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주님께서 가시는 그 길에 동행하기를 원하는 에스겔(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9. 28. 18:00

제목; “주님께서 가시는 그 길에 동행하기를 원하는 에스겔”(43:1-9)

설교일; 주후 2021103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928일 화요일)

 

선지자 에스겔은 무려 48장에 달하고 있는 대선지서를 기록하면서 자신의 정체를 제1장에서 먼저 다음과 같이 소상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유다 왕국의 제사장 신분이었던 에스겔이 유다 왕 여호야긴이 포로가 되어 신()바벨론제국에 끌려왔을 때에 자신도 함께 끌려왔다는 것입니다(1:2-3). 역사서를 참조하면 제2차 인질이 발생한 그때가 유다 왕국이 신바벨론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기 11년 전 곧 주전 597년경입니다(왕하24:10-18, 25:2-7);

둘째, 신바벨론제국의 중심지 갈대아 땅 그발 강가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에 자신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처음으로 임재를 했는데 그때가 인질이 된 지 545일입니다(1:2-3). 태양력으로 환산하면 제사장 에스겔이 선지자로 쓰임을 받기 시작한 때는 주전 59375일입니다. 구체적으로 유다 왕국이 멸망을 당하기 7년전입니다(왕하25:2-5);

셋째, 에스겔은 자신이 여호와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그때를 서른째 해라고 달리 표현하고 있습니다(1:1). 그 점에 관하여 조금 살펴봅니다;

(1)  그것은 주전 622년 유다 왕 요시야의 통치 18년을 기준으로 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해 성군 요시야가 성전에서 사라진 경전 신명기를 발견하고 과감하게 유대교의 갱신을 위하여 종교개혁을 시작하고 있습니다(왕하22:3-11);

(2)  역사서에 따르면, 성군 요시야가 유다 왕국을 31년간 통치합니다(왕하22:1). 그는 종교개혁을 시작한지 13년이 되는 해 곧 주전 609년에 애굽의 바로 느고의 군대를 므깃도에서 막는 도중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됩니다(왕하23:29). 그로 말미암아 후송 도중에 서거하고 왕자 여호아하스가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왕하23:29-30).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이 하나같이 여호와신앙을 떠나고 맙니다(왕하23:32, 37, 24:9, 19).

(3)  그와 같은 안타까운 현실이 서른째 해라는 용어 가운데 담기어 있다고 생각하면 제사장의 신분인 에스겔은 이국 땅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타락한 유대교의 갱신을 희구하고 있는 경건한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세기 조선의 망명객들이 이국 땅에서 민족과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역사를 생각하여 비교해보면 선지자 엘리야는 같은 처지에서 조국의 독립이 아니라 오로지 동족들을 성군 요시야의 시대처럼 여호와신앙인으로 바로 세우기 위하여 분골쇄신한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4)  혹자는 에스겔의 나이 30세가 되는 때에 그가 제사장이 되고 동시에 선지자로 세움을 받게 된 것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1:1).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제사장이라고 자신의 신분을 에스겔이 먼저 밝히고 있기 때문에(1:3) 주장의 근거가 빈약하다고 하겠습니다.  

넷째, 1장 제4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물론 제3장 제11절에 이르기까지 에스겔은 온통 자신이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으며 선지자로 세움을 받게 되었는지를 너무나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러한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당시 유배지에서 거짓선지자들이 많이 발생하여 동족인 유대인 포로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  그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같은 시대 유대 땅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신의 선지서에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보낸 너희 모든 포로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골리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그들은 내 이름으로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한 자라. 보라 내가 그들을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너희 눈 앞에서 그들을 죽일 것이라”(29:20-21).

(2)  국내외에서 거짓선지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은 하나같이 유대인들의 애국 애족정신을 일깨우고 지배민족인 신()바벨론제국을 물리치는 전쟁을 용감하게 개시하자고 하는 피 끓는 호소입니다(23:16-22). 그렇게 나 먼저 헌신하게 되면 그 일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과거 히스기야 왕 때와 같이 신위적인 능력으로 도와 주실 것이라는 열광적이고도 맹신적인 말씀입니다(왕하19:34-37, 27:14-15). 그들은 예레미야 시대의 거짓선지자 하나냐처럼 그와 같은 계시의 말씀을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들이 직접 받았다고 감히 주장하고 있습니다(28:1-4);

(3)  그러나 제사장 에스겔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직접 받은 계시의 말씀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니라.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2:7-10). 요컨대, 선민의 영광이 아니라 그와 달리 우상을 섬기는 유다에 대한 여호와의 징벌의 내용이 한가득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4)  에스겔 선지자의 글과 예레미야 선지자의 글은 동일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유다 왕국의 왕과 백성들이 모두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애굽을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기에 여호와께서는 칼과 기근과 재앙으로 선민의 나라를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란을 피하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성군 요시야의 시대처럼 종교를 개혁하고 여호와신앙을 갱신하며 느부갓네살 황제와 화친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짜 선지자의 말은 선민의식이 강하고 고집불통인 동족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맙니다.

