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 할매48(작성자; 손진길)
1951년 7월 7일이 되자 안강지서장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손수석을 경주경찰서장이 호출한다. 그리고 서장실에서 은근히 말한다; “손경사, 자네는 경사가 된 지 9개월이 넘었어. 일선지서에서 지서장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으므로 일년이 지나면 경찰간부인 경위로 진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야. 그런데 경위가 되자면 진급시험을 보아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지서가 아니라 본서에서 근무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게야. 그래서 내가 자네를 본서에 계장으로 불러 들이려고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인 손수석은 서장의 말이 부하인 자신의 의견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파악한다. 그리고 경사인 손수석 자신의 편의를 위한 것도 아니다. 단지 서장은 자신의 손발이 되어줄 충직한 부하를 본서의 계장 자리에 앉히고 싶은 것이다. 그쯤 짐작을 하고서 손수석이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서장님, 무슨 일이든지 어떤 자리든지 맡겨만 주시면 성심성의껏 적극 보좌를 하겠습니다. 그것이 부하직원인 저의 도리인 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서장이 얼굴에 만족한 웃음기를 띄면서 말한다; “알겠네. 그렇다면 안강지서에서 짐을 정리하고 경주 읍내로 이사하여 일주일 후부터 본서의 병사계장 일을 맡도록 하게. 그렇게 내가 인사발령을 낼 것이니 열심히 일해보도록 하게나”. 서장은 기분이 좋은지 손수석 경사에게 악수까지 청한다. 그동안 병사계 일이 많아서 본서의 경사들이 그 직책을 서로 맡지 아니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안강지서의 지서장 사택으로 돌아온 손수석은 아내 고복수에게 경주본서로 곧 발령이 날 것이니 경주 읍내로 이사를 갈 준비를 하라고 말한다. 경찰의 아내인 고복수는 이삿짐을 챙기는 데에는 이제 이력이 났다. 그러므로 이사준비를 하는 것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경주 읍내로 이사를 한다고 하니 그것이 마음에 든다. 친정 가까이 가게 되는 것이다.
손수석은 경주로 이사를 하고 본서에서 근무할 때까지는 일주일간 시간이 있다. 그래서 후임자에게 업무를 인수 인계할 준비를 일찍 마치고 관내를 한번 둘러본다. 안강의 외곽에 살고 있는 사촌 누나 손미자의 집을 먼저 방문한다. 그들 내외는 참으로 부지런하게 살고 있다. 집 앞에 딸려 있는 그 넓은 밭을 일구어 농사를 얼마나 잘 짓고 있는지 모른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손수석은 마음이 흐뭇하다.
손미자 부부는 7월 10일 더운 여름 날씨라 손수석을 시원한 툇마루에 앉게 하고 그에게 자신들이 재배한 토마토를 대접한다. 토마토가 조생종이며 종자가 좋아 보인다;
그래서 손수석이 묻는다; “자형은 서울에서 품꾼으로 오래 일했다고 하더니 어떻게 농사를 잘 지으십니까? 토마토가 벌써 생산이 되다니… 종자도 좋고 맛이 좋아요”. 그 말을 듣자 이종태가 ‘허허’라고 웃으면서 답한다; “처남, 나도 고향인 청도에서 한때 농사를 짓던 사람이야. 결혼을 하고 분가를 하게 되자 서울로 올라간 것이지 그 전에는 논농사고 밭농사고 모두 열심히 지었지…”.
그 말을 듣자 손수석이 고개를 끄떡인다. 그러자 사촌 누나인 손미자가 말을 한다; “수석아, 너는 이 누이가 너븐들에서 머슴처럼 일을 잘한 것을 모르지. 우리집에서는 아들이 없고 딸만 4이니 맏이인 언니와 둘째인 나를 아들처럼 부려먹었다고... 그러니 나도 밭일이라면 자신이 있지. 호호호…”. 그 말을 들은 손수석은 사촌 누나가 그 옛날 웃음을 되찾고 있는 것이 기쁘다.
