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기도39(작성자; 손진길)
블레셋의 남쪽 수르광야를 지배하고 있는 아말렉족속을 뿌리뽑는 일은 쉽지가 않다. 그 이유가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첫째로, 그들은 제대로 된 도시나 촌락을 이루고 있지 아니하다. 그야말로 유목민의 삶을 영위하면서 집단적으로 다른 나라의 성읍을 약탈하는 마적단의 행태를 일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정확한 거처를 확보하여 인종 청소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가 않다.
둘째로, 상대방의 피의 보복을 그들도 두려워하고 있다. 따라서 자주 거처를 옮기고 있다;
그렇지만 지파 간에 연락망을 항상 가동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한 지파가 적의 공격을 받을 경우 그 정보를 빠른 시간에 전파하여 다른 지파의 희생을 줄이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해야 다른 지파의 지원을 받을 수가 있으며 훗날 그들이 자신들의 복수를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말렉족속을 치는 나라는 그들을 발본색원하지 못하면 훗날 그 보복에 시달리게 된다.
셋째로, 부족 간에 서로 의리를 지키고 거처를 발설하지 아니하는 것을 오랜 세월 율법으로 삼고 있다. 만약 그 의리를 저버리게 되면 다시는 아말렉족속의 영역내에서 생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넷째로, 조상대대로 강자가 약자의 것을 약탈하면서 살아왔기에 마적질이라는 것이 영웅담이지 결코 범죄행위가 아니다. 그들은 그것이 당연한 강자의 권리라고 어려서부터 배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말렉족속을 교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섯째로, 아말렉족속처럼 광야에서 힘을 숭상하면서 약탈족으로 살아가고 싶어하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들이 또다른 아말렉족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광야의 약탈자를 모두 발본색원한다고 하는 것은 제국이라고 하더라도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그와 같은 사실을 다윗왕은 체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도망자로 살아가고 있을 때에 아말렉족속의 본거지인 수르광야와 연결이 되어 있는 바란광야에서 오래 생활했기 때문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한때는 다윗장군이 블레셋에 망명하여 비옥한 그랄평야를 지키는 시글락 요새의 성주로 살았다. 그는 아말렉족속을 쳤으며 그가 성을 비웠을 때에는 그들의 보복을 받았다. 그래서 여호와께 기도하여 극적으로 약탈당한 재산과 가족을 구출해오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블레셋을 완전히 정복한 다윗왕이 차제에 남방의 골치거리인 아말렉족속을 완전히 박멸하고자 한다. 그래서 가사 성에서 제장들과 회의를 열고 있다. 다윗왕이 먼저 다음과 같이 의제를 말한다; “오늘은 어떻게 하면 남쪽 수르광야에 웅거하고 있는 아말렉족속을 모조리 없애 버릴 수가 있는지 그 묘책을 듣고 싶어요. 기탄없이 의견제시를 해주세요”.
다윗왕이 여러 장군과 장수들에게 말을 부드럽게 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지엄한 왕명이다. 그러므로 모두들 열심히 평소 구상하고 있는 탁견을 내놓기 시작한다. 먼저 작은 촌락 후사 출신의 장수인 므분내가 손을 든다. 다윗왕은 그가 발언을 요청하는 것을 처음 보기에 궁금해하면서 얼른 허락한다.
여러 장군과 장수들의 눈이 자신을 쳐다보자 므분내가 기침을 한번 한 다음에 발언한다; “아말렉족속을 박멸하자면 하나의 포위망을 먼저 형성한 다음에 그 그물안에 든 고기를 모두 잡아내듯이 그렇게 몰살을 시켜야 합니다. 그 다음에 또다른 포위망을 넓게 형성하고서 그 안의 족속을 멸하는 것이지요”;
아직도 제장들의 눈길이 자신을 향하자 므분내가 보충설명을 한다; “좁게 하나의 지파만을 박멸하는 것은 소문만 새나가게 하여 기타 지파들이 미리 몸을 피하는 부작용을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유목민이며 약탈민족인 그들은 도망을 가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기에 포위망을 먼저 넓게 펼쳐 놓아야 확실하게 잡을 수가 있지요”.
