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간음현장에서 잡힌 여인 그녀는 누구인가(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10. 12. 12:33

제목; “간음현장에서 잡힌 여인 그녀는 누구인가?”(8:1-11)

설교일; 주후 20211017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1012일 화요일 작성)

 

흔히 제4복음서라고 부르고 있는 사도 요한의 복음서는 여러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특징을 적어보더라도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다른 복음서들이 주로 주후 60년대에 이 세상에 나왔다고 한다면 사도 요한의 복음서는 그보다 30년 정도 늦게 주후 90년대에 나타난 것입니다. 한 세대나 늦게 기록이 된 것이므로 자연히 기존의 복음서와는 달리 초대교회를 오래 돌본 사도 요한의 경륜이 하나의 학문체계를 이루어 헬라적인 신학의 입장으로 잘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이름하여 사도 요한의 독특한 로고스적인 기독론입니다(1:1-18).  

둘째, 다른 복음서들이 주후 70년 로마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과 유대의 멸망 이전의 것이라고 한다면 요한복음서는 그 이후 그것도 20년이나 시간이 더 지난 다음의 것입니다. 더구나 사도 요한이 이방의 객이 되어 소아시아 에베소에서 그 주변의 7교회를 돌보면서 작성한 복음서입니다(1:11). 따라서 이방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족 유대인들은 물론 여러 민족들을 위하여 현지실정에 맞게 저술되어 있습니다. 자연히 그 내용이 헬라 철학과 로마인의 사고방식에 비추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작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홀로 이 세상에 남겨진 막내 사도인 요한이 90세 가까운 노인이 되어 작성한 복음서입니다. 그러므로 2가지의 큰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공생애를 함께 지낸 다른 사도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으므로 사도 요한은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 남기고 싶은 복음의 진수를 최종적으로 자신의 복음서에 싣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기존의 복음서들에 빠져 있는 내용들을 우선적으로 수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늘의 강해 본문인 간음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이야기입니다(8:1-11);

기술(旣述, 이미 설명)한 여러가지 입장에서 요한복음에서만 기록이 되고 있는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심판의 이야기를 음미해보면 2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유대교인들의 율법적인 시각과는 전혀 다른 예수님의 복음적인 시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간음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깊은 묵상의 결과 그 여인이 바로 이 글을 읽고 있는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 온몸에 소름이 돋습니다. 또한 그 여인을 정죄하고 있는 자 가운데 은연중에 나 자신이 들어 있다는 사실까지 발견하게 되면 사도 바울처럼 구원주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서 자신의 허물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게 됩니다(7:24-25, 10:1-3, 딤전1:15, 8:1, 3:5-12). 

그와 같은 입장에서 이제부터 본문의 내용을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말씀을 풀이하는 과정에서 자세한 메시지를 도출하여 알기 쉽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로, “1.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니라. 2.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8:1-3);

(1)  요한복음 제7장에서부터 예수님의 마지막 공생애의 내용이 기록되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6장에 이르기까지 이미 3년의 공생애를 지내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복음사역 3년째의 가을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오셔서 4년째의 봄 유월절에 이르기까지 주로 성전에서 백성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으로 풀이하여 가르치고 계십니다(8:2).

(2)  그런데 예수님은 사도들을 데리고 언제나 하루의 일과가 끝나게 되면 예루살렘을 벗어나서 그 동편에 있는 교외지역 감람산으로 가십니다(8:1, 21:17). 예수님께서는 물가가 비싼 예루살렘 성내에서 숙박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서민들이 살고 있는 성밖의 동네 베다니에 가셔서 자신과 친한 민박집에서 숙박하시면서 경비를 절약하고 계십니다(11:1-3, 11, 10:38-42);

 

 예나 지금이나 복음사역자에게는 여행경비가 넉넉한 편이 아닙니다. 그 절약하는 모범을 주님께서 손수 보이고 계시기에 사도 바울의 설명 그대로 복음의 일꾼들은 경비가 적다고 함부로 불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4:11-13).   

