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후서 OBS교재(손진길 작성)

고린도후서 제3과(2:5-3:6)(손진길 작성)

손진길 2021. 11. 22. 19:03

고린도후서 제3(2:5-3:6)(손진길 작성)

|OBS25-3|

 

Q1.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후2:1)는 말씀 가운데서 엿볼 수 있는 ①근심하게 한 자는 누구이며 ②사도 바울이 그것을 보고서도 근심에 사로잡히지 아니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며 ③어느 정도의 근심에 불과할 뿐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각각 무엇인가?

 

l  첫째로, 근심하게 한 자는 고린도 교회나 그리스 지역의 많은 교회에 있어서 바울이 전한 올바른 복음은 물론 그의 사도적 권위까지 폄하하면서 교회 내 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자들임(11:4-9, 13-15). 그들은 여전히 유대교가 강조하고 있는 율법준수를 복음의 깊은 진리성 보다 앞세우고 있거나 헬라 철학의 영육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서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구원역사를 제한적으로 해석하고 있었음. 그리고 자신들의 이론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게바와 같은 사도들의 권위 또는 아볼로와 같이 헬라 철학에 밝은 교계 지도자의 이름을 이용하고 있었음(고전1:12, 3:4).  나아가서 당초 기독교인을 탄압했던 사도 바울의 전력을 들먹이면서 그가 전한 복음의 진리성마저 의심하게 만든 자들임(고전9:1-6). 이에 따라 사도 바울이 개척했던 이방 교회 내에 분쟁이 발생하고 분파가 나타나서(고전1:11-13) 많은 교인들이 근심에 사로잡히게 된 것임.

l  둘째로, 그렇지만 사도 바울이 근심에 사로잡혀서 전전긍긍하고 있지 아니함을 여기서 말하고 있음. 그 이유는 그가 발견한 그리스도 복음 안에서의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임(1:16-17, 고전4:20). 유대교의 젊은 지도자였던 사울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 사도로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말씀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말씀을 능력과 힘으로 바꾸어 주는 성령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었음(4:4, 11, 4:1, 14, 1:17, 8:1-2).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성령의 능력을 이미 소유하고 있었기에(24:49, 1:8, 22:17, 21) 세상적인 분쟁에 근심일변도로 대응한 것이 아닌 것임. 그렇지만 이와 같이 살리는 영의 능력을(2:32-33, 7:16, 8:11) 확실하게 실감하고 있지 못한 이방 교회의 성도들은 근심에 사로잡히게 된 것임.

l  셋째로, 그들의 근심이 지배적인 것이 아니고 곧 지나갈 정도의 것임을 사도 바울이 지적하고 있음(고후2:5, “어느 정도”). 복음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기도와 간구로 영적인 삶에 힘쓰다가 보면 어느 사이엔가 성숙한 믿음의 경지에 들어서게 되고(1:17) 드디어 성령의 능력을 옷 입게 되어(1:16) 세상 근심을 극복하게 되는 소위 영생을 맛보는경지가 있음을 바울이 이미 알고 있음.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근심이란 것이 어느 정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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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2. 교회를 근심하게 하는 자, 특히 지나치게 자신의 의를 내세우고 자신의 뜻과 방법론을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함으로써 교회 내에 분쟁을 야기하고 분파를 발생시키는 자까지 용서하고 포용함으로써(2:7-8) 교회의 구성원으로 계속 받아들여야만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l  분파주의자들이 교회 내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치리(治理)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2:6)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교회 바깥으로 내쫓아서는 아니 되는 것임. 그 이유는 첫째로, 교회가 가지고 있는 속성 때문임.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1:18)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서 그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인 것임(9:13, 19:10, 3:16-17).

l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 구원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죄인과 원수 사탄과의 분리를 선언하고 있기 때문임(2:11, 7:17-24, 8:21, 9:11). 죄와 사망을 관장하고 있는 사탄을 몰아내고 인류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임(3:16-17). 그러므로 이 사실을 믿고 복음을 받아 들이는 자에게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적용됨으로써 드디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날 수가 있게 되는 것임(8:1-2, 1:12-13, 3:5)

l  그러므로 이미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있는(고전3:23)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를 다른 성도들이 비난하고 교회에서 축출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용서하고 함께 신앙 공동체 내에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임(2:7-11). 그 이유는 거룩한 성도들 역시 과거에는 그와 같은 처지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이기 때문임. 이와 같은 관점은 훗날 성 어거스틴의 교회론으로 발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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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3. 교회를 근심하게 한 자를 사도 바울은 오히려 염려하고 있는데(2:7) 그 이유는 무엇인가?

