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2년 손진길 목사 설교문

삭개오와 예수님과의 만남의 깊은 의미(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9. 21. 11:40

제목; “삭개오와 예수님과의 만남의 깊은 의미”(19:1-10)

설교일; 주후 2021926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921일 화요일 작성)

 

여리고 세관장 삭개오와 예수님과의 만남의 이야기는 4권의 복음서 가운데 오로지 누가복음 제19장에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공생애 36개월 동안의 행적을 의사 누가가 추적하면서 독점적으로 발굴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제1장 첫머리의 글을 읽어보고 전체내용을 음미해보면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의사 누가의 독특한 시각과 관심사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가지 시각과 관점을 가지고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복음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나름대로 파악하고자 시도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누가복음 제1장을 온전히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에게 소개하기 위하여 선지자 세례 요한을 이 세상에 먼저 태어나게 하시는 이야기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자체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교훈과 행적을 의사 누가가 직접 발로 뛰면서 취재하고 발굴하였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그가 다른 복음서에 없는 이야기를 많이 수록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살펴보아도 거지 나사로와 부자와의 비유(16:19-31), 나병환자 10명의 이야기(17:11-19),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교(18:9-14), 탕자의 비유(15:11-32), 죄인으로 여김을 받고 있는 여리고 세관장 삭개오의 이야기(19:1-10) 등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셋째, 의사 누가는 이 세상에서 소외되고 비천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소자들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돌보셨던가 하는 점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고자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더욱더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누가복음의 특징에 비추어 오늘은 제19장에 기록되어 있는 삭개오와 예수님과의 만남의 장면을 다시 한번 살펴보면서 그 깊은 의미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 1절부터 10절까지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 살펴보면서 복음적인 메시지를 도출하여 자세하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19:1-4); 다음과 같이 설명할 대목이 많은 문장입니다;

(1)  주전 15세기말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여리고성을 공략합니다. 그는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참으로 기이한 공성작전을 전개합니다(6:1-7). 일주일간 언약궤를 앞세워 여리고성의 주위를 조용히 돌다가 마지막 날 마지막 7바퀴 때에 백성들이 한꺼번에 외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성을 우리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셨다!”(6:15-16). 그 명령 그대로 실천하였더니 놀랍게도 여리고성이 붕괴되고 맙니다;

 그후 여리고 지역을 점령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남쪽 5리 지점에 새 여리고성을 건설합니다. 그러므로 주후 1세기에 예수님께서 통과하신 여리고성은 북쪽에 있는 구 여리고성과 그 다음에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남쪽의 새 여리고성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상황을 본문에서는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19:1)고 간편하게 기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여리고성의 주민들은 예수님께서 구 여리고성을 통과하실 때에 벌써 그 소문을 듣게 됩니다. 그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신 여리고성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마중하고서 그를 크게 환영하고자 합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여리고에 있는 큰 세관의 수장인 삭개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를 한번 보고자 은밀한 모험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제2절부터 제4절까지의 깊은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하나씩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3)  첫째, 2절에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다는 로마제국의 속국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크게 보아 내국세와 관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내국세는 유대 땅에서 사용이 됩니다. 그와 달리 관세는 전부 로마황제에게 바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시대이므로 내국세를 거두고 있는 세리들은 유대인들의 비난의 대상이 아니지만 관세를 거두어 로마황제에게 바치고 마는 세관원들은 민족의 반역자이며 로마의 앞잡이라고 욕을 먹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세관원들이 임의로 관세를 많이 거두어서 착복함으로써 부자로 살고 있다고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삭개오는 여리고에 설치되어 있는 큰 세관의 수장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가장 많이 동족인 유대인들의 욕을 얻어 먹고 있는 처지라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를 담아서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19:2)고 하는 구절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4)  둘째, 3절은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리고의 세관장인 삭개오가 유대인들로부터 큰 선지자이며 메시아로 불리고 있는 나사렛 예수를 한번 만나보고자 합니다. 마침 구 여리고성을 지나 신 여리고성으로 들어오시고 있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빨리 뛰어가면 그를 만나볼 수가 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하지만 그가 제대로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는 두가지 애로사항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삭개오의 키가 작다고 하는 지적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깊은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요?