(3)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른 아침에 어김없이 베다니를 출발하여 예루살렘 성내로 들어오십니다(8:2a, 21:18). 그곳 성전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들의 종교적인 명절 곧 초막절이나 유월절 등을 지내기 위하여 모여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 모인 무리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만민구원의 복음으로 일시에 선포하는 것이 복음사역에 있어서 매우 효율적입니다(8:2b). 하지만 복음을 선포한다고 하여 모두가 그것이 진정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들의 전통적인 유대교의 입장과 다르다고 생각하여 예수님의 복음을 배척하고 그를 해치고자 하는 자들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유대교인들에게 성전이나 회당에서 정기적으로 율법을 가르치고 있는 바리새인 출신 랍비들이 특히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복음에 대하여 강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오랜 세월 공부하여 가르치고 있는 모세의 율법 및 선지자들의 글의 내용과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유대교지도자들은 선민우월사상에 의거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있으며 선지자들의 예언을 다윗의 제국을 현실적으로 재건하는 메시아의 오심으로 풀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5)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선민과 이방인이 동등하다고 말씀하시면서 출신성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회개하고서 남은 인생을 아브라함처럼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중보 기도하는 신실한 여호와의 종으로 살아가야만 한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5:43-48). 동시에 선민 유대인만을 위한 제국의 건설이 아니고 만민이 영생의 구원을 얻는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8:10-13);

(6)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에게 히브리경전을 가르칠 수 있는 랍비가 되고자 어릴 때부터 율법선생인 랍비나 율법학자인 교법사의 생도가 되어 십년 이상 공부합니다(22:3). 그 결과 나이 30세가 되면 소정의 시험을 거쳐서 한사람의 랍비가 됩니다. 랍비 가운데 실력이 뛰어난 자가 산헤드린 대공회에 회원으로 가입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판결문을 작성하는 서기관이 되고 있는데 그 중 소수는 사두개인들조차 존경하는 가말리엘과 같은 교법사가 되고 있습니다(5:34).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상대하고자 의도적으로 그 적대세력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인을 그 앞으로 끌어 오고 있는 것입니다(8:3).

둘째로,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 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8:4-6);

(1)  4절 앞부분을 보면 바리새인과 유대교의 지도자인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8:4a). 그들은 예수님을 한갓 선생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결코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나 말씀의 성육신인 메시아로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신들이 충분히 예수님을 골탕 먹일 수가 있고 어려운 시험문제로 그를 함정에 빠뜨릴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고방식을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 본문입니다. 그들은 감히 간음 중에 잡힌 여인 한사람을 끌고 와서 예수님에게 모세의 율법에 따른 판결을 하라고 종용하면서 함정에 빠뜨리고자 획책하고 있는 것입니다(8:4b-5).

(2)  오랜 세월 모세의 율법을 배우고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바리새인 출신 랍비와 서기관들은 한마디로 율법에 정통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간음 중에 잡힌 사람은 백성들로부터 돌에 맞아 죽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20:10, 22:22-24). 하지만 당시는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의 치하에서 살고 있는 시절입니다. 비록 유대인들에게 종교적인 자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에 대한 처형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종교재판의 결과 돌을 던져서 죄인을 죽이는 집단행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훗날 예수님을 산헤드린 대공회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유대교의 죄인이라고 단정하면서도 돌로 쳐죽이지를 못하고 사형집행권을 보유하고 있는 로마총독에게 끌고 가는 것입니다(18:31). 반면에 집사 스데반의 경우에는 바리새인들이 격분하여 그만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만행을 벌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7:56-60);

 

(3)  간음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에게 끌고 와서 종교재판을 하라고 종용하는 것이 커다란 시험이 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8:6a) 그것은 한마디로 진퇴양난의 함정입니다. 왜냐하면 두가지로 해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1)    첫째, 모세의 율법에 따라 간음한 음녀가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이라고 판정하는 경우 바리새인들은 백성들과 함께 그녀를 돌로 쳐죽이고 그 책임을 예수님께 돌릴 것입니다. 그러면 로마총독부는 총독의 고유권한을 침범한 죄를 물어 예수님을 법정에 세우고 말 것입니다.