그래서 물어본다; “인우는 학교에서 공부를 잘 따라가고 있습니까? 늦은 나이에 입학을 하여 공부하기가 힘이 들텐데요…”. 손미자가 즉시 답을 한다; “그렇게 머리가 좋은 아이는 아니지만 인우는 끈기가 있어. 그래서 집에 와서도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지. 제 앞은 넉넉히 닦을 아이니까 염려가 없어. 게다가 우리 인우가 효자이지…”.
그 말을 듣고서 이종태가 고개를 끄떡인다. 부모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성품의 아이가 맞다. 손수석은 ‘가난한 집에 효자가 난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 집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래서 미리 언질을 준다; “제가 며칠 있으면 경주 읍내로 이사를 할 것 같아요. 안강이 경주 읍내에서 아주 멀지는 않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본서로 저를 찾아오시면 됩니다”.
그러자 이종태가 말한다; “처남, 그렇다면 자네에게 빌린 돈은 언제 갚으면 되는가?”. 그 말을 듣자 손수석이 답한다; “매형, 제가 나이는 적어도 내남 월성 손씨의 가주입니다. 일가들을 구휼하고 구제하는 것이 가주의 책무이지요. 그러므로 그 돈은 갚지 아니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이 집과 전답도 제가 평생 빌려드리는 것입니다. 열심히 생활하셔서 자손에게 잘 물려주십시오. 그리고 재산을 모아 어려운 이웃에게 그 빚을 갚으시기 바랍니다. 적어도 자신의 친척이 밥을 굶도록 만들어서는 안되지요…”.
그 말을 듣자 이종태 내외는 목이 매인다. 그래서 결심을 한다. 그러한 가주 손수석이 살아 있는 한 그 집을 위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려고 하는 것이다. 손수석은 그 집을 떠나서 관내를 다시 순찰한다. 아름다운 고장이다. 이제 본서로 돌아가면 다시는 이곳을 찾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눈에 안강과 그 멀리 떨어져 있는 기계까지 바라보는 것이다.
정확하게 손수석 경사는 1951년 7월 15일부터 본서에서 병사계장으로 일을 하게 된다. 그는 소싯적에 일본 북해도 석탄회사에서 경리와 서기일을 오래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엔간한 행정업무에는 도가 튼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서류정리와 공문서를 처리하는 솜씨가 아주 빠르다. 한달간 밤 늦게까지 부하경찰들과 함께 일을 처리했더니 그동안 정리되지 아니했던 서류들이 모두 제자리를 찾아 정리가 되고 만다.
그렇게 바쁜 서류정리를 모두 끝낸 다음날 경주 출신 군인들에 대한 전사통지서가 무더기로 군부대에서 경찰로 넘어 온다. 그 통지서를 분류하여 대장에 정리하는 것이 병사계의 직무중의 하나이다. 부하직원이 대장정리를 끝내고서 계장인 손수석 경사에게 올린다. 손수석이 그 대장에 정리가 되어 있는 인적사항을 쭈욱 살펴본다. 그러던 손수석의 눈이 갑자기 커지고 있다;
중부전선 양구지역의 전투에서 사망한 전사자 명단 가운데 ‘장매 마을 고호달’의 이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처남이 기어코 전사를 하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전사통지서’를 우편으로 장인과 장모가 벌써 받았다는 말이다. 그들이 받게 된 그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과 상심이 어떠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자신에게는 아무 말씀이 없으신 것일까?
몰랐으면 모르지만 그 사실을 알고서는 그냥 있을 수가 없다. 그날 근무를 좀 일찍 끝내고 손수석이 처가가 있는 ‘장매 마을’을 방문한다. 사복으로 갈아 입고서 자전거로 가고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의 눈에 순경이 지나가는 것으로는 보이지가 않는다. 달리 ‘선더말’이라고도 불리고 있는 그 마을은 경주 서천내의 뚝방길을 따라 한참을 진행해야 나타나는 뚝방 아래의 동네이다.