다섯째, 마지막 선민의 나라 다윗왕조 유다 왕국이 역사 가운데 사라지고 나면 그 다음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될까요? 선지자 에스겔이 자신보다 100년이나 앞선 이사야 선지자처럼 여호와의 역사섭리를 가지고 인류역사의 종말과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다만 한가지 차이점은 이사야가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성의 창조를 예언하고 있다면(65:17-25) 에스겔은 거대한 규모의 새로운 성전과 거룩한 땅에 대한 예언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40:2-48:35). 어째서 선지자 에스겔이 새로운 예루살렘성전의 비전을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동족들에게 집중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일까요?

(2)  그 이유는 한마디로, 선민의 나라도 신바벨론제국도 그 뒤를 잇게 되는 모든 제국도 전부 역사속으로 사라지지만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빛나는 영생의 나라만이 이 세상에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인류역사의 종말을 생각하면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 세상에 건설하시는 그 영생의 나라를 소망하면서 한평생 신실한 여호와의 종으로 그리고 메시아의 제자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3)  그와 같은 맥락에서 선지자 에스겔은 더 이상 다윗왕조의 재건이나 선민의 나라의 회복을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오로지 새로운 예루살렘 곧 영생의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그 성전에 자신을 있게 해달라고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주님의 역사의 섭리에 자신을 동행하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에스겔의 입장이 잘 드러나고 있는 구절이 본문 곧 에스겔 제431-9절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구체적으로 한 구절 씩 살펴보면서 다음과 같이 주요 메시지를 도출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1.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동쪽을 향한 문이라. 2.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 3. 그 모양이 내가 본 환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보던 환상 같고, 그발 강가에서 보던 환상과도 같기로, 내가 곧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더니”(43:1-3);

(1) 선지자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 바라보고 있는 새로운 예루살렘성전에는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에 각각 출입문이 있습니다(40:20-37). 그 가운데 북문과 남문은 제사장들이 출입하고 동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만 사용하고 계십니다(42:1, 43:1-2, 44:1-2). 어째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쪽문을 사용하여 입장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창세기 제3장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3:24);

(2) 선악과를 제멋대로 따먹고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된 아담부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그 동쪽에 살게 됩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실락원(失樂園, Lost Paradise)에서부터 여호와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시는 에덴동산으로 들어가자면 반드시 동쪽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동쪽문을 엄히 지키도록 불 칼을 가진 천사들을 배치하십니다(3:24). 그에 따라 실락원의 인간들을 살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동쪽문을 통하여 에덴동산 또는 그것을 모방하고 있는 예루살렘성전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25:9, 9:24).

(3) 선지자 에스겔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쪽문을 통하여 새로운 예루살렘성전에 들어가시는 것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에스겔을 인자(人子)라고 부르시는 주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며 또한 에스겔을 데리고 성전의 동쪽문으로 함께 가신 것입니다(40:4, 43:1). 그때 동쪽문으로 입장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에스겔이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는 자신을 새로운 성전의 출입문으로 데리고 가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여호와의 영광 앞에 그 종이 되어 경배하는 심정으로 몸을 엎드리고 있는 것입니다(43:3);

(4) 에스겔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이미 경험한 영적인 체험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 체험한 여호와의 영광을 이미 선지서 앞부분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생물들이 갈 때에 내가 그 날개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와도 같으며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으며 떠드는 소리 곧 군대의 소리와도 같더니,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내렸더라”(1:24). 그와 똑 같은 경험을 동쪽문에서 다시 하고 있는 것입니다(43:3). 훗날 사도 요한이 동일한 영적인 체험을 하고서 그 내용을 계시록에 적고 있습니다(1:15, 14:2). 그와 같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선지자 에스겔이 여기서 엎드리고 있습니다(43:3). 마찬가지로 사도 요한도 주님의 발치에 엎드리고 있는 것입니다(1:17).

둘째로, 4.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5.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43:4-5);

(1) 예루살렘성전의 출입문인 동쪽문으로 입장하면 먼저 성전의 뜰이 나타납니다(43:4). 백성들이 여호와를 경배하는 바깥뜰이 있고 제사장들이 번제를 드리는 안뜰이 있습니다. 제사장 신분인 에스겔이 성령님의 인도로 안뜰에 다다르고 있습니다(43:5a). 그는 그곳에서 지성소에 좌정하시는 여호와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지성소에서부터 태양보다 더 밝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쳐 나와 온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43:5b).

(2) 그와 같은 모습을 훗날 사도 요한이 새 예루살렘성에 좌정하시는 여호와와 어린양 주님의 모습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21:22-23).