2)    둘째, 예수님이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음녀를 석방하는 경우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어겼다는 죄목을 나사렛 예수에게 씌우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유대인 사회에서 따돌림을 받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진퇴양난의 함정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4)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으로 백성들에게 전파하고 있는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내적인 모순이 가득한 잘못된 시험입니다. 그 이유가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바리새인들이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간음죄를 저지르게 되면 간부와 음녀를 모두 잡아서 한꺼번에 처형하도록 정확하게 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姦夫, 간음하는 사내)와 음부(淫婦, 음탕한 여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20:10). 쌍벌죄에 처한다는 규정이 재차 신명기에서 강조가 되고 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22:22);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급한 김에 간통한 여인만 잡아서 예수님 앞에 세운 것입니다.

2)    둘째, 그 여인을 고발하고 있는 자들이 어떠한 심성을 가진 백성들인지를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벌써 알고 계십니다. 창조주의 눈으로 살펴보자면 그들은 하나같이 죽어 마땅한 죄인들입니다. 적어도 두가지의 큰 범죄를 자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기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또 하나는,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는 자마다 벌써 간음죄를 범하고 있다고 하는 하나님의 판단기준을 예수님께서 이미 백성들에게 선포하셨는데 그 점을 바리새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5:27-28);

 

 그들 유대인들의 율법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외식적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멀쩡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있지만 이웃의 눈을 벗어나게 되면 제멋대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7:13-16).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외식적인 신앙의 모범을 백성들에게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마태복음 제23장에서 그토록 적나라하게 질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5)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금방 답변을 하지 아니하시고 조용히 혼자서 땅에 손가락으로 글을 쓰고 계십니다(8:6b);

 

 그 광경을 바리새인들이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강박하여 빨리 함정에 빠뜨리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처음에 예수님이 땅에 쓰신 기록이 어떠한 내용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아마도 위에서 지적한 그들의 잘못과 허물에 대한 것인데 그 점을 미련스럽게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8:7-9);

(1)  바리새인들이 계속 답변을 강요하자(8:7a) 예수님께서는 일단 땅에 글쓰기를 중단하시고 딱 한마디로 대답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8:7b). 그리고 나서 다시 땅에 글을 쓰고 계십니다(8:8);

 

 그 내용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을 짐작할 수 있는 문장이 이어서 본문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나가고”(8:9a). 예수님이 땅바닥에 쓰신 글의 내용을 그들이 읽고서 비로소 양심에 가책을 받아 현장을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글은 모세의 율법규정을 편파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한편 각 개인의 숨긴 죄악과 허물을 구체적으로 적고 계시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사람들은 무리를 이루게 되면 이기적인 집단행동이 발생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이고 선하다고 하더라도 무리가 되면 폭력적이고도 위협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바라보자면 본문의 내용은 특이한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그들의 잘못을 율법의 적용측면이나 내면적인 측면에서 기록으로 제시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그것을 무시하고 서로 눈짓을 하면서 집단행동에 나서는 경우에는 낭패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불행한 사건이 전혀 나타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이 그 현장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예수님께서 체포를 당하실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밝혀서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으로 많은 백성들에게 계속 선포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3)  그 결과 현장에서는 오직 예수님과 붙잡혀 온 가련한 여인만이 남아 있습니다(8:9b). 여기서 그 여인이 도대체 누구인가?에 대하여 성경학자들이 갑론을박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 출신 랍비와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끌고 온 그 여인이 누구일까요? 혹자는 예루살렘에서 유곽을 열어서 크게 성공한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학자는 7귀신이 들린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고 다른 여인이라고 반박하고 있습니다(눅8:2). 그런데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편파적으로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그 여인의 정체가 과연 무엇일까요? 요컨대, 사도 요한의 숨은 의도는 그 여인이 바로 그의 복음서를 읽고 있는 성도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백성들을 심판하는 자리에 있다고 종교적인 기득권을 주장하게 되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모두가 죄인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전혀 마음에 와 닿지를 아니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종교적인 집단이기주의에 의하여 계속 영위하게 될 따름입니다. 반면에 본문에 숨어 있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가 지배하게 되면 자신의 마음속에서부터 신앙 양심이 되살아나기를 시작합니다. 따라서 현장에 서 있는 그 여인이 문제가 아니고 사실은 자신이 그 자리에 서야만 하는 죄인이라는 인식이 정확하게 되살아나게 됩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의 정직한 고백을 자주 음미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7:24-25, 10:1-3, 딤전1:15, 8:1, 3:5-12);

