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 할매(손진길 소설)

봉천 할매53(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10. 4. 23:58

봉천 할매53(작성자; 손진길)

 

9. 1953년을 먼저 마무리하는 봉천 할매

 

1953년 2월 하순에 봉천 할매 정애라가 모량지서 관사에 있는 아들 손수석의 집에 들린다. 벌써 63세의 할머니인 정애라는 나이가 더 들어 보인다. 슬하에  5남 1녀를 낳고 남편 손영주와 함께 살면서 몸과 마음의 고생이 상당했기에 그러한 것이다.

그녀는 사실 경주 읍내의 좋은 주택지 성동에서 자랐고 부모님이 웃시장에서 국밥집을 오래 경영하였기에 상당히 유복한 집안의 딸이었다. 시집도 내남 너븐들 천석꾼 집안이기에 살림이 넉넉했다. 게다가 남편 손영주는 자신보다 7살이나 어린 처녀 정애라를 오래 마음에 품고 있었던 노총각이라 아내사랑이 지극했다;

그러나 남편 손영주의 성품이 아내 정애라에게 고생을 초래한다. 손영주는 그 성품이 천성적으로 유하다. 그리고 불쌍한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앞뒤 가리지 않고 퍼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 점은 손영주의 양아버지인 서배 할배와 비교하면 영 딴판이다. 서배 할배가 자수성가형의 단단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손영주는 물려 받은 재산도 착실하게 지키지를 못하는 무른 성격이다.

물론 시집의 천석꾼 살림이 절단이 난 것은 천재지변 때문이다. 1925년 을축년에 서너 차례 대홍수가 있었는데 한강은 물론 낙동강과 형산강 유역이 크게 범람했다. 특히 형산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여러 하천의 유역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있던 내남 너븐들의 대지주 손상훈은 개천의 범람으로 말미암아 절반 이상의 전답이 자갈과 진흙으로 뒤덮이게 되고 만다.

천석꾼 살림이 400석 남짓으로 엄청 줄어들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양자인 손영주의 구휼활동은 계속된다. 그는 저녁에 동네 어구에 나가서 밥짓는 연기가 없는 집을 파악하고 그 밤에 자기 집의 곡간에서 쌀을 자루에 담아 그 집에 몰래 가져다 주는 그러한 사람이다;

일제의 강점기에 그러한 적선행위를 계속하다가 그만 생활이 한없이 궁색해지고 만다. 손영주 자신은 일가친척과 가난한 이웃을 구휼하였지만 이웃들은 손영주의 집을 구휼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끝까지 그러한 이웃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착하게 살아가는 참으로 마음씨가 너무 좋은 인물이 손영주이다.

그러한 성품의 남편과 함께 살아오면서 슬하에 5남 1녀나 두고 있는 봉천 할매 정애라이기에 그 인생이 참으로 피곤하고 마음고생이 심하다. 그런데 절망에 빠진 그녀를 구해준 사람이 바로 셋째아들인 손수석이다. 정애라의 시어머니인 서배 할매 이채령의 등에 업혀서 자랐으며 어릴 때부터 조모를 엄청 따랐던 손수석은 할머니 이채령의 덕택에 심상소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그리고 손수석은 조모인 서배 할매 이채령의 유언에 따라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서 고학을 하고 북해도 탄광에 서기로 취직하여 무섭게 돈을 벌기 시작했다. 사업수완이 뛰어난 아들 손수석이 벌어다 주는 그 돈으로 천석꾼의 살림을 되찾게 된 봉천 할매 정애라이다. 그녀는 아들 하나 잘 키운 덕을 아주 톡톡하게 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어머니 이채령의 은덕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봉천 할매 정애라가 공직에 나가 있는 아들 곧 모량지서장 손수석을 찾아가는 발걸음은 행복하다. 아직 지서에서 공무를 수행하고 있는 아들을 바로 만날 수는 없다. 그래서 내남에서 30리 길을 걸어온 봉천 할매 정애라는 아들 손수석의 사택을 먼저 찾아간다. 며느리 고복수가 손자 둘을 보면서 집을 지키고 있다.

손수석의 장남 손진목은 벌써 6살이다. 그리고 차남인 손진길은 태어난지 2달남짓된 아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나이로는 해를 넘겼기에 벌써 2살로 간주가 된다. 아직 늦겨울의 추위가 상당하기에 고복수는 아기에게 찬바람을 쏘이지 아니하려고 한다.

그래서 부엌일을 도와주고 있는 연자에게 군불을 계속 지펴 달라고 하여 따뜻한 안방에서 마냥 지내고 있다. 그러므로 고복수는 시어머니인 봉천 할매가 집으로 찾아오자 뜨뜻한 안방으로 모신다. 찬바람을 맞으면서 30리길을 걸어온 정애라는 그 따뜻한 방에 들어오자 그만 심신이 노곤해지면서 잠이 들고 만다.

