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비밀(손진길 소설)

王의 비밀1(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10. 25. 01:51

王의 비밀1(작성자; 손진길)

 

1.    고려말기의 기린아 서우진

 

20118월초에 윤하선은 자신의 방에서 한국의 역사책을 읽고 있다. 그는 22살이며 서울대학교 학부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있는 3학년 학생이다. 윤하선은 세계사도 좋아하지만 한국의 역사를 더 좋아한다.

조선시대 초엽부터 한양에서 일찍 터를 잡고 오래 살아온 가문이 윤하선의 집안이기에 그가 한국의 역사에 관심이 많다. 특히 조선의 역사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윤하선 자신의 선조들이 서울에서 살아온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집안에서 한국의 역사책을 다시 읽으면서 윤하선은 한가지 의문을 가진다. 그것은 나라의 주인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조선의 국왕들이 어째서 그렇게 책임의식이 부족한가?하는 것이다.

왕조시대에 있어서는 분명히 국왕이 나라의 주권자이다. 그런데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의 백성들이 죽고 그들의 재물이 약탈을 당하고 있으며 특히 부녀자들이 수없이 겁탈을 당하고 있는데 그와 같은 비참한 역사에 대하여 어째서 국왕들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아니하고 있는 것일까?

언제나 정치의 명분을 경천애민이라고 말하면서도 막상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사랑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애쓰는 국왕이 별로 없다. 그리고 자신이 나라를 잘못 다스려서 외세의 침략을 자초하였으며 백성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고 스스로 뉘우치는 국왕을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다.

국왕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다. 나라의 통치집단인 귀족들과 사대부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백성들의 삶이 고달프기 그지없다. 세월이 지날수록 외적의 내침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전쟁에 시달리고 있을 뿐이다. 그 결과 1910년에는 마침내 일본제국에게 나라를 완전히 빼앗기고 만다.

그러한 가슴 아픈 내용의 역사책을 읽다가 윤하선이 깜빡 책상에서 깊은 잠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한참 후에 서서히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켠다. 윤하선은 자신이 밤 늦게까지 역사책을 읽다가 책상에서 잠이 든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지금 그는 호화로운 무늬의 보료위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의문이 생긴 윤하선이 자신의 뺨을 꼬집어 본다. 그리고 아야야비명소리를 낸다. 너무 세게 꼬집은 것이다. 뺨이 아픈 것을 보니 분명히 꿈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된 노릇인가?’. 혼란에 빠져서 방안을 둘러본다. 문갑과 한자로 쓴 병풍 등이 방의 가장자리를 채우고 있다.

한쪽으로 밀어 놓은 작은 상과 그 위의 문방사우가 눈에 들어오자 갑자기 윤하선은 자신이 고려말에는 서우진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인물이라고 하는 옛날의 기억을 얻게 된다;

 

참으로 순간적으로 그러한 놀라운 기억이 그의 뇌속에서 재생이 되고 있다. 8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그 옛날의 기억이 되살아 나고 있는 것이다.

더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발생하고 있다. 갑자기 문밖에서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난다. 그리고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창호지 문으로 밀려 들어온다; “주인마님, 기침하셨습니까? 소녀 애령이 옵니다”. 그 말을 듣자 윤하선은 자신이 서우진이며 이곳은 무신들이 집권하고 있는 고려의 왕도인 송악이라는 사실을 아주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서우진이 대답한다; “그래 애령아, 나는 벌써 잠이 깼다. 이제 세수를 해야 하겠구나…”. 애령의 밝은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온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세숫물을 대령하겠습니다”. 그러자 서우진이 대답한다; “아니다. 여름날씨에 방안에서 세수를 할 필요가 없다. 내가 바깥공기도 마실 겸 우물가로 나가고자 한다”.

 옷을 대충 갖추어 입고서 서우진이 방밖으로 나간다. 그리 큰 집을 아니지만 송악에서 귀족들이 살고 있는 좋은 지역에 자신의 기와집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일찍이 정중부의 부관으로 활약한 부친이 남겨준 집이다. 정중부가 이의방 및 이고와 더불어 반란을 일으키고 무신시대를 열자 그를 도운 서우진의 부친이 졸지에 고려의 귀족이 된 것이다.

늘그막에 태어난 서우진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청년이 되자 그 집에서 살고 있다. 선친이 정중부의 집안에서 받은 식읍이 상당히 남아있어 서우진이 홀로 송악에서 귀족으로 지내는 데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다. 그러므로 집안에 애령이와 같이 총명하고 어여쁜 여종도 거느리고 있다.