1)    키가 작다고 하는 것은 두가지의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적으로 키가 작은 경우입니다. 키가 작으면 일반적으로 힘도 약합니다. 그러므로 작은 체구의 삭개오가 도로변에 운집한 많은 무리를 뚫고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무리입니다. 또 하나는, 영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작은 자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삭개오는 유대인 사회에서 죄인으로 치부가 되고 있는 세관장입니다. 따라서 그가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은 돌팔매를 맞기에 적당할 정도로 위험한 일입니다. 바야흐로 삭개오는 다른 좋은 방법을 모색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2)    만약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무리들이 평소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알고서 그것을 실천하기에 힘쓰고 있다고 한다면 삭개오가 쉽게 예수님을 만나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와 제자들에게 언제나 원수를 사랑하고 죄인을 용서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5:44-48). 그 이유는 아버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지으신 인간들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12:30-31). 요컨대, 피조물 특히 자신과 같은 인간들을 원수로 대하지 아니하고 좋은 이웃으로 선대하는 것이 참된 하나님 사랑인 것입니다(10:33-37).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있는 무리들이 그러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관원들을 미워하고 있으며 세관장 삭개오가 눈에 뜨이기만 하면 돌로 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는 무리들이 삭개오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장벽이 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이 커다란 장벽이 되어서 지역주민들이 교회에 나아오지 못하게 방해가 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차제에 커다란 회개기도의 제목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5)  셋째, 4절은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고 되어 있습니다.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그가 단지 키가 작아서 높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의 행차를 보고자 한 것일까요?(19:4) 이미 앞에서 설명 드린 바와 같이 그 이유만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관세를 거두고 있는 세리들에 대한 선민 유대인들의 시각이 너무나 좋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점을 다시 음미해봅니다;

1)   유대인들은 세관원들을 로마제국의 앞잡이이며 개라고 욕하면서 그들을 민족 반역자이며 종교적으로 죄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다분히 경제적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내국세는 세무서에서 거두어 국내적으로 사용이 되지만 관세만은 전부 로마제국에 바치고 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관원들이 유대 땅에 들어오는 물품에 대하여 관세를 많이 부과하게 되면 대표적인 소비도시인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그만큼 비싼 물건을 사서 사용해야 합니다. 게다가 그렇게 거두어들인 관세를 모조리 로마황제에게 바치고 마는 것이니 식민지 백성인 유대인들의 불만이 대단합니다.

2)   그러한 시대이므로 세관장인 삭개오가 유대인들이 많이 모여 있는 장소에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돌팔매를 맞기 십상입니다. 그렇지만 삭개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꼭 만나고 싶습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백성들의 눈이 무섭습니다. 만약 그들의 눈에 뜨이게 되면 몰매를 맞아 죽을 것만 같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서 몰래 예수님의 모습을 훔쳐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유일한 방법이 도로변에 심겨져 있는 높은 돌무화과나무에 기어 올라가는 것입니다(19:4).

3)   오늘날은 삭개오가 기어 올라간 나무의 이름을 돌무화과나무라고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옛날에는 뽕나무라고 번역했습니다;

 헬라어로 뽕나무는 슈카미노’(συκαμίνῳ, 17:6)이지만 돌무화과나무는 슈코모레안’(συκομορέαν, 19:4)입니다. 그 이름이 다르듯이 두가지는 상당히 다른 나무입니다. 뽕나무와 달리 돌무화과나무는 그 옛날 한국의 가로수 플라타너스처럼 키가 크고 가지가 옆으로 무성하게 뻗어 있어 사람이 기어올라가기에 안성맞춤입니다. 게다가 잎이 뽕나무처럼 넓어서 자신을 은닉하면서 길거리의 행차를 쉽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돌무화과나무의 특징을 생각하게 되면 단지 삭개오가 키가 작아서 높은 나무에 올라갔다고 이해하는 것보다는 그가 백성들의 위협을 피하기 위하여 나무에 기어올라갔다고 보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설명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19:5-7);

(1)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나무 위에 숨어서 자신을 보고 있는 삭개오를 보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9:5).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헬라어가 아나쁠레파스’( ἀναβλέψας)입니다. 그것은 나무 위에 있는 사람을 올려 본다고 하는 의미와 더불어 더 깊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용어입니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신분이 상대방보다 높다고 생각하면 남을 내려다보는 것이 세상의 관행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은 반대로 행동하고 계십니다. 그는 삭개오를 올려다보는 자세를 취하고 계십니다;

