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더말 아재(손진길 소설)

선더말 아재31(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10. 9. 22:49

선더말 아재31(작성자; 손진길)

 

선더말 아재의 차남인 손진길은 1967년 가을이 되자 ‘경주 문화중학교’에서 마지막 학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는 1965년 봄에 처음으로 문화중학교 1학년 신입생이 되어 교정에 발을 들여놓았던 그 시절을 잊지 못하고 있다. 2년반 전 입학식날에 그는 모자를 푹 눌려 쓰고서 아무런 존재감도 없이 그저 한없이 기가 죽어서 교문을 들어선 것이다.

운동장에서는 2학년과 3학년 선배들이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한마당 가득 뛰어 다니고 있다. 반면에 언뜻 보아도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여학생과 남학생들이 조용히 교실로 들어가고 있다. 그들은 중학생이 아니고 ‘문화종합고등학교’의 학생들이다. ‘종합고등’이라고 하는 말은 남녀공학이며 인문계 뿐만 아니라 상업과 농업계통의 과목을 함께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경주시내에 살고 있는 가난한 집안의 자녀들과 월성군에 살고 있는 시골학생들이 ‘문화종합고등학교’로 진학을 하는 이유는 고교를 마치면 경주시내와 기타 대도시의 여러 업체에 취직을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학교에서는 그들의 취업을 돕기 위하여 상업과목과 농업과목을 동시에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손진길이 ‘문화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2년 6개월 동안에 학교의 모습이 엄청 달라지고 있다. 질적인 변화는 몰라도 양적인 변화는 괄목할 만하다. 예를 들면, 1945년에 부례문 선교사에 의하여 설립이 된 ‘문화종합고등학교’가 변경이 되어 인문계 남학생만을 입학시키는 ‘문화고등학교’가 된 것이다;

경주에서는 ‘문화고등학교’가 ‘경주고등학교’에 이어 두번째로 인문계 남자고등학교가 된 것이다. 나중에는 손진길보다 한해 선배인 우창록이 ‘문화중학교’에서 최고성적으로 졸업한 후 3년 전액 장학금을 받고 ‘문화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그는 문화고등학교에서 그대로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합격하는 대단한 기록을 세우게 된다;

훗날 ‘서울대학교’에서 한해 선후배 사이로 만나게 된 손진길이 하루는 우창록 선배에게 궁금하여 물어본다; “창록이 형은 어떻게 문화고등학교에서 서울법대에 그대로 합격하는 대 위업을 이룬 것입니까? 그 내막이 궁금합니다”. 우창록이 씨익 웃으면서 대답한다; “서울에 살고 있는 동창회장이 3학년이 된 나를 서울에 있는 대학입시학원에 몇달 다닐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지. 나는 그 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그대로 서울법대에 합격한 게야”.

그 내막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누구나 서울에 있는 입시학원에서 몇 달 공부하였다고 하여 서울법대에 합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만큼 경주가 낳은 수재가 우창록이다. 그의 중학교 졸업성적이 평균 92점이라고 한다. 손진길은 3년간 공부했지만 평균 91점이다. 우선배와는 1점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손진길보다 항상 1점이 앞서는 동급생이 ‘문화중학교’에 있다. 그의 이름이 ‘손병관’이다. 나이는 손진길보다 한두살이 많다. 당시에는 그렇게 나이가 많은 학생이 시골과 경주의 중학교에 다니고 있던 시절이다. 밀양 손씨로 보이는 병관이가 문화중학생 역사상 최고성적이라는 1년 선배 우창록의 기록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집안이 어려운 손병관이도 3년 전액 장학금을 받겠다고 ‘문화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렀는데 그만 수석이 아니다. 그는 그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그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다. 평소 잠이 많은 손진길은 자기보다 항상 1점을 앞서고 있는 손병관에게 관심이 생겼다.

그는 통학을 하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대단한 성적을 내고 있는 것일까? 그 점이 궁금하여 친구들에게 탐문을 해보니 시험 때가 되면 손병관이는 집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아예 학교 교실에서 밤이 늦도록 죽기 살기로 공부를 한다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일까? 그렇다면 도대체 몇 시까지 혼자 교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 점이 궁금하여 손진길이 자전거를 타고 하루는 밤 8시에 문화중학교에 가본다;

그는 깜짝 놀란다.  교실의 불이 밤 9시가 되어도 꺼지지 아니하고 창가에 손병관이 공부하는 실루엣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일찍 잠을 자는 손진길은 더 기다리지를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잠을 잔다. 그는 도저히 잠이 쏟아져서 그 마의 9시를 넘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무서운 집념을 가지고 공부에 매진하던 손병관은 그후 어떻게 된 것일까? 한해 선배 우창록은 검색하면 금방 그 이름이 떠오르고 있는데 어째서 손병관이의 이름을 찾는 것은 쉽지가 아니한 것일까? 그렇다면 천재란 무엇인가? 끊임없는 노력이 끝까지 뒷받침이 되어야 천재도 계속 천재로 남게 되는 모양이다. 훗날 손진길의 깨달음이 그러하다. 