세수를 하고나서 서우진이 멀리 보이는 바위산인 만수산을 바라본다;

 

그리고 오늘 자신이 해야 하는 일과에 대하여 잠시 생각한다. 오늘은 숙부인 서화평을 만나고 그 다음에는 무예선생인 김숙번을 만나면 될 것이다. 일찍 별세하신 선친을 대신하여 서우선 자신을 키워주고 학문을 가르쳐준 숙부이다. 그러므로 오래간만에 문안인사를 하는 것이 옳다.

서우진은 숙부 서화평에게서 학문을 배우면서 그를 여러 번 놀라게 한 조카이다. 보통 10년은 한학을 공부하여야 고려의 문신이 될 수가 있는데 조카인 서우진은 5년만에 그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서우진은 문신으로 고려조정에 나가고자 하는 생각을 도무지 하지를 아니하고 있다. 서화평이 여러 번 권하다가 조카가 한사코 고사하므로 이제는 아예 단념하고 있다.

그 대신에 서우진은 송악에서 이름난 무예선생인 김숙번에게 사사하면서 여러가지 무술을 배우고 있다. 동시에 병서를 읽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문무에 모두 능하게 된 서우진이다. 그러나 그는 조정에 출사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실력을 숨기고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숙부인 서화평, 무예선생인 김숙번, 그리고 몇명의 가까운 지인들을 제외하면 송악에서 서우진이 뛰어난 인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 그만큼 20대 중반의 서우진은 자유스럽다. 평범한 귀족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여러가지 공부와 여행을 마음껏 하고 있다.

애령이가 차려주는 조반을 들고난 서우진이 그녀에게 말한다; “애령아, 나는 오늘 오래간만에 숙부님께 문안인사를 드리고 그 다음에는 무예선생인 김숙번을 만나보려고 한다. 혹시 집으로 나를 찾아오는 손님이 있으면 애령이 네가 무슨 용건인지 잘 파악하여 두도록 해라”.

그 말을 남기고 서우진이 오전에 숙부 댁에 들린다. 서화평은 오래간만에 찾아온 조카를 반긴다. 마치 아들과도 같은 조카이다. ‘형님이 더 오래 사셨더라면 늠름하게 자란 아들 우진이를 보고서 참 좋아하셨을 것인데…’ 라는 생각이 서화평에게 자꾸만 든다. 그만큼 마음에 드는 서우진이다.

하지만 서화평은 두가지 아쉬운 점을 여전히 조카에게서 느끼고 있다; 하나는, 조카 서우진이 도무지 조정에 출사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혼인을 할 생각을 도무지 아니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째서 그럴까?’ 서화평은 조카의 내심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오늘 오래간만에 문안을 온 조카에게 넌지시 운자를 떼어보았지만 서우진은 미소만 띄우면서 자꾸만 화제를 돌리고 있다.

오래간만에 들린 조카에게 숙모가 숙부와 겸상으로 점심식사를 하도록 준비해준다. 숙모인 왕숙은 고려의 왕족출신의 여인이다. 그녀는 송악에서 이름이 난 문신 서화평에게 한학을 배우다가 그 깊은 학문에 반해서 아예 결혼까지 한 여인이다. 그렇게 학문을 숭상하는 왕숙이기에 총명한 조카 서우진을 아들처럼 아끼고 있다.

점심식사를 마치자 서우진은 숙부와 숙모에게 인사를 드리고 대문을 나선다. 당시에 일반백성들은 점심식사를 챙겨서 먹지를 못한다. 그들의 살림살이에 걸맞게 하루 두 끼를 먹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귀족인 서우진이나 서화평의 집에서는 삼식을 하고 있다. 그만큼 부유한 가문이다.

그날 오후에 서우진이 무예선생인 김숙번의 집에 들렀더니 그가 자신을 반긴다. 단둘이 방에 있을 때에 김숙번이 은밀하게 말한다; “우진아, 조용히 듣기만 해라. 참으로 오래간만에 너의 친구인 이린이 소식을 전해왔다. 그가 그동안 파주골에 숨어서 지내고 있다고 한다. 나와 함께 그를 방문했으면 좋겠는데?...”.

서우진이 나직한 음성으로 대답한다; “스승님, 저도 이린이를 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언제 파주골로 떠나실 겁니까?”. 김숙번의 대답이 은밀하다; “내일 아침에 우리집으로 오너라. 사흘 정도이면 그를 만난 후 다시 송악으로 돌아올 수가 있을게야. 주위에는 남쪽으로 산천유람을 가는 것으로 둘러대고서 함께 은밀하게 떠나자꾸나”. 서우진이 좋다고 고개를 끄떡인다.