(2)  여기서 아나쁠레파스의 원형인 아나쁠레포는 상대방을 Look up’하는 겸손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은 여리고 세관장인 삭개오를 죄인 취급하여 멸시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아닙니다. 삭개오를 귀하게 보시고 그를 차제에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삭개오를 쳐다보고서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19:5b);

(3)  그 말씀을 들은 삭개오는 기쁨에 넘치고 있습니다(19:6). 그러나 정작 여호와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그와 정반대의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죄인인 세관장 삭개오의 집에 메시아가 왕림하시는 것이 율법에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저희들끼리 수군거리고 있습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19:7b).

셋째로,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4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8-10);

(1)  삭개오의 집에서 예수님의 구원의 복음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자칭 의인들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유대교지도자들과 선민들은 회개할 줄을 모르지만 그와 달리 선민사회에서 죄인이라고 여김을 받고 있는 세관장 삭개오의 태도는 확실한 회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맞이한 자신의 집에서 가장인 삭개오가 결단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동족들을 위하여 사용하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착취한 재물이 있다고 하면 율법이 정하고 있는 최대의 배상 곧 4배로 갚겠습니다”(19:8의역, 22:1-4);

(2)  삭개오가 감격에 겨워하면서 그와 같은 자신의 결심을 밝힐 수 있게 된 계기는 메시아 예수가 동족사회에서 죄인으로 여김을 받고 있는 자신과 같은 죄인의 집을 친히 방문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 자신을 죄인으로 취급하지 아니하셨으며 함께 먹고 마시며 구원받은 자의 기쁨을 다 함께 누리고자 하셨습니다. 그와 같은 예수님의 태도 앞에 삭개오의 응어리진 마음이 일순간에 풀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잃어버린 양이 아니며 탕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 바로 삭개오의 놀라운 선언입니다.

(3)  삭개오의 결단에 찬 선언을 듣자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그 자리에서 선포하십니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9-10).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살펴봅니다;

1)    첫째, 삭개오의 결단과 신앙고백이 그 옛날 부친의 막대한 재산에 대한 상속을 포기하고 믿음의 길을 떠난 아브라함의 결단 및 그의 여호와신앙을 닮아 있다는 것입니다(12:1-5);

 세상적인 이익과 세상사람들의 평가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아니하고 이제부터는 오로지 여호와의 종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겠다는 삭개오의 고백이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인 삭개오의 집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게 되었다고 선포하십니다(19:9).

2)    둘째, 차제에 예수님께서는 선민 유대인들의 잘못된 시각을 교정하여 주고자 하십니다. 그들의 율법에 비추어 사람들을 함부로 의인과 죄인으로 양분하는 관행을 이제는 멈추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공의의 원칙에 의하여 선민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아니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인위적으로 구별하고 있는 의인과 죄인이라는 이분법에 결코 동의하지 아니하십니다.

3)    오로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종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자를 구원하여 주십니다. 그와 같은 복음적인 시각에서 놀라운 회개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삭개오가 구원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다음과 같이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10);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1) 세상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이 상대방보다 높다면 남을 내려다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은 반대로 행동하고 계십니다. 그는 삭개오를 올려다보는 자세를 취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아나쁠레포곧 상대방을 구원의 대상으로 여기며 스스로 섬기고자 하는 자세인 Look up’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자신을 그 아래에 두고자 할 때에 비로소 겸손하게 상대방을 이해(understanding)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세상사람들은 여리고 세관장인 삭개오를 죄인 취급하여 멸시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아닙니다. 삭개오를 귀하게 보시고 그를 차제에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주님은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19:5b)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초대sovereign invitation’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인간을 의인으로 삼아 주시고 영생의 구원까지 베풀어 주시는 놀라운 창조주의 초청을 뜻하고 있습니다.

(3) 구세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와 같은 초청을 시행할 수가 있습니다. 그 은혜가 그날 회개하는 삭개오의 집에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랑하지 말고 주님을 기쁨으로 맞아 들이고 삭개오와 같이 회개하는 심정으로 결단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