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더말 아재16(작성자; 손진길)
선더말 아재의 차남인 손진길이 1963년 가을에 서울로 수학여행을 다녀온다. 경주 황남국민학교 5학년의 담임선생들이 이번 가을의 수학여행은 한국의 수도인 서울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나같이 합의한 결과이다. 사실 한국의 동남부에 치우쳐 있는 작은 도시 경주에서 그 먼 서울까지 국민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가는 경우는 엄청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용감한 담임선생이 그러한 과감한 제안을 한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담임선생들이 전부 찬성을 한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학부형들의 허락이다. 아직 서울구경을 못한 학부형들이 많은데 과연 그들이 국민학교 5학년에 불과한 자녀들을 위하여 많은 여비를 부담할 것인가? 하는 점이 의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제3공화국이 출범하고 경제개발 붐이 불어서 그런지 아니면 ‘이촌향도’ 현상이 서서히 발생하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대부분의 학부형들이 자녀들의 서울수학여행에 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1963년 늦가을에 손진길이 생전 처음으로 서울구경을 하고 돌아온다;
당시 중학생들도 서울구경을 못하고 있는데 손진길이 다녀왔으므로 그날 저녁에 선더말 아재 손수석이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한번 서울의 모습을 설명해보라고 말한다. 그러자 손진길이 말한다; “경주역에서 오후에 기차를 탔는데 서울이 참으로 멀어요.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서울 변두리에 있는 청량리역에 도착했어요. 그곳에서 전차를 타고 종로에 있는 여관으로 갔어요”.
이어서 부연설명을 한다. “저는 서울이 미국의 일부분인 줄 옛날에 잘못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직접 가서 보니 그것이 아니었어요. 서울사람 가운데 닭을 보자기에 싼 채 전차를 타는 사람이 있더군요. 그리고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모습들을 보니 역시 서울사람은 조선사람이지 미국사람들이 아니더군요”. 손수석이 속으로 웃는다.
그렇지만 식구들이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신이 나서 꼬마 손진길이 설명을 계속한다; “다음날 창경원을 두루 구경했는데 ‘비원’이라는 궁중의 비밀정원이 아름다웠고 동물원과 식물원이 볼만했어요. ‘경회루’는 경주 안압지보다 규모가 작았어요”;
“그리고 덕수궁에는 석조건물이 있고 특히 그 대문이 ‘대한문’인데 상당히 우람했어요”;
“다음날에는 서울시내에 있는 신문사를 방문하여 윤전기에서 한꺼번에 엄청난 양의 신문을 인쇄하는 광경을 보았고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언급을 한다; “걸어서 중앙청과 서울역과 시청과 남대문을 두루 구경하고 그 다음날에는 버스로 남산일대를 구경했어요. 특히 중앙청은 그 옛날 조선총독부 건물이라고 하더군요. 건물 자체는 훌륭하고 좋았는데 일제 강점기의 유물이예요”;
“그리고 종로에 있는 여관은 허름하고 음식도 형편 없었어요. 선생님들의 밥상은 잘 차려져 있는데 학생들의 식사는 정말 집밥보다 훨씬 못한 것이었어요. 그러니 모르고 한번은 가지만 두 번은 아니예요”.
그 말을 들은 선더말 아재는 입맛이 쓰다. 수학여행객이 많이 찾아오고 있는 경주시내의 여관들도 그러한 형편이기 때문이다. 관광을 진흥하자면 그러한 숙식문화를 크게 개선하는 것이 우선적인 것 같다. 앞으로 그러한 시대가 오겠지만 당장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1964년이 되자 선더말 아재 손수석이 ‘경북여객 경주영업소’ 소장의 직책을 자신이 맡는다. 그리고 총무의 자리는 고참인 버스 운전수 가운데 한사람을 뽑아서 맡긴다. 버스의 배차시간을 조정하고 차량관리를 하는 직무만 총무가 맡도록 한다. 그리고 소장은 노선의 변경은 물론 인력관리와 재정운용을 전부 맡는다.
그렇게 업무를 조정하고 있으므로 경리가 소장을 직접 보좌하게 된다. 선더말 아재는 경리를 새로 뽑을 때에 가급적 여차장 생활을 한 경력이 있는 자 가운데서 선발하고자 한다. 장부처리와 회계방법을 조금만 교육시키면 경리일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차장 경험이 있어야 버스 영업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고 있어서 경리로서는 적격인 것이다.