‘문화중학교’에서 3년간 공부를 하고 있는 손진길은 그 학교생활을 통하여 자신의 인생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눈치채지를 못하고 있다. 일주일에 한번씩 전교생들이 강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채플시간’이 있다. 그리고 하루의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간단하게 전교생이 교실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러므로 그 학교에서 3년간 지내는 사이에 손진길은 자신도 모르게 그만  집안과 온가문에서 유일하게 기독교인이 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입학을 한 그때와 졸업을 앞두고 있는 현재를 비교하면 ‘문화중학교’에서는 너무나 큰 외관상의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

예를 들면, 1학년 때에는 여름방학을 지내고 등교했더니 운동장에 풀이 많이 자라나 있다. 그래서 전교생이 학교의 지시에 따라 그 다음날 집에서 낫을 가지고 등교한다. 그날 하루 종일 수업은 없고 전교생이 운동장에서 한창 자라고 있는 풀을 낫으로 벤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학교 운동장 옆에 있는 밭에서는 보리는 물론 도마도와 오이와 고추 등 여러가지 작목들이 자라고 있다. ‘문화종합고등학교’의 학생들이 농작물 재배법을 배우기 위한 실습장인데 그 규모가 상당하다. 그래서 풀이 많이 자라는 여름철에는 종합고등학교 학생들만으로는 그 밭의 풀을 다 매지를 못하고 있다. 따라서 중학생들이 집에서 호미를 가지고 등교하여 그들을 도와 그 일을 마무리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음악시간에는 음악실이 없어서 교실안에서 노래를 배울 수가 없다. 따라서 음악시간이 되면 학생들이 운동장 한쪽으로 이동한다. 그곳에 큰 나무가 몇 그루 있고 그 아래 그늘이 있다. 그 그늘에 콘크리트와 시멘트로 만든 긴 의자와 탁자들이 놓여 있다. 그곳에서 중학생들이 음악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방과 후에는 밴드부 학생들이 그곳에서 연습한다. 경주시내에 신라문화제와 기타 행사가 있게 되면 그들이 선두에 서게 된다;

특히 교내적으로는 미국에서 자매결연을 맺은 후원교회의 성도들이 경주를 방문할 때에 그들이 신나게 연주를 한다. 그러면 전교생이 교문에서부터 운동장과 강당입구에 이르기까지 도열하여 방문단을 대대적으로 환영한다. 그 모습이 북한에서 하고 있는 행사와 닮은 것도 같다. 

미국에서 오는 그 손님들은 그야말로 귀빈들이다. 그들의 후원을 계속 받아서 ‘문화중고등학교’는 교실을 여러 동 짓고 강당을 최신식으로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학생들에게 ‘근로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미국의 기독교인들을 양부모로 삼아 일년에 몇차례 학생들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낸다. 그러면 학생들에게 개인적으로 학자금을 지원하라고 하는 후원금이 미국에서 오게 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새로 건축이 된 강당의 긴 의자에는 미국의 후원자들의 이름을 학교장이 금속에 새겨 붙이도록 조치하고 있다. 그 이름표를 보고서 미국의 방문단 일행이 얼마나 감격해 하는지 모른다. 그렇게 되니 그 다음해부터는 그들의 후원금이 더 많이 들어오게 된다;

그 결과 손진길이 3학년이 되었을 때에는 ‘문화중학교’가 그 설비에 있어서만은 경주의 명문인 ‘경주중학교’와 어깨를 겨루게 된다. 그러한 기적을 이룬 사람이 당시의 교장인 ‘최영래 선생’이다. 그는 그러한 외교적인 수완이 탁월한 인물이다. 그러나 학생들의 학업성취에 대해서는 그러한 외양적인 변화만큼의 향상이 없는 것 같다. 역시 질적인 변화는 양적인 변화를 단기간에 따라가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한 학교의 변화를 손진길이 온몸으로 느끼면서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는 그 가을에 ‘경주 황성공원 공설운동장’에서 경주의 남녀 중학교가 모두 참여하는 대규모 체육행사가 벌어진다;

그때 밴드부를 앞세우고 학생들이 학교별로 입장을 하는데 그것이 장관이다. 그래서 학부형들이 그날 그 행사를 구경하고자 많이들 몰려들고 있다. 그 행사가 당시 경주에서는 신라문화제 다음으로 시민들에게 큰 구경거리인 것이다.

