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 할매(손진길 소설)

봉천 할매51(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10. 4. 23:40

봉천 할매51(작성자; 손진길)

 

봉천 할매의 셋째아들인 손수석이 경찰에 투신한 때가 1947년 11월 하순이다. 처음에는 미군정청 경무국 소속의 ‘건국경찰’이었는데 1948년 8월 15일에 민주적인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이 되자 ‘민주경찰’로 그 신분이 바뀌었다. 그가 경찰관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그때부터 관내의 치안유지를 위하여 마을과 경찰서를 습격하고 있는 ‘공비’들과 전투를 계속 치르고 있다;

그러므로 1952년 8월말부터 ‘모량지서장’으로 근무를 하면서도 손수석은 언제나 칼빈 총을 어깨에 매고 자전거를 타고서 출퇴근을 하고 있다. 관내에 공비가 출몰했다고 하면 즉시 출동이 가능하도록 평소 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손수석의 가족이 모량지서의 관사로 이사를 하게 되자 막내 동생인 손수태는 경주고등학교에서 더 열심히 공부를 하기 위하여 학교 인근 사리지역에 방을 하나 얻었다.

그러므로 봉천 할매가 주로 그곳에 머물면서 막내아들의 밥도 해주고 그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손수태가 학교에서 수업을 받는 동안에는 봉천 할매가 자유롭다. 따라서 그녀는 경주시내 중심지에서 아직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친구 오예은을 만나서 담소를 나누기를 좋아한다. 그 결과 1952년 9월말까지 얻어 들은 이야기가 참 많다. 그녀는 그 정보를 공직에 나가 있는 아들 손수석에게 전해주고자 한다.

손수석 경사는 모친 봉천 할매 덕택에 쉽게 고급 정보를 얻고 있는 셈이다. 그 정보를 그는 피난민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검증하기도 하고 또한 경찰에서 공식적으로 얻은 정보와 비교도 한다. 손수석은 그렇게 한국전쟁에 관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 대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소련 스탈린의 군사지원을 받은 김일성은 강력한 인민군을 양성하여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하고자 획책한다. 그 결과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하여 전면남침에 나서고 만다. 나중에 수집된 첩보에 따르면 당시 김일성의 작전명이 ‘폭풍’이고 인민군에게 시달한 그의 ‘총 공격 명령서’의 일부내용이 다음과 같다;

 둘째로, 대한민국의 군부는 큰소리를 쳤지만 실제로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세계최강인 미국의 군사력만 믿고서 ‘미군의 우산 아래에서 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북한 인민군의 움직임이 예사롭지가 않다고 하는 일선부대의 정탐보고까지 무시했다. 설마 북한의 인민군이 미국이 보호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무모하게 총공격하기야 하겠느냐? 라고 단정하면서 그러한 확신을 민간에게 전파한 그들이다.

그 결과 너무나 빨리 인민군에게 밀리어 6월 27일 밤까지 서을 남쪽으로 후퇴하면서 28일 새벽에는 한강 철교까지 폭파해버리고 만다. 적이 건너오는 교량을 미리 없앤다고 하는 군사작전이라고 말하지만 그 때문에 서울을 벗어나려는 100만명 이상의 피난민들의 발이 적의 치하에 묶이고 만 것이다;

셋째로, 서울을 벗어나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재빨리 미국과 유엔에 도움을 요청한다. 미국 대통령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빠르게 조치를 취한다. 유엔의 안전보장이사회의 의결을 받아내고 신속하게 7월 7일에 미군이 앞장을 서는 ‘유엔군사령부’를 설치한다. 유엔군의 최고지휘관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극동사령관인 맥아더 원수이다.