   

  

넷째로,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8:10-11);

(1)  간음현장에서 끌려온 여인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죽임을 당할 운명입니다. 살기등등하게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성전으로 끌고 와서 당시 백성들로부터 선지자로 여김을 받고 있는 나사렛 예수 앞에 세우고 있습니다. 율법에 따라 종교재판을 시행하고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이 옳다고 바리새인들이 적극 주장하고 있습니다. 캄캄한 절망 가운데 그녀는 체념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2)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두가지 종류의 글을 손가락으로 쓰시자 그 글을 읽은 바리새인들이 늙은이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차례대로 전부 현장을 떠나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것이 어떤 내용일까요? 그 여인이 궁금하여 땅바닥의 글씨를 보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있는 동안에 음성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8:10b).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니 예수님과 자신 뿐입니다; “주여 없나이다”(8:11a);

 

(3)  흥미로운 대목은 예수님께서 벌써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에 단둘이 있을 때에 그 여인에게 질문을 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8:10a). 그것은 죄악의 청산이란 반드시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섰을 때 그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영적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자면 은밀하게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나의 죄악을 용서해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4)  그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8:11b). 모세의 율법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편파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고발은 그 효력이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반면에 인간의 죄악을 대속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판정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요5:24-29). 그 점을 알기 쉽게 말하고 있는 대목이 바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8:11ba)입니다. 그 다음에 그 여인이 구원받기를 소망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당부의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8:11bb);

(5)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 나 자신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창조주 하나님의 대속의 제사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이제는 성도로서 거듭난 삶을 살아가고자 결심하게 됩니다. 큰 은혜를 받았기에 마음 같아서는 남은 평생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로 끝까지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삶과 복음전파의 삶이 그렇게 녹록하지가 않습니다. 그 점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특별히 그녀에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완전한 처방이 아닙니다.

(6)  그 점을 이방인 사도로 살아가고 있는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7:24). 그렇다면 세상살이 가운데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게 하는 하나님의 처방이 무엇일까요? 그 점에 관하여 부활하신 주님과 훗날의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14:26-27),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람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

 

결론적으로, 율법과 복음과의 차이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 사실은 본문의 말씀입니다. 율법선생이라고 하는 바리새인 출신 랍비와 서기관들이 선민에게 유리하게 율법을 해석하고 편파적으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율법이 자신들의 내밀한 죄악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예수님께서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대목이 사실은 본문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현장에서 끌리어 온 간음여인의 정체가 사실은 내밀한 죄악을 범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나 자신임을 고백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 희생으로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여 주시면서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여전히 육신의 욕구가 더욱 강한 나 자신이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영적인 삶을 영위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설명 그대로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여 우리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신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나 자신이 거룩한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롬7:24-8:4).

이제 다시 그와 같은 복음의 본질을 이해하고서 주님의 은혜와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를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쪼록 처음부터 의인이 아니라 대속의 십자가의 은혜로 비로소 용서함을 받은 죄인이며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지금도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귀한 진리를 다시금 발견하는 깨달음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