손수석이 집안으로 들어서자 장인과 장모가 그를 맞이한다. 손수석은 절을 올리면서 그 상태로 가만히 한참을 있다. 그 모습을 보고서 장인 고천석이 헛기침을 하면서 말한다; “자네는 공무로 많이 바쁠 터인데 오늘은 어째서 이렇게 사복을 입고 찾아온 거야? 우리는 덕분에 잘 지내고 있어. 어쩐 일인가?”. 손수석이 비로소 고개를 들고서 장인을 쳐다본다. 그 다음에는 장모 전혜숙을 쳐다본다.
그러자 장모가 그 눈을 피하면서 슬쩍 치마로 얼굴을 가린다. 전혜숙은 사위가 벌써 처남이 전사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찾아온 것을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장인 고천석이 아내를 나무란다; “허, 이 사람, 사위 앞에서 어째 눈물을 보이는가?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싸우다가 전사를 하는 것이 마땅히 대장부다운 삶이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는 죽음을 선택한 아들이야. 그런데 그 부모가 되어서 그렇게 눈물을 오래 흘리면 안되는 거야. 그러면 못써…”;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자신의 대가 끊어진 장인의 심정이 오죽할까? 그러나 그렇게 안간힘을 다하여 버티고 있는 꼿꼿한 고천석이다. 그가 일찍부터 한학을 하고 글이 좋은 선비라고 하더니 그 성품도 고지식하기 이를 데가 없는 것이다. 손수석이 그 앞에서 할 말이 없다. 그저 장인과 장모의 얼굴을 안타깝게 그렇게 한동안 쳐다볼 뿐이다.
그러자 한참만에 장인 고천석이 입을 뗀다; “마침 경주 읍내에는 나와 같이 충청도에서 내려온 일가들이 제법 살고 있어. 그들 가운데 아들이 여럿인 집이 있으니 내가 나중에 부탁하여 양자를 들이면 되네. 손서방은 그렇게 알고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게나. 인명은 재천이라고 했으니 하늘이 하는 일을 어떻게 사람이 왈가왈부를 하겠는가? 천명으로 받아들이고 남은 인생을 성실하게 살아가라고 하는 것이 이 땅에 사람을 내신 하늘의 임금 옥황상제의 뜻이 아니겠는가?”.
손수석은 장인 고천석의 마음을 알 것만 같다. 그는 아들을 잃은 부모의 슬픔을 자식들에게 대물림하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좋은 것을 후대에 남겨주고 나쁜 것은 자신이 짊어지고 가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러한 심성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장인 고천석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손수석은 자신이 ‘장인 복’은 있다고 생각한다.
그 마음은 장인인 고천석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맏사위인 손태호가 천북 화산에 살고 있지만 그렇게 미덥지가 못하다. 술을 좋아하고 술에 취하면 사리분별을 잘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좋아 보이는데 정확한 계산을 하는 그러한 인물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둘째 사위인 손수석은 마치 사무라이와 같다. 잘 벼루어진 칼과 같아서 매사가 분명하다. 공직자로서는 안성맞춤이다.
그리고 고천석은 손수석이 딸의 신랑감으로 혼담이 들어오자 내밀하게 내남 너븐들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서 그 인물에 대하여 조사를 했다. 그랬더니 손수석은 청소년 시절에 벌써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서 고학을 하고 돈을 번 인물이라고 한다. 자수성가형의 사람일 뿐만 아니라 고향의 젊은이들을 데리고 가서 돈을 벌도록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 덕택에 이제 일가들이 모두 전답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한 이야기를 듣자 고천석은 그때부터 손수석을 사위로 맞이하고 그를 의지하여 살아간다. 그리고 손수석이 경찰에 투신을 하고 승승장구를 하자 이제는 공직자인 그에게 조금도 마음의 짐을 지우지 아니하려고 마음을 다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장인의 깊은 속마음을 손수석이 벌써 눈치를 채고 있다.
