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모리아 산과 영원한 처소 모나이(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10. 19. 08:46

제목; “모리아 산과 영원한 처소 모나이”(14:1-9) (참고구절; 22:12, 34:4, 11:16, 26, 21:22)

설교일; 주후 20211024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1019일 화요일 작성)

 

저는 아직 초등학교에도 다니지 아니하고 있던 시절 곧 동네 꼬마였을 때의 기억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골목에서 동무들과 함께 뛰놀고 있으면 반드시 누군가 집에서 저를 부르려고 옵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님이 계신 그 집으로 불리어가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되고 저녁이면 잠도 자게 됩니다.

어린 시절에는 저를 집으로 부르려고 온 자가 식구 중의 한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보니 이제는 저를 부르려고 오는 자가 그 옛날의 식구 중의 한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식사를 하거나 잠을 자기 위하여 돌아가고 있는 집이 그 옛날 부모님의 집이 아니며 어린 시절 함께 식사하던 형제들이 있는 그곳이 아닙니다.

지금은 아내와 자식이 있는 그곳이 제가 매일 돌아가서 거처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좀더 시간이 지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아내와 자식이 있는 그 집으로 제가 돌아갈 수가 있는 것일까요? 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가능할지 몰라도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때에는 누가 나를 부르려고 올 것이며 내가 영원히 돌아가야만 하는 그곳이 어디일까요? 혹자는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며 더 이상 돌아갈 처소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러한 것일까요?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이 아닌 것만 같습니다.

그 이유는 인생의 허무함을 절실하게 표현하고 있는 지혜의 대왕 솔로몬의 글 한 대목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곳으로 가거니와, 21.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3:20-21);

 

인생만사가 다 허무하지마는 한가지 허무하지 아니한 것이 있다고 솔로몬왕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창조한 그 분 곧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 인간의 생명이 돌아가도록 결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민족은 오랜 옛날부터 한결같이 이구동성으로 사람이 죽으면 반드시 돌아가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육신을 주신 조상께로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철이 들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이 아닙니다. 육신을 벗고 이 세상을 떠나는 처지이므로 내가 돌아갈 곳은 더 이상 육신을 주신 조상이 아니라 나의 육신을 움직일 수 있는 생명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것이 정답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뛰놀고 있는 나를 이제 때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고 부르려고 오는 그 분이 과연 누구일까요? 그 분은 그 옛날 어린 시절에 나를 부르려고 온 식구가 아닙니다. 그리고 철이 들어서 내가 찾아 들어가고 있는 나의 집의 구성원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우리 모두 이 땅에서의 집을 더 이상 찾아서 들어가지 못하는 운명을 멀지 아니하여 하나같이 맞이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성경말씀 본문은 내가 돌아가야 할 영원한 집과 그 집에서 나를 부르려고 온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과연 어떠한 것일까요? 이제부터 본문의 구절을 자세하게 살펴보면서 함께 말씀을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4:1-3);

(1)  사랑하는 처자식과 친지를 이 세상에 남겨두고 혼자서 먼 길을 떠나야만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입니다. 정처가 없는 그 길을 나 홀로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면 다음 4가지의 걱정 때문에 쉽게 눈을 감을 수가 없습니다;

 

첫째, 비록 인생의 동반자와 반려자가 있지만 이제는 함께 손을 잡고 끝까지 남은 길을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 세상에 남겨진 사랑하는 자들의 앞날이 참으로 걱정입니다. 나를 대신하여 이제 누가 그들의 안위를 책임져 줄 수가 있을까요? 셋째, 죽음 다음의 길은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생소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미지의 그 세계로 나 혼자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넷째, 그 목적지가 내가 꿈꾸고 있던 이상향이 아니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러한 근심에 싸여 있는 인생에게 주고 있는 예수님의 분명한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가 너의 영원한 거처를 마련하기 위하여 먼저 간다. 다시 와서 너희들을 인도하여 반드시 아버지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할 것이다”(14:1-3요약).