 

l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2:7)는 표현으로 미루어 보아 ①첫째로, 분란을 일으키는 자를 계속 징계하기만 할 경우에는 그 자가 회개하고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바울이 우려하고 있으며 ②둘째로, 그렇지만 성도들에게 있어서 그 자를 용서하고 위로하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아니하다는 사실을 바울이 또한 알고 있다고 볼 수 있음.

l  바울은 그 잘못 범한 성도의 상실까지 염려하고 있음. 그 이유는 그자가 바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19:10) 해당되기 때문임. 교회에서 축출당하고 길에서 헤매게 되는 양은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을 받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에 많은 근심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어두움에 삼킨 바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바울이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것임(2:7b). 그러므로 힘들더라도 성도들이 그 자를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주는 것이 영혼구원의 길이 된다는 것임.

l  그 일이 결코 쉽지 아니하기에 사도 바울은 다음을 첨언하고 있음; ①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2:9). ②주님에게 용서를 받고자 하는 자는 먼저 남을 용서하라(7:12). ③너희가 남을 용서하면 나도 너희를 용서할 것인데 그 용서는 그리스도 앞에서 효력을 발생하게 될 것이다(2:10). ④교회에서 분쟁을 일으킨 자는 주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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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4. 2차 선교여행 때 바울은 아시아 전도의 문이 닫히는 대신에 유럽 전도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16:6-15) 이제 또 다시 유럽 전도의 문이 소아시아 북서쪽 끝의 항구인 드로아에서 열리고 있음(고후2:12). 그러나 제2차 선교여행 때와는 달리 기대와 설렘 대신에 심령이 편하지 못하다고 진술하고 있음(2:13).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지역에 다시 발을 들여놓는 사도 바울의 기본적인 마음자세는(2:14-17) 무엇인가?

 

l  먼저 고린도교회와 그리스 지역 전체 교회에 파송한 바 있는 형제 디도를 소아시아에서 미리 만나서 그곳 형편을 듣지도 못한 채 유럽으로 들어서게 되는 부담감 때문이라고 하겠음(2:12-13). 이미 고린도전서를 쓰면서 바울은 디모데를 고린도교회로 보낸다는 언급을 하고 있으며(고전16:10) 이제 고린도후서를 작성하면서 디모데와 함께 고린도교회와 그리스의 성도들에게 문안인사를 하고 있음(고후1:1). 이로 미루어 보아 디모데는 그의 임무를 끝내고 진작에 바울과 합류한 것으로 보이며 바울은 그로부터 현지 사정을 상당히 들은 바 있다고 볼 수 있음. 그렇다면 바울은 다시 더 상세한 최근 소식을 듣고서 유럽 땅을 밟고자 디도를 기다리고 있는 것임. 그처럼 바울은 선교 일정과 시행에 있어서 준비가 철저하며, 특히 현지 사정의 사전 파악에 만전을 기하고 있는 것임. 그것은 미리 정확한 기도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올바른 답변을 얻고 그것을 가지고 현지에 나아가고자 하는 청지기다운 자세인 것임.

l  바울이 고린도교회와 그리스 지역의 성도들의 움직임에 대하여 신경을 쓰고 있는 구체적인 이유는 첫째로, 교회내 분쟁을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가장 적합한 처방을 내리고자 원하고 있기 때문이며(7:14) 둘째로, 정확한 이야기를 해주지 못하고 오히려 엉뚱한 이야기를 해주었을 경우 선의의 피해자들이 속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사전에 배제하고자 하며(2:1-3, 7) 셋째로, 디도 일행을 통해서 사전에 바울이 많은 모금을 요청한 바 있는데 그 결과가 어떠한지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으로 보이는 것임(고후8:20, 9:5).

l  그렇지만 기다리던 디도를 만나지 못한 채 사도 바울은 유럽 땅으로 들어서고 있음. 이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일을 맡기고서 전진할 수 밖에 없게 됨. 그 때 바울이 그리스도의 향기이야기를 믿는 자의 기본자세로서 언급하고 있음.

l  믿는 자의 기본 자세는 다음과 같음; ①우리를 선택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전쟁을 치르게 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림(2:14). ②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복음 만을 전하도록 보호해주시기에 그 말씀은 힘이 있다는 것임(2:15-16). ③말씀을 전하는 자가 오직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을 전할 때에 말씀의 혼잡이 없다는 것임(2:17). ④하나님 아버지의 파송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로지 하나님이 부탁하신 그 말씀만을 복음으로 전했다는 사실을 여기서 새삼 명심할 필요가 있음(3:17, 21, 34, 14:10, 17:7-8). ⑤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파송을 받은 그리스도인들도(17:18)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해야 하는 것임(17:17). ⑥성령님도 오직 그리스도가 전한 복음에 비추어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임(14:26, 16:13-15).

l  사족을 더하자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말씀의 취지이며 그것을 성령님도 증언하고 계신다는 사도 요한의 깨달음은 성경말씀을 바로 볼 수 있는 방법론이 되고 있음(14:9, 16:13-15, 17:8).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으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 그리고 선지자들과 성도들의 모든 영적 경험과 가르침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복음주의적 신학의 핵심이 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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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5. 고후3:1-6절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사도적 권위의 기초, 사도직에 대한 인정, 나아가서 사도성을 분별하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볼 수 있는가?

 

l  그것은 열두 사도의 추천서를 가지고 판가름하는 것이 아님(3:1). 성도들의 마음속에 어떻게 각인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바울의 설명인 것임(3:2-3). 풀이하자면, 성령께서 성도들의 마음 판에 새긴 것이기에 그 사도직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이며 사도적 권위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있는 것임. 요컨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모든 영적인 권위가 파생되고 있는 것임.

l  사도성을 분별하는 방법은 ①그리스도의 생애를 닮아 있는가?(3:4) ②자신의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서 하나님의 것을 사유화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종으로서 만족하고 있는가?(3:5) ③율법 조문을 성도들에게 강요하는 강압적인 신앙 조직의 경영자인가? 아니면 진리의 말씀으로 영적인 기쁨과 생명력을 전달해주고 있는가?(3:6) 등을 따져볼 수 있다고 사도 바울이 열거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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