봉천 할매가 실컷 자고 나서 눈을 뜨자 어느 사이에 저녁이다.  아들 손수석이 퇴근을 하여 집에 돌아와 있다. 그리고 안방으로 밥상이 들어온다. 손수석이 자리에서 눈을 뜨시는 모친을 보고서 빙긋이 웃으면서 말한다; “어머니, 먼 길 오시느라 무척 고단하셨겠어요… 곤히 주무시기에 제가 집사람에게 깨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제 피로가 좀 풀리십니까?”.

봉천 할매 정애라는 아들 손수석을 보자 마음이 든든하다. 그래서 기분 좋게 말한다; “수석아, 그래 근무는 잘하고 온거냐? 여전히 공비들이 날뛰고 있지?”. 손수석이 답을 한다; “여기 모량 지역에는 이제 공비들의 출몰이 뜸하게 됐어요. 이번 겨울이 워낙 추워서 따뜻한 남쪽으로 공비들이 많이 이동을 한 것 같아요”.

그 말을 듣자 봉천 할매가 고개를 끄떡인다. 그리고 손수석과 겸상을 하면서 말한다; “그런데 수석아, 우리 집안에 경사가 났다. 손수태가 대구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지리학과에 합격을 했다. 이제 대학생이 우리 가문에서 탄생한 것이야. 모두 수석이 네 덕분이다. 네가 벌어온 돈으로 안심하고 공부를 하여 대학에 합격을 했으니 말이다”.    

손수석이 그 공을 모친과 아내에게 돌린다; “저보다야 손수태가 공부를 많이 할 수 있도록 뜨신 밥을 지어준 어머니와 집사람 덕분이지요. 이제는 수태가 대구에 가서 대학을 다녀야 되겠네요”. 그 말을 듣자 봉천 할매가 말한다; “대구에는 부자들이 많아서 수태가 부잣집 자녀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주는 조건으로 숙식을 해결하겠다고 말하더라. 그래도 대학에 다니자면 돈이 많이 들게야…”.

그 말을 듣자 손수석이 기분 좋게 말한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수태의 학비와 생활비는 넉넉하게 지원을 하겠습니다. 그러니 남의 집 자녀를 가르치는 일에 시간을 너무 빼앗기지 말고 학교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전해 주세요”. 그 말을 들은 봉천 할매는 참으로 행복하다;

얼마 전에 넷째 아들인 손수권이를 장가 보냈고 이제는 막내아들 손수태가 대학에 진학을 했으며 또한 수태에게 학비와 생활비를 전부 대어 주겠다는 가주 손수석의 답변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남편 손영주가 자신에게 남기고 간 자식들의 뒷처리를 거의 마감한 것만 같다. 그 안도감 때문인지 봉천 할매 정애라는 63세에 불과한 나이에 벌써 눈꺼풀이 자꾸만 무거워지고 몸이 계속 노곤해지는 것만 같다.

1953년 3월이 되자 경주경찰서장이 여러 지서장들을 모아 놓고 경찰간부들과 함께 연석회의를 개최한다. 각 지서장의 보고가 먼저 있고 난 다음에 서장의 지시사항과 일장훈시가 있다. 모두를 귀를 기울여 경청한다;

그 자리에서 서장의 첫마디가 다음과 같다; “현재 국가적으로는 세가지의 당면문제를 해결하고자 대통령 이하 모든 공무원들이 애를 쓰고 있습니다. 첫째,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을 반대하고 이번 기회에 조국을 통일하고자 미국과 유엔에 적극 외교를 펴고 있지만 그 성사여부가 불투명하오. 그러므로 우리의 입장을 어떻게 강력하게 반영하는가 하는 것이 당면 문제인 것이요”.

서장은 잠시 숨을 쉰 다음에 이어서 말한다; “둘째, 우리의 의사와 상관이 없이 휴전협정이 이루어질 경우 전쟁으로 파괴가 된 대한민국을 어떻게 재건하느냐가 또 하나의 문제요.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미국을 위시한 우방으로부터 충분한 원조의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 필요한 것이오”.

서장이 간부들과 지서장들의 얼굴을 한번 살핀 다음에 이어서 말한다; “셋째, 휴전과 정전은 모두 잠시 전투행위를 중지한다는 것에 불과하오. 그러므로 언제라도 선전포고가 없이 전투가 재개될 수 있는 것을 말하오. 그에 대비하자면 무엇보다 강력한 우방의 지원이 상시 필요한 법이오. 따라서 우리는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어야 하는 당면과제를 안고 있다고 하겠오”.