(2)  본문을 헬라어로 살펴보게 되면 한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집에서 성도들을 위하여 마련하시는 거처가 모나이’(μοναὶ)인데 그것은 머무는 장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 뜻은 성도가 소천하여 영생의 아버지 하나님 집에 돌아가게 되면 언제나 그곳 모나이에 머물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곳에서 사역을 하더라도 다시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영생의 천국 그곳에서 성도인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사명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의 다음 설명이 실로 압권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8:18-22). 성도들은 이 땅에서도 복음사역을 하고 천국에 가서도 만유의 생명을 살리는 복음사역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얻게 되는 그 영생의 복락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전에 있는 그 거처 모나이’(μοναὶ)입니다;

(3)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로 성경의 처음은 창세기이며 그것이 성경 전체의 입문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신앙고백과 그 실천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21:33, 22:12). 그리고 창세기를 비롯한 모세오경을 기록하고 있는 모세의 경우를 제5경 신명기 마지막 장에서 살펴보게 되면 본문과 관련하여 더욱 생생한 교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34:4-6). 이제부터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로 유한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던 아브라함이 갑자기 브엘세바에서 에셀나무를 심고 영생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21:33). 브엘세바로 자신을 찾아온 블레셋의 연맹왕인 아비멜렉과 불가침 평화조약을 대등하게 체결하고 난 그 다음날 아브라함이 그와 같이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일찍이 아버지 데라가 머물고 있는 땅 북부 시리아의 하란을 떠나서 미지의 선교지 가나안으로 들어올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이 예언 그대로 실현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이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12:1-3);

1)   무자식이었던 아브라함이 서장자 이스마엘에 이어 약속의 아들 이삭까지 얻고 있습니다(16:15-16, 21:1-4).

2)   블레셋의 연맹왕 아비멜렉과 대등하게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자리에 이르고 있습니다(21:25-27);

3)   애굽과 블레셋의 땅에서 아내 사라를 빼앗기는 두번의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때마다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되찾고 있습니다(12:17-20, 20:7, 14).

4)   아비멜렉의 고백을 통하여 아브라함을 선대한 이방 땅에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고 있다는 사실이 증거되고 있습니다(21:22-23).

(4)  둘째, 아브라함이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에게 부디 영생을 달라고 위대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면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과연 아브라함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자신의 것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일까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점을 한번 알아보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약속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와서 그를 번제로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라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22:1-2). 그런데 놀랍게도 그 어려운 시험을 아브라함이 통과하고 있습니다. 아들 이삭을 바치고자 칼로 그 목을 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보고서 여호와께서는 급히 천사를 보내어 말리시면서 숫양을 대신 바치도록 제물을 마련하여 주십니다(22:10-14);

 

1)   그것은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먼저 주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1:29).

2)   그리고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가장 귀중한 것을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이 있을 때에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하는 귀한 교훈을 시사하고 있습니다(삼상2:29-30).

3)   훗날 히브리서의 저자는 아브라함이 부활과 영생을 주시는 창조주 여호와를 믿었기에 그와 같은 믿음을 선보일 수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1:19). 그와 같은 맥락에서 아브라함은 피조물의 생명을 돌보며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을 벌써 알았기에 인신제사를 결코 원하지 아니하시는 줄 알고서 모리아 산으로 올라간 것으로 짐작이 되는 것입니다.

4)   참고로, 훗날 모리아 산에 예루살렘성전이 건축되고 있습니다(대하3:1).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은 성전에서 속죄의 제사를 드리면서 의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독특한 선민의 지위가 그곳 예루살렘성전에서 부여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오로지 아버지 하나님의 집에서만 자신의 영원한 거처를 마련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제 모리아 산의 예루살렘성전이 아니라 영생의 천국에 마련되어 있는 자신의 모나이를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영위하여야 합니다(계21:22-27).

