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비밀(손진길 소설)

王의 비밀2(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10. 25. 02:01

王의 비밀2(작성자; 손진길)

 

저녁식사를 끝낸 후에 무예선생인 김숙번은 제자인 서우진과 이린에게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자 이린의 아내인 문나옥은 술상을 사랑방에 차려주고 자신의 거처인 안방으로 돌아간다. 5년만에 만난 사제지간에 중요한 이야기를 편히 나누라고 자리를 피해준 것이다.

8월 초순의 여름 더위가 상당하지만 저녁이 되자 한풀 꺾이고 있다. 참으로 덥지도 춥지도 아니한 좋은 밤이다. 파주골에 숨어사는 이린의 초가 외딴집의 바깥뜰에서는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다. 그렇지만 김숙번과 서우진 그리고 이린 등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랑방에서는 밤새 호롱불만이 깜박거리고 말소리가 전혀 바깥으로 새나가지 아니하고 있다;

먼저 40대 초반의 무예선생인 김숙번이 20대 중반인 두 제자 서우진과 이린에게 안타까운 심정으로 말한다; “너희들은 장차 어떻게 할 셈이냐? 우진이 너는 계속 송악에서 한량으로 지내고자 하느냐? 그리고 린이 너는 계속 여기 파주골 외딴집에서 신분을 속이고 숨어서 지내고자 하느냐?... ”.

서우진이 즉답을 피하고 그저 조용히 웃고 있다. 그러자 이린이 먼저 대답한다; “스승님, 저는 송악으로 돌아갈 수가 없으며 고향인 전주로 낙향할 수도 없습니다. 5년 전에 저의 형제와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했습니다. 겨우 장인의 도움으로 저와 집사람만 몸을 피하여 여기서 숨어서 살고 있는 처지인데 장래 제가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말을 듣자 김숙번이 정색하고서 말한다; “사나이 대장부가 큰 뜻을 펴는데 있어서 어떻게 고려의 조그만 왕도인 송악만 생각하느냐? 고려의 바깥에는 수많은 종족들이 살고 있고 그들의 나라가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린이 너는 여기 파주골에서만 숨어서 살고자 하고 있으니 내가 보기에는 전혀 웅심이 없고 옹졸해 보인다. 그렇게만 좁게 생각한다면 너는 너의 형인 이의방보다 못한 동생이다”.

그 말을 들은 이린이 말한다; “스승님, 저의 둘째 형인 이의방은 천하의 영웅이었지요. 그리고 큰형인 이준의는 학문이 뛰어나 재상을 지냈지요. 하지만 저는 형들만큼 뛰어난 인물이 못됩니다. 게다가 지금은 쫓기는 몸이니 숨어서 조용히 지내는 것 말고는 별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듣자 김숙번이 정색을 하고서 말한다; “벌써 약관의 나이에 출사하여 내시집주의 벼슬을 지낸 린이 네가 별로 쓸모가 없는 인재라고 말하는 것은 온당하지가 못하다. 린이 네가 인재가 아니었다면 문극겸 재상이 자신의 귀한 딸을 너에게 주지 아니했을 것이다. 문재상은 그저 시류에 편승하는 그러한 인물이 아닌 것을 린이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지난 5년간 숨어서 사느라고 지쳤는지 이린이 스승인 김숙번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다 지나간 일입니다. 저의 형님들이 고려의 권력자였을 때의 이야기이지요. 저는 이제 끈이 떨어진 연과 같습니다. 어디에 가서 누구를 의지하여 저의 뜻을 펼 것입니까? 고려에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자 김숙번이 단호하게 말한다; “내 말이 그 말이다. 고려에서 방법이 없다고 하면 고려 바깥으로 눈을 돌리면 되지 않겠느냐? 어째서 그렇게 폭넓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느냐?”. 평소 성격이 얌전한 이린은 스승의 꾸지람이 진하게 묻어 있는 그 말에 그만 대답이 궁색하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서우진이 이제는 자신이 나서고자 한다.  

서우진의 첫마디가 다음과 같다; “스승님, 그것은 린이만 야단을 칠 일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송악에서 편하게 귀족으로 살고 있는 저도 누가 고려 바깥으로 나가서 웅지를 한번 펼쳐보라고 권유한다고 하면 고개를 가로 저을 것입니다. 국경 바깥의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쪽으로 눈을 돌리겠습니까? 그러니 린이도 마찬가지이지요…. “.

