여호와의 역사섭리로 멸망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28:10). 요컨대, 선민적인 교만함을 버리고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을 실천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이 두로의 멸망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베드로가 적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옛날 부유한 해상왕국 두로의 왕과 같이 지적인 교만과 세상적인 자랑에 빠져서 그만 영적인 교만의 죄를 범하기가 쉽습니다;

더구나 육체적인 할례를 자랑하다가 멸망을 당한 선민들의 어리석음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성도들은 두로 왕의 실수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자신의 잘못을 교정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본문의 말씀을 자주 묵상하시면서 자신의 신앙의 상태를 재점검하시는 은혜가 풍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