(5)  셋째, 모세는 80세에 여호와의 부름을 받아 출애굽의 지도자가 되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소원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해방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무사히 함께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소원은 마지막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그만 가데스 바네아에서 자신을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분노함으로 말미암아 그의 형 아론과 더불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20:10-12). 그후 모세가 여러 번 기도하였지만 여호와의 답변은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입니다(3:23-29). 따라서 모세는 죽기 전에 높은 느보 봉우리에 올라 그 서편에 전개되고 있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본 후에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34:1-6). 그때 모세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이미 가나안 땅이 아닙니다. 그가 희구하고 있는 진짜 약속의 땅 천성으로 들어가기를 소원하면서 눈을 감은 것으로 해석이 되어지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히브리서의 저자가 믿음의 장 제11장에서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11:16, 26);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모세가 궁극적으로 얻은 그 영생의 상급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그와 동일한 취지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6)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후에 아버지 하나님께 가셔서 장차 성도들이 거처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시고 다시 이 세상에 오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14:2-3). 여기서 다시 오신다고 하시는 말씀이 두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하나는, 역사의 종말에 재림하시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 성령님이 강림하실 때에 함께 성도들의 심령속에 영적으로 내주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행적을 적고 있는 사도행전의 한 대목을 참조하면 후자의 뜻이 분명히 들어 있음을 다음과 같이 알 수가 있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나하시는지라”(16:6-7);

 

 요컨대, 그 심령에 성령의 전을 가진 성도들은 그 속에서 함께 역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를 눈치챌 수가 있으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고전6:19, 8:1-15, 37-39).

둘째로,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이요, 진리,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4-6);

(1)  사도 도마의 말은 두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하나는, 도마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믿고 있습니다.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실 분이시기에 결코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할 그리스도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기 위하여 이 세상을 떠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14:4-5). 또 하나는,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다는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을 도마가 믿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죽은 자가 어디로 가게 되는지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2)  지난 36개월간 12사도와 함께 복음전파의 공생애를 지내신 예수님이십니다. 이제는 최후의 만찬도 끝나가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스승을 배신하고 대제사장의 편이 되고자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습니다(13:30-31). 이제 11명의 사도만이 만찬의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11명의 사도들이 도마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복음사역을 마친 하나님의 의로운 종이 어디로 가게 되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상세하게 다시 설명하십니다; “내가 곧 이요, 진리,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3)  간략하게 풀이를 해보자면 첫째, 생명을 창조하신 아버지 하나님께로 사람들을 인도할 자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는 언급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를 깨워서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5:28). 최후의 심판 그 자리에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아가고,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5:29). 둘째, 예수님께서 이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면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영생을 얻게 되는 그 길이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4)  셋째,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고 가르치며 실천하는 삶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하여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12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22:28-30).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8:16-17).

셋째로,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7-9);

(1)  영생의 천국이 죽음 다음에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성도들이 어떻게 알 수가 있는 것일까요? 그 사실을 정확하게 알아야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진 가장 귀중한 것과 바꿀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빌립이 예수님께 부디 그리스도의 아버지 곧 영생의 하나님 아버지를 한번 보여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14:8). 그때 예수님께서는 인자를 통하여 비로소 영의 아버지를 알 수가 있다고 대답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말씀의 성육신이신 독생자를 통하여 육신을 가진 인간은 영이신 창조주 여호와 곧 영생의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1:14).

(2)  예수님의 답변으로 미루어 볼 때 영이신 영생의 하나님을 피조물인 인간이 접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예수님의 믿음을 자신의 믿음으로 간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지 벌써 역사적으로 2천년의 세월이 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후 21세기의 성도들이 오늘날 영생의 하나님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신 주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복음을 실천하는 삶을 확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14:7, 9);

결론적으로, 우리 모두는 미래완료형의 인생을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후의 세계가 궁금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과연 이 세상의 삶을 마감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 옛날 골목에서 동무들과 뛰놀고 있는 나를 불러서 아버지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맛있는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여 주던 그 일이 앞으로는 어떻게 전개가 되는 것일까요? 본문에서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면서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그 대답을 해주고 계십니다.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후에 부활 승천하시는 주님께서는 천국에 들어가셔서 제자들을 위하여 거처를 마련하여 다시 제자들에게 오시겠다는 말씀이십니다(14:2-3). 그 거처가 제2절에서 헬라어로 모나이’(μοναὶ)입니다.

천국에서 나의 거처가 그렇게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인식할 수가 있는 것일까요? 그 점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에게 오셔서 함께 성령님 안에서 영적인 삶을 살아갈 때에 성도들이 그와 같은 믿음을 확실하게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14:3, 18).

그러므로 아무쪼록 성령님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시는 귀한 성도의 삶을 끝까지 살아가셔서 아버지 하나님의 집 그 처소에서 영생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