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비밀(손진길 소설)

王의 비밀12(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10. 28. 02:09

王의 비밀12(작성자; 손진길)

 

서우진은 개경에서 두 달 머물면서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 이유는 지난번에 개마고원 일대를 탐사하면서 자신이 여진말을 많이 모르기 때문에 중요한 고비마다 애령이의 통역을 받느라고 그녀를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장차 여진족과 함께 나라를 세우자면 서우진 자신이 여진의 말과 글에 능통해야만 한다.

따라서 서우진이 만사를 젖혀 두고서 여진말과 글을 배우기에 힘쓰고 있다. 하루에 한 시진 여진추장의 딸인 애령에게서 배우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서우진은 아예 통째로 외우고 있다. 대단한 암기력과 이해력 그리고 응용력을 두루 지닌 인물이 바로 서우진인 것이다.

서우진은 어려서부터 남이 10년 공부해야 과거에 응시할 정도의 한학을 깨우치는데 그것을 단 5년만에 배우고 익혀버린 놀라운 인재이다. 그러한 빼어난 능력을 가진 그가 이제는 여진의 말과 글을 배워서 익히고 있으니 그 속도가 엄청 빠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서우진이 자신의 실력을 항상 절반 내지 7할 정도만 남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애령이도 깜빡 속고 있다. 다음날 애령이가 10가지 문제를 출제하여 공부한 것을 시험하면 7개만 의도적으로 서우진이 맞추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자신의 반려자인 애령이까지 그렇게 속이고 있는 서우진이야 말로 한마디로 두렵고도 무서운 인물이라고 하겠다.

그 두 달 동안에 한차례 애령이가 은밀하게 의주성을 다녀온다. 물론 말을 타고 달려서 국경마을에 있는 주막에 말을 맡겨 두고서 비밀산길로 월경을 하고서 다녀오는 것이다. 의주성에 살고 있는 이린 부부를 만나 서우진이 넘겨준 개경의 정보를 전해준다. 애령이 자신의 머리속에 암기하고 있는 새소식을 그들에게 넘겨 주고서 돌아온다.

그 사이에도 열심히 여진의 말과 글을 공부하도록 애령이 긴 문장을 적어서 서우진에게 준다. 그것을 여러 번 읽고 전부 외워서 실생활에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서우진이 그것을 완전히 익힌 다음에 개경시내에 살고 있는 여진족을 수소문한다.

한번 자신의 실력을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다. 그가 그렇게 용기를 낼 수가 있는 이유는 여진의 글이라고 하는 것이 그 옛날 신라시대의 이두문과 비슷하여 빨리 배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서우진이 개경의 중부에 자리를 잡고 있는 상점가에 나가본다. 당시의 고려는 주변국과의 무역관계가 참으로 활발하다. 그래서 고려의 벽란도는 수입과 수출의 중심지이고 판매의 중심지는 고려의 왕도인 개경시내의 상점가이다;

 

서우진은 그 시장에 나가서 여진족의 특산품을 팔고 있는 상인에게 물어본다; “혹시 여기 개경에 살고 있는 여진족을 알고 계십니까? 제가 사업상 여진의 말과 글을 좀 배웠으면 좋겠다 싶어서 여쭈어 봅니다만… “. 그 점포의 주인이 유심히 서우진의 차림새를 살핀다.

혹시 관원인가 싶어서 주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 밀수품 단속을 하고자 그렇게 찾아오는 관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편한 복장을 하고 있는 서우진의 차림새는 전혀 관원이 아니다. 아주 자유스러운 평민의 복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부를 하고 있는 선비로 보이지 결코 법을 집행하는 관료의 딱딱함이 엿보이지를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그 점포의 주인이 친절하게 알려준다; “이곳 개경의 상점에 여진족의 특산물을 도매로 넘겨주는 상인이 있는데 그가 여진족 출신이지요. 나이가 40대 중반이고 언뜻 보기로는 송나라에서 온 상인처럼 보이지요. 하지만 사실은 학식이 풍부한 인물입니다. 그 이름이 야율상이지요. 제 이름이 경호민이니 내 이름을 대면 그가 친절하게 대해줄 것입니다… “;

서우진이 허리를 굽혀서 깍듯이 경호민에게 인사한다; “초면에 이렇게 친절하게 알려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주인장께서는 경대승 창군과 같은 일가이십니까? 흔하지 아니한 성씨입니다”. 경호민이 웃으면서 대꾸한다; “저도 청주 출신이고 경씨이니 같은 일가입니다. 하지만 촌수가 워낙 멀어서 인사를 하고 지내는 터수는 아닙니다. 하하하… “.

서우진이 덩달아 웃는다. 그러면서 또 묻는다; “그런데 그 야율상이라는 여진족 출신은 이곳 개경에 산지가 오래됩니까?”. 그 말을 들은 경호민이 대답한다; “그렇지요. 제가 그를 이곳 개경에서 사업관계로 안지가 15년이나 되니, 그가 이곳에 산지가 15년 이상이 되지요. 그는 이곳 토박이나 다름이 없어요. 하지만 그는 송나라 상인처럼 꾸미고 있어요. 재미있지요? 하하하… “.