일리가 있는 견해이다. 그래서 다윗왕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맞는 말씀이요. 그렇지만 우리의 군사력으로는 수르광야 전체를 포위할 수는 없지요. 그러므로 먼저 아말렉족속이 펼쳐져 살고 있는 분포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서 하나씩 포위망을 좁혀가면서 처리를 해야 하겠군요. 그렇다면… “.
다윗왕이 요압 사령관과 그를 보좌하는 장수들에게 명령한다; “사령관의 생각으로는 척후를 보내어 그들의 현재의 분포도를 작성하는데 어느 정도의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시요?”. 요압이 즉시 대답한다; “저희들의 이번 원정이 블레셋과 아말렉을 치는 것이기에 소장이 출정을 하기 전에 부관들에게 지시하여 아말렉의 분포도를 일단 작성했습니다. 하지만… “.
다윗왕이 칭찬을 하려고 하는데 ‘하지만’이라고 하는 말이 들려온다. 그래서 궁금하여 다시 귀를 기울인다. 주도면밀한 요압 사령관의 말이 들려온다; “정밀한 지금의 분포를 알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척후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열흘의 시일이 필요합니다”.
다윗왕과 제장들이 고개를 크게 끄떡인다. 그리고 다윗왕이 기분 좋게 말한다; “역시 요압 사령관은 그 능력이 탁월하고도 신중하오. 좋습니다. 11월 20일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정보가 수합이 되는 대로 곧바로 공격에 들어갈 수 있도록 아말렉족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부터 희소한 곳으로 1, 2, 3으로 나누어서 표시를 해주세요. 그러면 11월 21일에는 제1지역부터 포위하고 공격할 것입니다”;
요압 사령관이 약속한 날 11월 20일에 새로운 분포도를 제시한다. 신기하게도 그 밀집도가 동쪽에서부터 서쪽의 순서이다. 그것을 보고서 다윗왕이 질문한다; “사령관과 제장들의 생각으로는 어째서 아말렉족속이 수르광야의 서편보다는 동편에 더 많이 살고 있는 것이요?”.
그 말에 대답을 하겠다고 손을 들고 있는 두사람의 장수가 있다. 한사람은 므분내와 고향이 같은 십브개이고 또 한사람은 아랍출신인 바아래이다(삼하23:35, 대상20:4). 다윗왕이 먼저 십브개에게 발언권을 준다.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상들이 에돔에서 쉰 다음에 애굽으로 가기 위하여 수르광야로 들어옵니다. 그때 그들을 털기 위하여 아말렉족속이 동편에 많이 살고 있지요”;
바아래가 여전히 다시 손을 든다. 그래서 다윗왕이 발언권을 준다. 그의 말이 다음과 같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아랍에서 애굽으로 가는 물동량을 약탈하기 위해서도 바란광야로 직통할 수 있는 수르의 동편이 유리합니다. 그러니 그 지역에 아말렉족속이 많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다윗왕이 결론을 내린다; “좋은 말씀들입니다. 그렇다면 내일 아침에 우리는 수르광야 동편으로 이동하여 마치 고기를 가두는 방식으로 넓게 포위망을 형성할 것입니다. 구체적인 실시계획은 요압 사령관이 작성하여 각 군단에 하달하시기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11월 21일에 다윗의 군대는 수르광야 동편으로 들어가서 넓게 포진한다. 10만명에 가까운 병력이 천라지망을 펼친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포위망을 좁히면서 아말렉의 부족을 하나씩 토벌한다. 5일만에 모조리 인종청소를 한다. 다윗왕과 신하들이 모세와 사무엘이 전한 여호와의 율법을 알고 있기에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아니한다.