그렇게 운전수 가운데서 총무를 선택하고 여차장 가운데서 경리를 선발하고 있기 때문에 버스 운전에 직접 종사하는 직원들의 사기가 오르고 업무 협조가 서로 원활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렇게 ‘블루 칼라’가 ‘화이트 칼라’가 될 수 있다는 사례를 직접 눈으로 보고서 그들이 진급의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버스종사자들에게 일종의 ‘동기부여’가 되고 있다;
직접 총무로 뛸 때보다 선더말 아재는 이제 시간과 여유가 좀 생긴다. 그러므로 그는 대구에 가게 되면 자주 신암동 ‘경북여객 본사’에 들러 1살 아래인 전무 장경국과 이야기를 나눈다. 최근에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것은 새로운 버스노선을 많이 개척하고 버스 대수를 늘리느라고 잠시 재정상황이 좋지가 못했는데 그것을 운 좋게 잘 극복할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 궁금하여 묻고 있는 손수석에게 장경국이 싱긋 웃으면서 조용히 말한다; “뭐, 딴 비결이 아니고 처음에 은행을 찾아갔더니 융자가 어렵다고 해서 그 다음에 새로 생긴 ‘상호신용금고’를 찾아갔어요. 그랬더니 조금 이자율이 높기는 하지만 담보가 확실하니까 금방 쉽게 융자를 해주더군요. 거참, 사업하는 사람들이 잠시 자금을 융통하기에는 꼭 필요한 금융기관이더군요”.
선더말 아재 손수석이 더 궁금한 점을 물어본다; “그 ‘상호신용금고’는 개인 전주가 ‘일수놀이’하는 것과는 어떻게 다른데요?”. 장경국이 나름대로 대답을 한다; “일수놀이하는 사채업자들하고는 두가지 점에서 전혀 달라요. 첫째로, 금리가 훨씬 낮아요. 둘째로, 개인이 아니고 일종의 금융기관으로서 나름대로 제도적인 장치를 갖추고 있어요”.
손수석은 그동안 은행에 돈만 맡길 줄 알았지 융자를 받아본 경험이 없다. 그러므로 사채업자나 상호신용금고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문외한이다. 언뜻 들은 장경국의 말을 정리하면 제도적인 금융기관으로 은행과 상호신용금고가 있으며 그 다음에 제도적인 장치가 없는 사채업자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호신용금고는 어떻게 설립을 하고 또한 융자업무를 하는 것일까?
그 점이 궁금하여 장경국이 소개를 한 대구의 그 ‘상호신용금고’를 찾아가서 자세하게 설명을 듣는다. 제도적인 설립의 요건이 그렇게 까다롭지가 않다. 그리고 지역의 부자들이 전주가 되어 그 돈을 제도적으로 운영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북여객 경주영업소’에 버스를 지입한 차주들이 있는데 그들이 그렇게 합자회사인 상호신용금고를 만들고 자신의 지분만큼 투자를 하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된 선더말 아재가 몇 달 동안 여러가지 궁리를 한다.
한번은 팔우정 근처 가까이 살고 있는 최민호의 집을 찾았다. 그는 한국전쟁 때에 고향인 경기도 원당을 떠나서 경주에 온 다음에는 자녀들 교육을 경주에서 시키고 있다. 그리고 장성한 자녀들을 서울로 보내고 있다. 그러면서 일년에 여러 차례 서울을 방문한다. 그 먼 길을 어째서 자주 가고 오는지 궁금하여 우연히 선더말 아재가 물어본다.
그러자 최민호가 웃으면서 말한다; “선더말 아재는 내가 서울 인근 원당에 살고 있을 때에 무슨 직종에 종사를 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구만. 나는 시장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금융조합에서 오래 일을 했지. 해방후에 상인들이 돈이 많지가 않았기에 점포를 열 때에는 곗돈을 끌어 모으고 은행에서 융자를 얻어도 늘 자본이 모자랐지. 그래서 때로는 사채업자들의 일숫돈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이 망하는 길이야. 그래서 성공한 상인들이 스스로 금융조합을 만들어서 운영을 했는데 내가 그 업무에 종사를 했어”.