말끝에 보기 좋게 항상 웃고 있는 경호민은 나이가 50정도로 보이는데 참으로 마음씨가 좋은 유쾌한 사람이다. 그래서 서우진이 다시 고개를 숙여 사의를 표하면서 말한다; “저는 동북쪽 마을에 살고 있는데 이름이 서우진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 경호민이 마주 절을 하면서 뜻밖의 말을 한다; “저보다는 연하로 보입니다마는 아주 늠름하고 귀골로 보입니다. 저 같은 상인은 오래 장사를 하다가 보면 대충 사람의 됨됨이를 직관적으로 깨닫게 되지요. 젊은 서선생은 장차 큰 인물이 될 상이군요. 그러니 앞으로 저를 기억하시고 잘 보아 주십시오. 이렇게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그 말을 들은 서우진이 유심히 경호민의 인상과 모습을 다시 살핀다. 보통 상점의 주인이 아니다. 깊숙한 혜안을 갖추고 있는 인물이 장사를 하고 있다. 그가 서우진을 알아 보았듯이 서우진 역시 경호민이 인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다시 한번 허리를 굽혀서 절을 하면서 말한다; “오히려 후학이 고매하신 선배로부터 많이 배워야 하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경선배님… “.

경호민은 서우진이 깍듯하게 예를 차린 후에 자신이 일러준 골목으로 접어드는 것을 무심한듯이 유심하게 보고 있다. 그러면서 속으로 읊조린다; “허허, 서화평 재상과 얼굴이 많이도 닮았구만. 그와 가까운 일가로 보이네.  그런데 겉으로 잘 드러내지를 않고 있지만 그 기세와 혜안이 서화평보다 더 뛰어난 것으로 보이는구만. 저런 인물이 여기 개경에 살고 있을 줄이야?.. “.

그런 줄도 모르고 서우진은 골목으로 접어 들자 경호민이 가르쳐준 기와집을 찾기에 열심이다. 큰 기와집 한 채가 골목 끝 야트막한 산자락에 외로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한 마디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아니하고 은거하기에 딱 좋은 위치이다;

 

대문을 두드리니 잠시후에 문이 열리고 하인이 묻는다; “어디에서 누구를 찾아오신 분이신지요?.. “. 서우진이 대답한다; “저는 야율상 선생을 좀 만나려고 처음으로 찾아온 서우진이라고 합니다. 지금 댁에 계십니까?”.

그 하인의 대답이 인상적이다; “저의 주인나리는 본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직접 만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주인나리의 본명을 말씀하고 계시니 제가 안에 여쭙겠습니다. 잠시만 문밖에서 기다려주십시오”. 40대의 건장한 그 하인이 급히 사랑방으로 걸음을 옮긴다.

얼마후에 그 하인을 따라서 한사람의 풍채가 좋은 40대 중반의 상인이 대문으로 나온다. 서우진의 생각으로는 그가 야율상인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자가 유심히 서우진의 행색과 얼굴을 살피면서 말한다; “제가 야율상입니다마는 분명히 처음 뵙는 분이십니다. 어디서 저의 이름을 아시고 이렇게 직접 제 집에 걸음을 하신 것입니까?”.

그 기세로 보아서는 똑바로 대답하지 않으면 아예 집안에 들이지 아니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서우진이 공손하게 대답한다; “저는 서우진이라고 합니다. 조금 전에 상점거리에서 여진의 특산품을 팔고 있는 상인 경호민으로부터 귀하의 존명을 받아 이렇게 직접 찾아 뵙고 있습니다마는… “.

그 말을 들은 야율상이 혼잣말을 하듯이 읊조린다; “허허, 나이가 50남짓한 경호민이 벌써 노망이 들었나내가 본명을 사용하지 말고 고려이름 신한상으로 나를 부르라고 그렇게 부탁을 했는데, 그것을 잊어 먹다니이거 별일이야, 보통일이 아니구만… “.

그 말을 듣자 대문 바깥에 서있는 서우진이 능청스럽게 말한다; “허허, 저 같은 30살이 못된 젊은이도 때로는 깜빡깜빡하는데 50대 초반인 경호민 선생이 그렇게 신한상 선생의 당부를 잊어버리는 것이 무어 대수이겠습니까?... 그리고 이름을 바꾼다고 하여, 그 사람의 정체성이 어디로 도망을 가겠습니까? 야율 선생, 그러면 제가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그 말을 들은 야율상이 조용히 서우진을 자신이 거처하는 사랑방으로 안내한다. 자리에 앉자 서우진이 깍듯이 예를 갖추어 다시 인사한다; “저는 개경시내 북동쪽 마을에 살고 있는 서우진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오늘 야율상 선생을 보게 되니 영광입니다”. 야율상도 마주 예를 갖춘다; “야율상입니다. 서우진 선비를 이렇게 제 집에 모시게 되니 저도 영광입니다”.