넷째로, 그렇게 되자 미국은 유엔군이 한국군까지 지휘할 수 있도록 작전지휘권한을 유엔군사령관에게 넘기라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요구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아무런 단서도 없이 7월 14일에 군통수권자인 한국대통령이 지니고 있는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넘기고 만다;

그는 한국전쟁만 끝나면 자연히 작전지휘권을 되돌려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 그것은 종전선언이 없는 이상 불가능한 것으로 해석이 되고 만다. 휴전이나 정전인 경우는 전쟁행위를 잠시 쉬고 있는 상태이므로 언제라도 선전포고 없이 전쟁활동의 재개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종전협정이 없는 이상 유엔군사령관이 쥐고 있는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의 회수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다섯째로,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까지 가져갔으나 미군이 앞장을 서고 있는 유엔군은 북한의 인민군에게 계속 밀리고 있다. 7월말에 대구와 부산을 둘러싸고 있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인민군과 대치를 하게 된다. 그런데 북한에서의 보급선이 길어진 인민군이 8월이 되자 사기가 떨어진다. 그때부터 맥아더 사령관은 인민군을 단숨에 물리칠 모험적인 ‘인천상륙작전’을 대담하게 전개한다. 적의 허리를 끊어 놓고 낙동강에서부터 일시에 밀고 올라가는 것이다;

그 결과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하고 38도선까지 진격한다.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은 전쟁 직전의 상태를 회복하였기에 정전협상을 생각한다. 그것을 결코 용인할 수 없는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기로 하고 10월 1일에 한국군에게 북진을 명령한다. 유엔군도 어쩔 수 없이 상부의 지시을 받아 10월 7일에 북진에 나선다. 파죽지세로 10월 26일에 한국군 선봉부대가 압록강에 발을 담그게 되는 것이다.

여섯째로, 압록강 상류 남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강계’에 임시수도를 설치한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그러나 별로 반응이 없다. 다급해진 김일성은 사력을 다하여 중공의 모택동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미군을 위시한 연합군이 북한을 점령하고 차제에 역시 공산주의 국가인 중공을 없애고자 중국에 침입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미군과 만주에서 대치를 하는 것보다는 북한을 사이에 두고 38도선에서 대치를 하는 것이 안보상 유리하다고 판단한 모택동이 10월 19일에 중공군 26만명을 압록강으로 파견하고 이어서 대군을 보내어 ‘강계’의 김일성 정권을 보호한다. 그 결과 ‘연합사령부’를 설치하고 중공군과 인민군이 개마고원을 타고서 남하를 하는 것이다;

일곱째로, 엄청난 수의 중공군이 개미떼처럼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서 맥아더 사령관은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에 일본사람들이 일본 열도를 지키고자 죽창을 가지고 옥쇄작전을 펴던 것을 기억한다. 그 당시 미군을 상륙시키면 100만명 이상이 희생당할 것임을 알게 된 미국의 지도자들은 핵폭탄을 투하하여 일제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낸 것이다.

이제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격파하기 위하여 똑 같은 전략을 사용할 때라고 맥아더 사령관이 판단한다. 그러나 일제에 대한 두 차례 핵폭탄이 초래한 후유증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은 원자탄의 재사용을 극구 피하고자 한다.

그의 논리는 만약 만주에 맥아더 사령관의 말대로 원폭을 할 경우 소련군의 참전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제3차대전이 발생할 것이다. 더구나 미국의 법으로는 핵폭탄의 사용은 민간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다. 그 법의 취지를 벗어나서 대통령이 자신의 고유권한을 유엔군사령관인 맥아더에게 군사적인 목적으로 함부로 위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오산과 삼척의 경계선으로 밀린 맥아더 사령관이 끝까지 원폭사용권을 달라고 요구하자 마침내 트루만 대통령이 미군부의 책임자들과 협의를 한 후에 전쟁수행 중에 있는 맥아더 사령관을 현지에서 1951년 4월에 해임하고 만다. 그리고 트루만 대통령은 미군과 유엔군이 그해 5월에 38도선까지 밀고 올라간 것을 보고서는 1951년 7월부터 북한의 인민군 및 중공군의 지휘관들과 정전협상을 시도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때부터 1년 2개월이 지난 1952년 9월말 현재까지 지루하게 정전협상이 계속되고 있다;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과 중공군은 어차피 남의 나라 전쟁이므로 빨리 휴전을 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한반도에 살고 있는 북한과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의 입장은 그것이 아니다.