새로운 사업에 관하여 자문을 받기에 합당한 인물이 공교롭게도 손수석 가까이에 살고 있다. 그 사실을 그가 모르고 있었을 따름이다. 최민호는 손수석보다 10살이 연상이다. 그러므로 한국전쟁 때 벌써 30대 후반이다. 그때까지 그 업종에 종사를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이 어떻게 된 것일까? 궁금하여 묻는 손수석에게 최민호가 자세하게 설명을 해준다.
그의 설명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갑자기 1950년 6월에 전쟁이 터지자 융자한 돈이 회수가 안된다. 시장 자체가 없어진다. 그래서 그는 가족을 이끌고 경주로 피난한 것이다. 둘째, 그의 장남이 공부를 마치고 고향 원당으로 돌아가서 부친이 하던 사업을 다시 일구기 시작한다. 그 결과 시장이 다시 형성되면서 금융조합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최민호는 장남의 일을 도와 주기 위하여 가끔씩 서울을 방문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선더말 아재는 최민호로부터 그가 알고 싶은 상세한 실무적인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그러면서 ‘경북상호신용금고’를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다. 그는 자신이 세운 계획을 경북여객 경주영업소에 버스를 지입하고 있는 차주들에게 설명하고자 한다. 그때가 1964년 봄이다. 자세한 설명을 들은 경주의 부자들이 좋다고 한다. 왜냐하면, 제3공화국이 경제개발을 추진하는데 그들도 일조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이수학 사장이 하나의 안건을 상정한다. 그것은 ‘경주상공회의소 가입의 건’이다. 이 사장이 그동안 개인적으로 경주상공회의소의 회장인 도 사장의 권유로 그 모임에 참여를 하고 있는데 앞으로 그 모임이 활성화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실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제3공화국이 각 지역의 상공회의소를 활성화하여 지역경제를 살리고자 애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주의 상인들에게 필요한 그러한 ‘상호신용금고’ 사업을 하려고 하면 출자자들이 먼저 ‘경주상공회의소’에 가입하고 그 산하에서 그러한 금융조합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겠다는 것이다. 참으로 좋은 의견이다. 그래서 그렇게 추진하기로 모두들 찬성한다.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어 1964년 여름에는 ‘경북상호신용금고’가 ‘경주상공회의소’ 옆방에서 그 간판을 붙이게 된다. 참고로, 당시의 경북상호신용금고와 비슷한 것이 있는데 그 로고가 다음과 같다;
선더말 아재 손수석은 경주상공회의소 부회장인 이수학 사장을 경북상호신용금고의 사장으로 하고 경주주유소의 권영수씨를 부사장으로 삼는다. 그리고 자신은 그 밑에서 총무의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 회사를 움직이는 주역이 손수석이다.
선더말 아재는 신용금고의 일에 분주하다. 따라서 더 이상 경북여객 경주영업소의 일에 신경을 쓸 수가 없다. 그에 따라 권영수 사장이 영업소장의 직책을 맡게 된다. 그는 신용금고 부사장의 일이 별로 많지 아니하여 그것이 가능한 것이다.
신용금고의 총무인 손수석은 3명의 서기와 함께 예금 및 대부업무를 맡고 있다. 그들은 주로 투자자들이 출자한 돈과 상인들의 예금을 가지고 시장의 상인들에게 담보가 확실한 경우 필요한 대부를 해주고 있다.
그렇게 ‘경북상호신용금고’가 제 역할을 하게 되자 시장통에서 개인적으로 영위하던 사채업이 자취를 감추게 된다. 상인들이 이자율이 훨씬 적은 상호신용금고의 대부를 선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용금고가 잘 굴러가고 계속 흑자를 내게 되자 자본 참여하는 부자들이 늘어난다.
그리고 1967년에는 경주지역에서 깨끗한 부자의 본이 되고 있던 이수학 사장이 경주상공회의소 회장이 된다. 그는 1982년까지 참으로 오랜 세월 경주상공회의소 회장으로서 지역경제의 활성화에 이바지하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이수학 회장의 모습이 다음과 같다;
그리고 엄청 발전한 오늘날의 ‘경주상공회의소’의 전경이 다음과 같다;
'선더말 아재(손진길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더말 아재18(작성자; 손진길) (0) | 2021.10.08 |
---|---|
선더말 아재17(작성자; 손진길) (0) | 2021.10.08 |
선더말 아재15(작성자; 손진길) (0) | 2021.10.07 |
선더말 아재14(작성자; 손진길) (0) | 2021.10.07 |
선더말 아재13(작성자; 손진길) (0) | 2021.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