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 할매55(작성자; 손진길)
봉천 할매는 아들 손수석 부부가 경주에 살고 있는 처가 쪽 제주 고씨 모임인 ‘팔우정 계중’에 다녀온 다음날 자신의 절친인 간호사 오예은을 만나러 ‘월성국민학교 근처 노서동’으로 간다. 그러자 오예은이 봉천 할매 정애라를 어느 때보다 더 반기면서 말한다; “애라야, 오늘 너 마침 잘 왔다. 내일부터 나는 더 이상 여기 오빠네 의사 일을 돕기 위하여 나오지 않는다…”;
그 말을 들은 정애라가 깜짝 놀라서 오예은에게 물어본다; “예은아, 어째서 그러니? 무슨 일이 있는데?”. 오예은이 웃으면서 말한다; “얘도, 내가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제 내 나이가 63살이나 되는데 어떻게 간호사 일을 더 하겠니? 은퇴를 하는 것이 맞지…”. 그러자 정애라가 말한다; “63세라고 하지만 너는 아직 정정하지 않니?”.
그 말에 오예은은 더 깔깔거리고 웃는다. 그리고 말한다; “애라야, 너나 나나 조선나이로 벌써 63세인데 어떻게 현역으로 뛸 수가 있겠니? 이제는 은퇴를 하여 집에서 조용히 쉴 나이야…”. 그 말을 듣자 정애라가 또 묻는다; “그러면 예은이 너는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데?”.
오예은이 조금 생각을 하더니 말한다; “애라야, 나는 진작에 남편이 별세를 하고 아들 하나, 딸 하나만 기르면서 간호사로 살아 왔어. 그 둘은 조부인 오하원 선교사가 계시는 대구에서 의대 공부를 했어. 그 후에 딸은 의대에서 만난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고 부산으로 내려가서 그곳에서 함께 의사로 일하고 있어”;
봉천 할매 정애라는 절친 오예은이 그동안 개인적인 ‘프라이버시’라고 영어까지 사용하면서 좀처럼 신상얘기를 하지 않다가 갑자기 자신에게 가족이야기를 하자 조금 놀란다. 그래서 귀를 기울인다. 그 모습을 보고서 오예은이 이어서 말한다; “아들은 군의관으로 오래 일하다가 작년에 서울 종로에서 개업을 했어. 그래서 애라야, 나는 서울로 가려고 해…”.
그 말을 듣자 정애라가 깜짝 놀라면서 즉시 묻는다; “얘는, 나 혼자 여기 두고 너는 서울로 간다는 말이지. 동무보다는 아들이 더 좋은 모양이구나... 그래, 서울에 가서 무엇을 하려고 그러니?”. 오예은이 친구 정애라를 보면서 조용히 말한다; “나는 그곳 아들네 집에서 한동안 지내야 할 것 같애… 며느리가 남편을 도와 간호사 일을 하기에 내가 그곳 손주들을 좀 돌보아주려고 해”.
그 말을 듣자 봉천 할매 정애라가 고개를 끄떡인다. 그리고 동무 오예은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면서 말한다; “예은아, 네 말을 듣고서 네 얼굴을 자세히 보니 너도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 있구나. 나는 네가 그동안 간호사 복장만 하고 있기에 나와는 달리 아직 젊고 언제나 활기가 넘치는 것으로 알았다. 그렇게 생기가 넘치는 너를 오랜 세월 내가 많이 의존했던 모양이지…”.
오예은이 친구 정애라를 위로한다; “애라야, 너나 나나 참 오래된 소꿉동무이다. 경주 성동에서 함께 고무줄놀이를 하면서 뛰놀던 때가 엊그제만 같은데 우리는 벌써 할머니들이 되고 말았어. 이제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나게 될지 잘 모르겠구나…”. 그 말을 듣자 봉천 할매 정애라가 불쑥 말한다; “예은아, 나도 너를 따라 서울구경을 한번 하면 되겠구나. 너를 따라 서울로 나서볼까?”.
