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기도20(작성자; 손진길)
사람들은 시험을 한번 치렀다가 불합격을 하게 되면 각고의 노력을 한 후에 재시험을 통해서 구제를 받게 된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다윗장군을 한번 시험하여 그가 합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재시험을 치르고 있다. 그 이유는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주권을 여전히 존중하고 있는지를 거듭 확인하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시험을 치르는 이유는 어떤 자리를 감당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를 사전에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시험에서 합격하는 경우에 한하여 그 좋은 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무지하게 중요하고 좋은 자리인 경우에는 경쟁자가 많으며 시험문제가 그만큼 어려워진다;
지금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나라 이스라엘왕국의 차기 국왕자리를 내걸고 최종적으로 다윗장군을 시험하고 계신다. 그 시험이 1차와 2차로 나누어지고 있는데 시간적인 간격만 있을 뿐 시험문제는 동일하다. 시험의 내용은 우연처럼 가장하여 사울왕의 목을 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다윗에게 거듭 제공해보는 것이다.
그 두번의 시험은 공통적으로 다윗장군이 사울왕에게 쫓기는 도망자신세일 때에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다윗과 그의 부관들은 위험하고도 고난에 찬 피신생활을 빨리 청산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한 그들 앞에 절호의 기회가 거듭 찾아오고 있으니 어찌 그것을 마다할 수가 있을 것인가? 그것은 마치 40일간 금식을 한 나사렛 예수에게 마귀의 시험이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다(마4:1-11);
피신기간 내내 다윗장군의 호위부관을 자처하고 있는 백부장 아비새의 경우에는 그 두번의 경우에 있어서 동일하게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죄없이 사울왕에게 쫓기고 있는 사정을 아시고 여호와께서 이러한 절호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 뜻을 받아들여 사울왕의 수급을 취하시고 이스라엘왕국의 국왕으로 취임하십시오”.
처음 엔게디 광야 들염소 바위의 굴속에서 사울왕을 만났을 때에 부관 아비새가 그렇게 주장했다. 하지만 다윗장군은 극구 그의 부관을 말렸다. 그 이유가 여호와께서 기름 부은 자를 하나님의 종이 함부로 해쳐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는 여호와를 섬기는 이스라엘왕국의 국왕이 될 수가 없다는 생각을 다윗이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2년정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 십광야의 하길라 산지까지 다윗을 추격하여 밤에 진지에서 곤한 잠을 자고 있는 아브넬과 사울왕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아비새는 다윗장군을 국왕으로 만들고자 자신이 사울왕의 목을 치고 그 수급을 주군인 다윗에게 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면 다윗은 직접 자신의 손으로 사울왕의 목을 베지 아니하였으므로 손이 깨끗하지 않겠는가? 다윗은 더 이상 사울왕을 죽이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자신에게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부관 아비새가 편리하게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에 현혹이 되지 아니하고 있는 다윗장군이다. 그는 직접살인과 살인을 교사한 죄가 동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두가지 경우 모두 여호와를 섬기는 이스라엘왕국의 국왕으로는 자격미달이라고 판단하실 것임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특히 대선지자 사무엘의 뒤를 이어서 개인적으로 자신에게 영적인 도움을 주고 있는 지혜로운 아내 아비가일의 평소주장은 그런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의로운 종이 되어 이스라엘왕국을 당당하게 다스리자면 동포의 피조차 자신의 손에 묻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나발의 경우가 벌써 그러하지 아니한가?(삼상25:26, 31)
당시 다윗장군이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의 말을 듣고 자신의 분노를 거두었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대신 나발을 치신 것이 아닌가?(삼상25:38) 그러한 생각을 한 다윗장군이 즉시 부관 아비새가 칼을 빼려고 하는 것을 막는다(삼상26:9);
그리고 다윗장군이 준엄하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삼상26:10-11).
다윗이 마치 예언자와 같다. 그는 이번 시험만 통과하게 되면 여호와께서 사울왕을 직접 처리하실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 방법은 나발의 경우처럼 죽을 날이 임하게 하거나 아니면 명예스럽게 외적을 막다가 전장에서 죽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여호와의 역사섭리까지 분별하고 있는 다윗의 여호와신앙이 실로 놀랍다(삼상31:1-6);
그것으로 다윗장군은 거듭 여호와의 시험을 통과하게 된다. 이제는 시간만 지나면 이스라엘왕국의 차기 국왕이 될 것이다. 그가 여호와의 뜻을 그렇게 올바르게 분별하고 실천하는 경우에는 분명히 그러한 미래가 전개되는 것이다.
하지만 미래지사를 피조물이 어떻게 확연하게 알겠는가? 자생적인 변수와 외생적인 변수가 모두 발생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의 일생을 계속 살펴보면서 그의 기도의 제목이 무엇인지를 언제나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십광야 하길라 산지에서 그날 밤 여호와의 재시험을 통쾌하게 통과하고 있는 다윗장군의 모습을 바라보면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말에 고개를 크게 끄떡이게 된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행13:22-23).