지난 5년전에 송악을 탈출한 이린은 그동안 소식이 없었다. 이린은 서우진과 함께 김숙번에게서 무술을 배운 동문이며 친구이다. 이린의 둘째형이 그 유명한 군부의 독재자 이의방인데 전주 이씨인 그는 1170년 고려 의종 24년에 정중부이고 등과 함께 무신반란을 일으켰다. 의종을 폐하고 명종을 세웠으며 정중부의 세력을 억누르고 이듬해에는 이고를 죽임으로써 독재체제를 형성하고 무신통치기구인 중방을 최고권력기관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의방은 여러 번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불교의 사찰과 마찰을 빚었으며 더구나 민심을 잘 수습하지 못한다. 그 결과 1174년에 정중부의 아들인 정균과 합세한 승려들의 기습으로 살해당하고 만다. 그러자 그의 가문이 몰살을 당하는데 요행으로 동생 이린 만이 살아남아 송악을 탈출한 것이다.

은밀하게 당시의 재상인 문극겸이 이린 부부를 미리 빼내어 송악 바깥으로 멀리 피신시켰는데 그가 바로 이린의 장인이다. 문극겸은 이의방이 집권하고 있는 동안에는 재상이면서도 상장군을 겸하고 있었다. 지금은 좌천이 되어 낮은 직급으로 고려의 조정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한 저간의 사정을 이린의 무예스승인 김숙번과 이린의 동문이며 친구인 서우진이 어느 장도 짐작하고 있다. 오랜 도피생활을 하고 있는 이린이 내밀하게 소식을 전해온 것이니 두사람이 그를 한번 만나보고자 하는 것이다;

때는 고려 제 19대 왕 명종 9년인 1179년의 여름이다. 서우진이 스승인 김숙번과 함께 남행을 하여 송도에서 50리나 떨어져 있는 파주골로 간다. 남쪽으로 갈수록 더 더워지고 있다. 길가의 무성한 나무에서는 매미가 숨어서 한여름임을 알리고 있다. 이린이 그려서 보낸 약도가 있어서 어렵지 않게 숨어 있는 그의 집을 찾아낼 수가 있다;

삽작문을 열고 두사람이 마당에 들어서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안주인이 부엌에서 나온다. 당대의 재상인 문극겸의 딸인 그녀의 몰골이 여느 시골의 아낙네와 다름이 없어 보인다. 그만큼 숨어서 산 세월이 오랜 것이다. 그녀의 이름이 문나옥이다.

문극겸이 사위 이린과 함께 딸을 송악에서 탈출시키면서 그녀의 이름을 문나옥이라고 지어준 것이다. 재상인 문극겸은 남평 문씨이므로 그 고향이 나주이다. 따라서 딸에게 그 이름으로 교훈을 준 것이다. 시골에 숨어서 지내더라도 나주 출신 귀족 집안의 금지옥엽임을 잊어버려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문나옥이 참으로 오래간만에 자신의 집을 찾은 남편의 스승인 김숙번과 친구 서우진의 얼굴을 용하게도 알아본다. 그녀는 인사를 하기가 무섭게 사랑방문을 열고서 말한다; “여보, 멀리서 귀한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나와 보세요…”. 이린이 사랑방문을 열고 나온다. 그리고 5년만에 스승과 친구의 얼굴을 본다.

이린이 마당에 덥석 앉아서 스승에서 큰 절을 드린다. 그 모습을 보고서 김숙번이 말한다; “린아, 일어나거라. 너의 큰 절을 받자고 내가 50리 먼 길을 온 것이 아니다. 너의 이야기를 듣고 얼굴을 보고 싶어서 찾아온 것이다”. 그 사이에 서우진이 이린의 두 손을 마주 잡는다.

서우진과 이린이 잡은 손을 놓고서 이제는 서로 포옹을 한다. 한때 송악에서 20살을 전후하여 동문수학을 하면서 청운의 꿈을 한번 펼쳐보자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이다. 그런데 이제는 서로 멀리 떨어져서 조용히 살고 있다. 이린은 도망자 신세가 되어 있고 서우진은 고려조정에 출사를 할 생각을 아예 접고 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가 그러한 것이다. 그 두 젊은이를 보면서 김숙번은 오늘 자신이 할 이야기가 많을 것임을 느낀다;

 

이제 송악의 기린아 서우진이 시대의 풍운아 이린을 만나게 되었으니, ‘어떠한 일들이 그들로부터 비롯이 될 것인가?한여름 파주골의 날씨는 여전히 덥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