1967년 겨울에 접어되자 문화중학교에서는 일찍 방학을 한다. 경주와 대구는 분지이므로 여름에는 엄청 덥고 겨울에는 많이 춥다. 그래서 겨울에는 광열비가 많이 들기에 일찍 방학을 하는가 보다. 특히 3학년 졸업반 학생들은 일찍 진학을 하거나 아니면 취직자리를 알아보아야 하기에 학교측에서 학생들에게 시간을 더 주고자 배려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겨울방학을 일찍 맞이하여 차남 손진길이 성적표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자 선더말 아재 손수석이 놀라운 말을 아들에게 한다; “흠, 성적이 좋구만. 3년 연속 장학생으로 ‘문화중학교’에서 공부를 했으니 이제는 대구에 있는 ‘경북고등학교’에 입학시험을 치기 위하여 준비해라. 경주에서 바로 경북고등학교 입시를 치기는 어려우니 내가 대구에 있는 ‘영수학원’에 등록을 시켜주마. 그곳에서 두 달간 열심히 공부해서 내년 2월에는 경북고 입시를 잘 보도록 해라”;

‘이것이 무슨 말씀이신가?’ 어리둥절하던 손진길이 이내 깨닫는다. 형이 대학입시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있으니 부친이 이제는 차남인 자신에게 기대를 걸어보고자 하신다. 공부를 잘하면 공부로 먹고 살고, 아니면 일을 잘 배워서 일로 먹고 살아야만 한다고 주장하시는 부친 선더말 아재이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공부로 먹고 살 수가 있다는 사실을 손진길 자신이 ‘경북고등학교’ 합격으로 증명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 두 달간 대구 삼덕동에 있는 영수학원에서 공부하여 대구와 경북에서 최고의 명문으로 날리고 있는 그 경북고에 합격할 수가 있는 것일까? 길고 짧은 것은 한번 대어보아야 알 일이다. 그래서 선더말 아재는 차남 손진길을 데리고 경북여객으로 대구 ‘신암 주차장’에 도착한 후 남산동에 있는 손진목의 하숙집으로 찾아간다.

그 하숙집에서는 손주들의 밥을 지어주고 있는 할머니가 구면인 선더말 아재를 반갑게 맞이한다. 그리고 3년만에 다시보는 학생 손진길을 반긴다. 선더말 아재가 장남 손진목이 그 집에서 하숙을 하면서 어떻게 대학입시를 대구에서 준비하고 있는지 때로 살핀 모양이다. 그 집에서는 할머니가 자신의 손자인 ‘손기중’이 같은 학년이니 손진길 학생과 방을 같이 사용하도록 조치를 해준다;

그렇게 인사가 끝나자 선더말 아재는 차남 손진길을 데리고 근처 삼덕동에 있는 ‘영수학원’으로 간다. 그곳에서 국어와 영어 그리고 수학 등 3과목을 2달간 공부할 수 있도록 패스를 끊어준다. 그리고 나서 회사일로 급히 시내로 향하면서 아들에게 말한다; “길아. 이번에는 3년 전처럼 어리석게 떨어지지 말아라. 인생의 큰 실패는 한번이면 족하다. 두 번 반복해서는 안된다”.

선더말 아재 손수석은 차남이 대구의 입시학원에서 두 달만 공부하면 자신감을 회복하여 경북고등학교 입시에 합격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당사자인 손진길이 이번에는 매우 신중하다. 그는 벌써 3년 전에 경북중학교 입시에서 떨어져본 경험이 있다. 따라서 이번에는 두 달간 대구의 전문입시학원에서 공부해보고나서 결정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일단은 자신에게 다시 한번 도전의 기회를 준 부친을 실망시키지 아니하려고 결심한다.

그래서 손진길은 미소를 지으면서 깊이 고개를 숙여서 부친에게 절을 한다. 그러한 아들의 모습을 뒤로하면서 선더말 아재가 빨리 반대편 시내중심으로 걸어간다. 그 걸음걸이 모습이 어쩐지 차남 손진길의 걸음걸이와 닮아 보인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선더말 아재 손수석은 사업이 바빠서 그 걸음걸이가 빠르다. 하지만 차남인 손진길은 일찍 인생에서 실패와 좌절을 맛보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걸음걸이가 자기도 모르게 빨라진 것이다. 어쨌든 인생을 바삐 산다고 하는 점에서는 부자간에 서로 비슷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