그날 밤의 다윗장군처럼 여호와신앙을 고백하고 그 뜻을 받들어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와 같은 여호와의 종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인물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다윗에게 올바른 여호와신앙을 권면하고 있는 아비가일이 참으로 훌륭한 다윗의 아내라고 볼 수 있다;
다윗은 지난번 똑같은 경우에 있어서 사울왕의 옷자락을 살그머니 끊어간 일이 마음에 걸린다. 따라서 이번에는 부관 아비새에게 사울왕의 옷자락이 아니라 그가 사용하는 물병과 창만 가지고 나가자고 말한다. 그것이면 충분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서를 편찬하면서 저자는 그날 밤의 일이 모두 여호와의 시험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채지 못하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라”(삼상26:12).
사울왕의 진영을 벗어난 다윗장군과 그의 부관이 높은 산위에서 부르짖는다. 다윗은 특히 사울왕을 잘 지키지 못하고 있는 사령관 아브넬의 잘못에 대해서도 강하게 질책하고 있다;
그리고 증거로 가지고 나온 물병과 사울의 창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잠자고 있는 사울왕의 목을 치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러자 77세의 사울왕이 부끄러워하면서 잠자고 있던 여호와신앙을 조금이나마 회복한다. 그 증거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삼상26:21);
그러나 다윗장군은 사울왕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가 없다. 사울왕에게는 악한 영이 들락날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 악한 영에게 사로잡혀서 다윗자신을 죽이려고 할지 모른다. 그래서 결코 다윗은 사울왕에게 돌아가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확실한 결말을 맺을 때까지 피신생활을 계속하고자 한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왕의 물건을 다시 그에게 돌려준다. 그리고 오늘 자신을 박해하고 있는 사울왕의 목을 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다윗 자신을 박해하고 있는 모든 적들로부터 계속 지켜 달라고 간구하고 있다(삼상26:24). 그것은 훗날 그리스도가 밝히고 있는 여호와신앙의 황금률을 벌써 고백하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다(마7:12, 5:46);
사울왕이 다윗과 헤어지기 전에 유언과 같은 축복의 말을 전하고 있다;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삼상26:25). 그러한 축복의 말씀을 남기고 사울왕이 떠났다고 하여 다윗의 피신생활이 마감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울왕에게서 악령이 떠나가고 신앙적인 양심이 회복이 되어 있는 순간에 그가 역시 대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기름부음을 받은 그 값어치를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는 다시 권력에 대한 노욕이 커지고 욕심을 부리게 되면 악령에 사로잡혀서 정적을 함부로 해치우고 반대세력을 압제하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기본적으로 여호와의 주권과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의 주인되심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다만 자신의 권력과 기타 기득권을 유지하는 이용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는 사울왕이다. 그것이 우상문화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처결이 멀지 아니한 미래에 창조주 여호와의 역사섭리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말 것이다. 그때에는 그의 아들들이 진정한 이스라엘왕국의 후계자가 되지를 못하는 것이 명약관화하다. 만약 사울의 아들이 왕의 자리에 나아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쪼가리 왕국의 왕에 불과할 것이다.
한편 다윗장군은 그와 같은 사울왕의 겉과 속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다시 사울왕이 군대를 끌고서 다윗 자신을 추적한다면 그 때에는 피를 볼 것만 같다. 따라서 그는 그 환난을 미연에 피하고자 큰 결심을 한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왕국과 대립관계에 있는 블레셋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삼상27:1);
여러 해 전에 블레셋의 도시국가인 가드에 들어갔다가 아기스 왕의 손을 벗어나기 위하여 미치광이 노릇을 한 다윗이다. 그런데 그가 어째서 다시 블레셋으로 들어갈 모험을 감행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것은 몇가지의 의도가 있다;
첫째, 상대방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다. 블레셋 가드왕 아기스가 설마 다윗이 다시 가드로 들어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를 못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울왕도 설마 다윗이 적대국인 블레셋으로 망명할 것으로는 생각하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사울왕의 추적을 확실하게 피할 수가 있다.
둘째, 그동안 세월이 많이 지났기 때문이다. 지금 다윗의 나이가 27세이다. 그가 17세에 가드 출신 거인용사 골리앗을 쓰러뜨렸기에 벌써 10년의 세월이 지난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고 사람들의 인심도 변한다. 그러므로 가드의 백성들이 다윗의 이름을 많이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 그에 따라 아기스 왕이 홀가분하게 다윗의 망명을 수락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과연 그러한 모험에 찬 다윗장군의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 그는 가드에서 생존할 것인가? 아니면 그곳에서 살해를 당하고 말 것인가? 그리고 헤브론에 자리를 잡고 있는 그와 부관들의 가족들은 또 어떻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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