그 말을 듣자 김숙번이 허어라고 한숨을 쉬면서 말한다; “내가 제자들을 잘못 가르쳤구나. 어찌 너희들은 그렇게 옹졸하고 속이 좁으냐? 마치 새장의 새와 같구나이제 내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서 한번 달리 생각을 해보도록 하려무나…”. 그 밤에 김숙번이 서우진과 이린에게 해준 긴 이야기를 간추려 보면 그 요지가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한반도의 남동쪽에 치우쳐 있던 소국 신라가 660년에 백제를 정벌하고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그것은 자력으로 정복한 것이 아니다;

 

 바다 건너 중원의 주인이 된 당나라 황제의 군대와 연합하여 한반도의 통일을 이룬 것이다. 그 결과 이 강산을 탐내는 당나라의 군대를 물리치느라고 엄청 고생을 했지만 결국에는 북쪽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당나라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것은 같은 민족 삼국의 완전한 통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신라는 한민족을 하나로 통일한 유일한 한반도의 국가라고 자랑을 늘어놓았으니 그것이 역사의 왜곡인 것이다.

둘째로, 거짓말을 잘하는 왕조는 오래가지를 못한다. 그래서 통일신라는 김씨 왕조의 정통성이 약하여 자주 변란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나중에는 새로운 삼국시대가 전개된다. 견훤의 후백제에 이어 궁예의 후고구려가 성립이 된 것이다. 그런데 견훤이나 궁예는 힘은 있었지만 백성들을 설득할 수 있는 정통성은 약했다;

왜냐하면,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사실 호남의 인물이 아니라 영남 상주 출신이다. 그리고 궁예도 신라에서 쫓겨난 왕자라고 스스로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고구려의 역사와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인물이다. 그렇게 정통성이 약했기에 차례로 망하고 결국에는 여러 토착 호족들의 옹립으로 왕이 된 왕건의 고려가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오래 계속이 되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태조 왕건은 토착 호족들의 연합에 의하여 왕이 된 자이므로 그들과 혼인동맹을 통하여 겨우 고려의 왕권을 행사했다. 그의 왕자의 하나가 제4대 광종으로 즉위하자 그가 호족들의 세력을 혁파하고 전제적인 왕권을 확립한 것이다. 광종 이후 고려의 왕들은 하나같이 과거의 호족들처럼 무신들이 군대를 호령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였다.

따라서 문신들로 하여금 병서를 익히게 하고 군대를 지휘하도록 하였으며 무신들은 문신 출신인 사령관을 보좌하는 기능에 그치게 한 것이다. 그에 따라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는 것을 국가의 정통성으로 내건  고려가 오히려 문약해지고 진취적인 왕조의 정통성을 상당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넷째로, 그러한 차제에 문신의 괄시를 견디지 못한 무신들을 대표하여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주동이 되어 무신변란을 1170년에 일으킨 것이다. 그들은 의종을 폐하고 왕제인 명종을 대신 왕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역성혁명은 아니지만 무신들이 왕족의 하나를 제멋대로 신왕으로 세운 것이니 크나큰 정변이다. 그로 말미암아 국가의 통치권은 왕씨인 왕이 아니라 이제는 군부의 실력자가 쥐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신하들이 왕을 갈아치우는 큰 변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백성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고려의 왕씨 왕조가 별로 큰 정통성을 지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벌이라는 건국이념을 상실한지 오랜 왕씨의 왕조를 백성들이 결사적으로 사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참고로, 고려왕들의 가계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다섯째로,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고려의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왕을 갈아치우는 큰 정변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러한 무도하기 그지없는 변란에 대하여 귀족들과 백성들이 분노하여 들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수용을 하고 만다. 그 이유는 고려의 왕씨 왕조가 귀족들과 백성들의 지지를 크게 받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170년부터 고려의 통치는 왕의 전제가 아니라 군부내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장군들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대권이 정중부에서 1171년에 이의방에게로 넘어갔다가 다시 1174년에 정중부 부자에게로 넘어온다. 하지만 정중부 부자의 권력이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힘을 행사하는 군부내에서 대권을 차지하고자 하는 암살이 끊이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숙번의 예상 그대로 한달이 지나자 11799월에 청주 출신의 26세 청년장군 경대승이 정중부 부자를 쳐죽이고 군부를 장악하고 마는 것이다;

끝으로, 김숙번이 언급한다; “왕의 권력은 귀족들과 백성들의 지지를 어느 정도 받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통치의 세습의 길이가 정해지고 있다. 그런데 고려의 왕씨 왕조는 북벌을 단념하고 문약해지자 그 기상을 잃어버리고 대권을 군부에 찬탈당하고 만 것이다. 지금의 무신정권은 왕의 전제보다 그 정통성이 약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의 앞날을 밝지가 못하다. 그 점을 알고서 너희들은 새로운 나라 새로운 기풍을 일으키는 주역이 되어야 할 것이다. 왕이란 세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부하들과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 정통성이 있는 왕조를 창건하는데 그 의의가 큰 것이다. 그 점을 명심하도록 해라”.  

스승의 지론을 들으면서 서우진과 이린이 숙연해진다. 이제는 소극적인 태도를 벗어나서 용트림을 할 때인 것이다. 그래서 두사람은 서로의 눈을 쳐다본다. 그들은 그 여름 밤 파주골 외딴집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결심을 하고자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