인물은 인물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야율상은 서우진이 자기보다 한참 나이가 적지만 그 기세와 지력이 더 뛰어난 것을 은근히 느끼면서 신중하게 대답하고 있다. 그 사이에 하인이 주안상을 사랑방에 들인다. 술잔을 잡은 야율상이 먼저 서우진에게 한잔을 부어서 권한다. 그 맛이 독특하다. 여진족의 술이기 때문이다.

서유진이 개마고원을 다니면서 주막에서 여러 번 마신 적이 있는 술이다. 특히 대장장이 투란의 집에서 맛본 그 술과 동일한 맛과 향취를 풍기고 있다. 그래서 말한다; “허허, 제가 일전에 개마고원에서 마신 들쭉술과 똑같은 맛입니다. 야율족의 전통주이군요… “. 그러면서 이번에는 서우진이 한잔을 부어서 야율상에게 준다;

그 술을 마시고나서 야율상이 말한다; “서우진 선생은 이 술이 야율족의 전통주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것을 아는 고려인이 별로 없습니다마는… “. 그 말을 듣자 서우진이 말한다; “제 아내가 야율족입니다. 그러니 제가 이 술의 맛을 잘 알고 있지요… “. 야율상이 깜짝 놀라면서 말한다; “실례입니다마는, 부인은 언제 개경에 왔습니까?”.

서우진이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한다; “개마고원의 야율족이 완안족 추장이 불러들인 금나라 군대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자 그 난을 겨우 피하여 6년 전에 이곳 개경에 흘러 들어왔지요… “. 그 말을 듣자 야율상이 묻는다; “혹시 그 부인의 여진 이름을 제가 여쭈어 보아도 될까요?... “.

서우진이 웃음기를 거두면서 대답한다; “야율애령입니다. 야율종 추장의 따님이지요… “. 그 말을 듣자 갑자기 야율상이 자세를 반듯이 하면서 예를 갖추어 말한다; “우리 집안의 가주이며 야율족의 추장이었던 종 형님의 혈육이 이곳 개경에서 살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

야율상이 눈가를 붉히면서 감격스럽게 말한다; “우리 야율 성씨는 모두 야율종 추장님의 신하들입니다. 저는 무역을 담당하고 있던 야율상입니다. 인사를 받으시지요. 이제는 비록 고려인이라고 하더라도 서우진 선생이 그 분의 후계자입니다”. 그 말을 듣자 서우진이 말한다; “모계사회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여진족이니 그 후계자는 제가 아니고 야율애령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자 야율상이 대답한다; “평상시에는 분명히 그러합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사라진 야율족을 다시 재건해야만 하는 비상시국입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남자가 추장이 되지요. 그러니 야율애령의 남편이신 서우진 선생이 저희들의 추장이며 저희 부족을 재건해야 합니다. 저는 서우진 선생의 눈을 보고서 그러한 지혜와 경륜을 가진 인물인 것을 벌써 눈치를 챘습니다. 그러니 신하된 저의 절부터 받으시지요”.

서우진이 말릴 사이도 없이 의자에서 옆으로 일어난 야율상이 거실에서 그대로 오체투지에 가까운 절을 하면서 신하의 예를 갖춘다. 그것을 보고서 서우진이 서서히 다가가서 야율상의 팔을 잡아서 일으킨다. 그리고 크게 포옹을 하면서 말한다; “야율상 선생은 이제부터 저의 재상입니다. 우리 야율족을 함께 재건하고 그 터전을 완안족의 추장인 완안웅으로부터 되찾도록 하십시다”.

그 말은 첫째로, 개마고원의 야율족의 땅을 되찾고 둘째로, 두만강 유역의 완안족을 치고 셋째로, 나아가서 만주의 생여진의 땅을 전부 통일하자는 것이다;

 

잠시 숨을 쉬고서 서우진이 이어서 말한다; “물론 변경에 나와 있는 금나라의 세력도 몰아내고요. 분명히 거대한 제국과 싸우는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가 진심으로 합심을 한다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아골타가 작은 여진족을 통일하고 거대한 제국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우리라고 못할 리가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야율상 선생?... “;

실로 광오한 선언이다. 그 말을 듣자 야율상이 눈물을 흘린다. 그러면서 말한다; “우리 야율족의 역사가 다시 시작이 되는군요. 그 일에 동참하게 되니 이 야율상이 고려 땅 개경에서 숨을 죽이며 송나라 상인처럼 꾸미고 살아온 보람이 있습니다.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추장님… “.

앞으로 그들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가 되는 것일까? 그날 여진의 말과 글을 연습하기 위하여 여진족 출신을 만나려고 나간 서우진이 운명처럼 개경에서 야율상을 만난 것이다. 그가 장차 서우진을 도와서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큰 나라를 건설하게 되는 명재상이다. 앞으로 과연 그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가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