참고로 그 대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출17:15-1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그들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다 하니”(삼상15:2-3).
참으로 처절한 인종청소를 의미하고 있다. 한마디로,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거나 가축이거나 모조리 없애버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움직이지 아니하는 것들은 전리품으로 얻을 수가 있다. 따라서 다윗의 군대는 열심히 포위망에 들어온 아말렉 백성들과 가축을 모조리 진멸한다. 그리고 아말렉족속이 약탈한 물건을 다시 약탈하고 있다.
다윗왕과 그의 신하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인 거룩한 이스라엘 12지파를 그들 이방족속들이 함부로 공격하고 약탈한 잘못에 대한 보응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리고 그들 아말렉족속을 모조리 멸종을 시키는 것이 전쟁의 신인 만군의 여호와의 위엄을 온세상에 드러내는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일을 5일씩 3번이나 반복하고 있는 이스라엘 군사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아니다. 전쟁에서는 항복하는 적들을 포로로 잡기도 하고 가급적 적은 살육으로 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얻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자신들은 마치 도살자와 같으며 무자비한 학살자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선민 이스라엘의 영광을 온세상에 드러내기 위하여 불가피한 전쟁이며 여호와의 뜻을 받드는 인종청소라고 하더라도 그 참상이 차마 눈뜨고는 볼 수가 없다. 그러한 인간백정으로 계속 참전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인간으로서는 할 수가 없는 천인공노할 전투를 보름간 계속하면서 다윗의 군사들이 점점 인간의 심성을 잃어가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다윗왕이 막사에서 조용하게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불가피한 전투이지만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죽여야 하는 그 살육전이 너무나 끔찍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을 실천하는 것이 때로는 이와 같이 엄청난 비극입니다. 그러므로 그 일이 빨리 마무리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다윗왕이 더 구체적인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그 일에 도구로 쓰임을 받은 우리 이스라엘의 군사들에게도 치유와 회복의 삶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 아말렉을 끝으로 하여 더 이상의 인종청소는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의 손에 너무 많은 적들의 피가 묻어 있습니다. 마치 피를 뒤집어쓴 짐승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제는 평화를 주시옵소서. 더 이상의 전쟁은 없도록 하여 주십시오”.
차마 신하들 앞에서는 내놓을 수 없는 다윗왕의 은밀한 기도의 내용이다. 그는 그러한 잔혹한 전쟁을 치른 결과 그의 부하들이 어떠한 흉물로 변할지 그것이 걱정이다. 과연 여호와의 말씀으로 치유가 될 것인가?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다윗왕은 자신과 제장들이 많은 군사들과 더불어 그러한 일에 쓰임을 받고 있다는 것이 과연 영광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저주스러운 것인지 분별하기가 힘이 든다. 개인적으로 그러한 슬픔을 억누를 수가 없는 전투가 바로 수르광야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 결과 다윗왕은 서로가 죽이지 아니하고서도 함께 잘 살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여호와께 간구하고 있다. 종국적으로 그가 훗날 깨닫고 있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서로가 죽고 죽이는 비극을 끝내고 구원의 길을 내신다는 것이다(시110:1-7).
그 방법이 무엇인지를 다윗왕은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 십자가 대속의 죽음이 아직 하나님의 비밀로 간직되어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 세상이 구원주로 오시게 되면 전쟁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시대가 시작이 된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다윗왕의 깨달음은 먼 훗날 그의 노년의 일이고 당장은 요압 사령관 이하 여러 장군들과 장수들 그리고 병사들이 경험하고 있는 그 피의 보복의 역사가 문제이다. 그렇게 피를 흠뻑 뒤집어 쓴 다윗왕의 군부와 군대가 훗날 어떠한 사건을 일으키게 되는 것일까? 장차 다윗의 일생과 더불어 그 점을 따져보지 아니할 도리가 없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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