너무나 많은 전쟁의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이 그냥 전쟁을 끝내고 나면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정치적인 명분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차제에 전쟁을 통하여 한반도의 통일을 거머쥐어야 한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는데 있어서 충분한 원조를 얻을 수 있도록 국제적인 원조의 약속을 확보해야 하고 또한 전쟁재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손수석은 향후 그러한 수순으로 휴전협상이 진행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것이 그가 모든 정보를 총 정리하여 얻고 있는 나름대로의 결론인 것이다. 그러한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고 나자 이제는 그 다음에 자신이 어떠한 일을 해야만 할지를 생각한다.

이제 아내 고복수가 두번째 아기를 임신하고 있다. 작년에 아기를 유산했기에 신경이 많이 쓰인다. 따라서 손수석은 먼저 아내가 안전하게 몸조리를 하고 아기를 잘 출산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한다. 그래서 두가지 조치를 취한다; 하나는, 경주시장에서 몸보신을 할 수 있는 음식재료를 구입하여 온다. 예를 들면, 쇠고기와 잉어가 그러한 것이다;

또 하나는, 자신의 전답을 부치고 있는 소작농 가운데 딸이 많은 집안에서 부엌일을 도와줄 수 있는 처녀를 데리고 온 것이다. 아내 고복수로 하여금 아기를 잘 배술릴 수 있도록 엔간한 부엌일은 그 처녀에게 맡기고자 한다. 그 대신에 그 소작인의 집에는 소작할 전답을 더 많이 주는 한편 소를 몇 마리 사주고 훗날 그 딸을 좋은 데에 시집 보낼 수 있도록 결혼비용 일체를 대주기로 했다;

그러한 좋은 조건을 제시하자 천북 화산에 살고 있는 윗동서가 얼른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자신의 일가 가운데 한 딸을 골라서 데리고 온다. 같은 값이면 모르는 남보다는 아는 일가가 낫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데리고 온 것이다. 그래서 손수석은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손수석은 윗동서 손태호에게 묻는다; “화산과 그 인근에 팔려고 내놓은 산지나 전답이 더러 있습니까?”. 손태호가 신이 나서 답한다; “있다 마다. 내가 거래를 성립시킬 터이니 얼마나 필요한지 말만 하시게나…”. 손수석이 싱긋 웃으면서 말한다; “논을 한 500마지기 더 사고 또한 연목으로 쓸 수 있는 나무가 자라고 있는 좋은 산지를 몇 만평 구입했으면 하는데 그곳에 그런 산이 있을까요?”.

눈치가 상당히 빠른 손태호가 얼른 말한다; “아, 벌목할 수 있는 삼판을 말하는 구만. 그런 산이 인근에 있으니 내가 알아보아 주겠네. 그리고 전답이야 더 구하기가 쉽지. 언제쯤 매물내역을 가지고 올까?”. 손수석이 선선히 대답한다; “형님이 보고 좋은 것이 있으면 언제라도 내게 알려주세요. 그렇게 급한 일은 아니니까요…”.

그렇게 동서간에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1952년 10월과 11월달이 지나가고 있다. 이제는 추워지는 날씨이다. 아무래도 손수석의 둘째아이는 겨울에 태어날 모양이다. 그리고 손수석의 아내의 부엌일을 도와주고 있는 처녀는 참으로 심성이 곱다. 그 이름도 ‘연자’라고 한다. 덕분에 고복수는 좋은 음식을 먹고 편히 쉬면서 뱃속의 아기를 잘 돌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