그래서 손수석이 처가를 떠나기 전에 한마디로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장인 어른 잘 알겠습니다. 훗날 양자를 들이시게 되면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그리고 처제의 혼사문제도 제가 나중에 좋은 곳으로 시집을 보내고 살아가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도와주겠습니다. 제가 장인어른의 사위가 된 책임을 그렇게 다 감당하겠으니 아무 염려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선더말에서 경주 읍내로 가는 그 길고 어두운 뚝방길을 손수석은 오로지 자전거의 ‘헤드라이트’에 의지하여 페달을 밟고 있다. 오늘 따라 달빛과 별빛이 모두 어둡다;
하지만 손수석의 머리 속에는 자신의 눈을 응시하면서 크게 고개를 끄떡이고 저으기 안심을 하시던 장인 고천석의 그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아내 전혜숙에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전사소식을 공직에 있는 사위 손수석에게 알리지 말라고 장인 고천석이 제지한 것이다. 자신들이 사위에게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고천석의 꼿꼿한 마음이 전해져 온다. 그렇게 손수석 자신을 믿고 그 앞길을 지켜주고자 하는 장인 고천석이다. 그러니 손수석이 장인을 존경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손수석은 불현듯 그가 결혼하기 전에 서악에 살고 있는 사촌누이 손영옥을 통하여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제주 고씨인 장인은 충청도에서 서당에 다녔는데 한학에 심취하여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그런데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자 독자이며 외동인 그는 고향을 떠나 사촌 누나가 살고 있는 경주 읍내로 오게 된다;
장인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그 누님은 경주에서 큰 기생집을 운영하는 행수였는데 재산이 많았다고 한다. 고천석은 그 집에서 회계일과 서기일을 해주면서 오래 살게 된다. 그런데 때때로 그 집 부엌에 출입하면서 주방식구들에게 한식요리를 가르쳐 주고 있는 요리선생이 있는데 고천석이 그녀를 눈여겨 보았다는 것이다. 고천석도 노총각이지만 그 요리선생도 노처녀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름이 전혜숙이고 상주가 고향인데 일찍 대구에 가서 공부를 하고 요리를 정식으로 배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구에서 요리사로 나중에는 요리선생으로 일을 하고 있는데 경주의 큰 요리집에서 그녀를 초빙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기생집의 주방에 요리를 가르치는 선생의 일까지 틈틈이 하고 있다.
전혜숙은 큰 키는 아니지만 그 인물이 대단해서 기방에 오는 손님들이 ‘그녀가 기생이 아닌가?’고 착각을 할 정도라고 한다. 그러한 요리선생을 마음에 품고 있는 노총각 고천석이기에 그 가슴앓이가 대단하다. 그 모습을 보고 그의 사촌누나가 발벗고 나섰다고 한다. 끈질기게 전혜숙을 설득한 것이다.
자신의 사촌동생이 성실하니 그와 결혼만 해준다면 자신이 나서서 집과 전답을 마련해주겠다고 제안한다. 그 말을 듣고서 전혜숙이 노총각 고천석과 선을 본다. 고지식하지만 굉장히 올곧은 사람임을 알게 된다. 한평생 자신만을 사랑해줄 수 있는 그러한 남자임을 간파한 전혜숙은 결혼을 승낙한다;
그래서 사촌 누나가 사준 장매의 집과 전답에서 농사를 지으며 1남 4녀를 낳아서 길러온 그들 부부이다. 그런데 이제는 맏딸과 독자인 아들이 모두 없어지고 딸 3만이 남아 있다. 둘은 시집을 갔고 막내딸 하나만이 집안에 남아 있다. 그러한 장인과 장모의 형편을 손수석이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래서 손수석은 이제 너븐들 친가의 친척들만 돌보는 것이 아니라 인척인 그들까지 보살피고자 한다. 그것은 순전히 장인 고천석의 고결한 선비의 마음이 손수석 자신을 감동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장인을 대신하여 손수석이 처가의 식구들을 돌보고자 하는 것이다. 단지 그것 뿐이다. 한마디로, 장인 고천석을 존경하였기에 손수석이 그러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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