(3) 하나님의 나라 새 예루살렘성에서는 종국적으로 성전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과 주님의 영광이 성전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생의 밝은 빛 창조주의 영광이 새 예루살렘성에 입장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영생의 기쁨을 선물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6. 성전에서 내게 하는 말을 내가 듣고 있을 때에 어떤 사람이 내 곁에 서 있더라. 7.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에 영원히 있을 곳이라. 이스라엘 족속 곧 그들과 그들의 왕들이 음행하며, 죽은 왕들의 시체로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43:6-7);

(1) 성전에서 울려 나오는 여호와의 생명의 말씀을 선지자 에스겔에게 정확하게 전달해주고 있는 분이 바로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 주님이십니다. 그 분을 주전 6세기의 선지자 에스겔이 시공간을 초월한 소위 영적인 눈으로 이미 환상 가운데 바라보고 있습니다(43:6). 그렇다면, 주님께서 에스겔에게 대언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말씀의 내용이 과연 무엇일까요?

(2) 그것이 세가지입니다; 첫째, 새로운 이스라엘이 주님과 함께 영생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 옛날 선민 유대인들이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들은 자신들의 다윗왕조를 섬기는 것이 곧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잘못 믿었다는 것입니다. 선민의 나라 북조 이스라엘왕국의 이스라엘 10지파가 금송아지를 끝까지 섬겼기에 주전 722년에 앗수르제국에 의하여 먼저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왕하17:21-23);

(3) 마지막 선민의 나라 다윗왕조 유다 왕국마저 선민만의 구원과 이방인 멸시 그리고 현세적인 하나님의 축복만을 탐하다가 결국 주전 586년에 신바벨론제국에 의하여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우상을 섬기는 유대인들에게 다윗왕조의 정통성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여호와를 섬긴 왕들의 이름을 거명하여도 백성들의 구원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오로지 개개인들이 어떻게 자신의 인생 가운데 경건한 여호와의 종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신실하게 살아갔느냐 하는 것이 구원의 시금석이 될 따름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가 제7절에 듬뿍 담기어 있습니다.

넷째로, 8. 그들이 그 문지방을 내 문지방 곁에 두며, 그 문설주를 내 문설주 곁에 두어서, 그들과 나 사이에 겨우 한 담이 막히게 하였고, 또 그 행하는 가증한 일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으므로 내가 노하여 멸망시켰거니와, 9. 이제는 그들이 그 음란과 그 왕들의 시체를 내게서 멀리 제거하여 버려야 할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 가운데에 영원히 살리라”(43:8-9); 훗날 예수 그리스도가 역설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 곧 만민구원과 영생구원 그리고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에 비추어 볼 때 이 대목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이해가 됩니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선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독식하지 말고 이방인들에게 전하여 함께 구원을 얻도록 하라고 유대사회에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이 모두 영생의 구원을 얻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선민 유대인들은 그들의 유대교리에 비추어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주신 율법과 할례 그리고 속죄의 제사가 있으므로 그것으로 충분하게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2) 선민 유대인들은 어린양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비로소 얻고 있는 대속의 은혜 그 좁은 구원의 문을 사용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오로지 선민들에게만 허용이 되었다고 믿고 있는 유대교리를 쫓아 율법과 할례의 문으로 천국에 입성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할까요? 예수님의 지적과 사도 바울의 설명 그대로 그것이 불가능합니다(23:2-36, 3:20, 7:24). 창조주 하나님의 뜻인 만민구원과 모든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공의의 정신을 벗어나서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3) 한마디로 잘못된 쪽문을 버리고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그 방법만을 소망하면서 복음을 실천하는 자신의 공생애를 모두가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결단과 실천이 필요합니다; 첫째, 선민과 이방인을 구별하고 있는 인위적인 담을 헐어버려야 합니다(43:8).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선민과 이방인의 구별은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현세적인 이익과 세속적인 구원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우상을 섬기며 여호와 하나님을 우상의 하나로 여기는 잘못된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43:9a). 그것은 성결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현세 기복적인 소위 영적으로 음란한 우상숭배에 불과한 것입니다. 셋째, 선민의 족보를 자랑하는 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43:9b). 오로지 주님의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그리스도의 제자로 신실하게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역사의 종말 가운데 영생의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흔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는 자신과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주님께서 동행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더욱 왕성하게 내주 역사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을 묵상해보면 그것이 아닙니다.

선지자 에스겔이 간구하고 있는 것은 그와 180도 다른 내용입니다; 그것은 죄인인 자신과 선민들이 바라고 있는 세속적인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나 아름다운 성전의 재건으로는 결코 영생의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생의 하나님의 나라 곧 창조주의 영광이 빛나고 있는 새로운 예루살렘성을 건설하시는 주님의 역사에 나를 동행시켜 달라고 하는 기도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간구할 때에 본문에서 선지자 에스겔이 미리 바라보고 있는 천국의 영광이 바로 우리들의 거처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