참으로 유식한 발언이다. 모량지서장인 손수석 경사는 서장이 공부를 많이 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대한민국이 처한 지금의 현안문제가 무엇인지 그 맥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서장이 지서장들에게 당부의 말을 짧게 한다; “일선 지서장들은 공비들의 야습으로부터 관내의 주민들을 지키고 보호하는데 계속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 주시오. 다시 한번 부탁을 드리는 바이오. 이상”.

서장의 훈시가 끝났으므로 여러 지서장들과 함께 손수석이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한다. 그때 갑자기 서장이 손수석 경사를 보고서 말한다; “손경사는 잠깐 나를 좀 만나고 가시오”. 무슨 일일까? 궁금해하는 손수석은 회의가 모두 끝난 다음에 회의실에서 나와 개인적으로 서장 집무실로 찾아간다.

손수석 경사를 만나자 서장이 말한다; “손경사는 어째서 경찰간부인 경위가 되고자 승진시험을 치지 아니하고 있오. 이제 전쟁도 거의 끝나가고 있으니 지서장들이 모두 본서로 들어와서 진급시험을 준비하겠다고 아단들인데 말이요... 어째 경위가 되고 싶지 아니한 것이요?”.

다짜고짜 직선적으로 묻고 있는 서장이다. 손수석 경사는 솔직하게 답변한다; “저는 이제 나이가 31살입니다. 아직 경찰간부인 경위가 되기에는 어리다고 생각합니다. 몇 년 후에 진급시험을 쳐보고자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장이 다소 의아하여 재삼 묻는다; “그 말이 진심이요?”. 손수석이 분명하게 즉답을 한다; “네, 서장님”.

그 말을 듣자 서장이 말한다; “그렇다면 좋소. 경사들이 서로 맡지 아니하려고 하는 바쁜 자리가 본서에 몇 개 있오. 그 가운데 보안계장 자리가 비어 있으니 손경사가 그 직책을 맡아 주시오”. 손수석이 경례를 하면서 말한다; “네, 서장님, 잘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서장은 성격이 급한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틀 후에 바로 본서 보안계장으로 발령이 난다. 빨리 모량지서장의 업무를 후임에게 인계하고 관사를 비워주어야 한다. 일주일 만에 그 일을 마치느라 상당히 바쁘다. 어쨌든 1953년 3월 10일께부터는 경주경찰서에서 손수석이 다시 근무하게 된다;

그런데 아들이 둘이나 되고 또 부엌일을 거들고 있는 연자까지 있으니 이제는 식구가 적지 않다. 일단 급한 김에 경주 경찰서 가까이에 살림집을 구하기는 했지만 오래 거주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그래서 손수석은 그때부터 경찰서에서 퇴근하면 경주의 중심지 주택가를 서서히 살펴본다. 별로 크지가 않으면서 셋 정도 방이 있는 아담한 주택이 어느 골목 안전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지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결과 한달 후에 손수석이 발견하여 계약한 집이 경주읍 중심지 노동동에 있는 주택이다. 두 달 후에 이사를 한다. 그 집이 거의 골목 끝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아이들이 안전하게 뛰놀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리고 아랫시장이 그다지 멀지가 않고 경주 읍내 중심에 있는 월성국민학교도 아이들이 걸어 다닐 수가 있다;

그 집은 신기하게도 경주 읍내의 ‘산내여관’과 이웃하고 있다. 그 여관을 넘어서면 바로 경주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인 ‘경주제일교회’이다;

 따라서 새벽마다 시골의 닭 울음소리 대신에 제일교회의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첫새벽에 울리는 그 소리가 처음에는 소음인 것만 같더니 자꾸 들으니 그것도 정겹게 느껴진다;

6살이된 손수석의 맏아들 손진목은 그 노동집에서 동무들과 마음껏 뛰놀게 된다. 하루 종일 동무들과 함께 골목에서 놀고 또한 동무집에서 노느라고 정신이 없다. 경주는 한국전쟁의 피해를 전혀 입지 아니한 지역이라 동네가 깨끗하고 집들이 온전하다. 따라서 돈이 있는 부자들이 경주 중심지의 주택가로 몰리고 있다.

그러한 좋은 지역에서 손진목이 자라나면서 자신이 경찰경찰서 보안계장의 아들이므로 동무들에게 제법 위세를 부린다. 부친이 경찰이지 자신은 경찰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네 꼬마들은 부친의 벼슬이 마치 자신의 것인 줄 알고 서로 자랑을 한다. 그러한 동무들 가운데에는 장학사의 아들도 있고 서울 부자 양반의 아들도 있다. 참으로 다양한 부자들이 살고 있는 동네가 경주읍 노동동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