오예은이 깜짝 놀라면서 묻는다; “애라야, 너 여기 자식들과 손주들은 어찌하고 나와 함께 서울나들이를 하려고 하니? 괜찮겠어?...”. 그러자 봉천 할매 정애라가 말한다; “나는 평생 남편과 살면서 5남 1녀를 낳아서 길렀어. 이제 그들은 다 각자의 삶을 살고 있어...늙은 나만 혼자 외톨이가 된 거지…”;
봉천 할매 정애라가 갑자기 쓸쓸한 어조로 말한다; “나를 무척 사랑해주던 남편이 3년전에 별세를 하고 말았어. 이제는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고 동무로 환대할 사람이 이 세상에 예은이 너 밖에 없단다… 그러니 예은이 너만 좋다면 내가 서울나들이를 한번 할 수가 있지 않겠니?...”.
그 말을 들은 오예은이 동무 정애라의 손을 꼭 쥔다. 그리고 말한다; “애라야, 그러면 열차를 타면 하루만에 갈 수가 있으니 나와 함께 서울나들이부터 하자꾸나. 나는 너와 함께 서울에 먼저 가서 아들네 형편을 한번 살핀 다음에 부산 딸네집에 가서 좀 있다가 나중에 나 혼자 서울로 다시 가도록 하마. 그렇게 해보자꾸나. 애라야, 그러면 되겠지?”.
그 말을 듣자 정애라가 고개를 끄떡인다. 그래서 그 두사람은 실제로 사흘 후에 경주에서 서울로 가는 중앙선을 타고서 길을 떠나게 된다. 문경세재와 따뱅이 굴을 지나서 그렇게 서울 청량리로 가는 것이다. 청량리에서 전철로 종로까지 간다. 그곳에 오예은의 아들이 개인의원을 열고 있기 때문이다;
봉천 할매와 오예은은 종로에 내려서 아직 복구가 되지 아니하고 폐허상태로 방치가 되어 있는 종로의 처참한 모습을 보게 된다. 언제 그 무너진 건물을 다시 세우게 될까? 참으로 오래 복구작업이 있어야 될 것으로 보인다;
오예은이 친구 정애라와 함께 방문을 하자 아들 내외가 대단히 반긴다. 그 아들 내외가 간호사 오예은이를 닮아서 그런지 선량하게 보인다. 오후 늦은 시간이라 그곳 의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며느리가 두 사람을 집으로 안내한다. 의원에서 별로 멀지가 않다. 그 집에는 집안일을 도와주고 있는 가정부도 있다.
그 집에 머무르면서 봉천 할매는 다음날 친구 오예은과 함께 명동거리를 찾아가 본다. 그곳 역시 처참하게 파괴가 되어 있다. 그 모습을 보고서 봉천 할매 정애라가 말한다; “이제 곧 휴전이 되면 그때부터 이 폐허 위에 다시 서울을 건설하게 될 터인데 그 일이 참으로 보통일이 아니겠구나? 언제 서울이 다시 제 모습을 갖추게 될까? 내가 살아생전에는 그 완전한 모습을 보기가 힘들겠구나…”;
그 옆에서 친구 오예은이 말한다; “애라야, 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한 십년만 호흡을 가다듬어서 더 살아봐. 그러면 너와 나는 다시 이곳에 올 수가 있어. 그리고 말끔하게 새 건물이 들어서 있는 명동과 종로거리를 볼 수가 있을 것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 말을 들은 정애라가 ‘후유’하고 긴 숨을 쉬면서 말한다; “그래,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니… 그런데 나는 그 자리에 예은이 너와 함께 서지를 못할 것 같애. 요즘 몸에서 자꾸만 힘이 빠져나가고 있거든…”.
그때서야 오예은이 오랜 동무 정애라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본다. 그러면서 말한다; “애라야, 너는 무슨 마음고생을 그렇게 많이 했니? 너 하나만을 일편단심으로 사랑해준 착한 남편과 오래 살았지 않니? 그리고 잃어버린 재산도 셋째아들이 일찍 돈을 벌어서 전부 되찾아 주지 않았니? 자녀들이 결혼하여 잘 살고 있고 이제 대학에 다니는 막내아들만 결혼시키면 되는데 무엇이 걱정이니? 그런데 왜 이렇게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게야…”.
그 말을 듣자 봉천 할매 정애라가 쓸쓸한 웃음을 띤다. 그러면서 말한다; “예은아. 우리 시골에서는 ‘한평생이 60이라’고들 말하는데 내가 63세이니 시골사람으로는 많이 산 것이야… 그런데 예은아, 그 오랜 세월 가운데 내가 스스로 발심을 하여 서울까지 여행을 해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란다...”.
오예은이 동무 정애라의 팔을 잡는다. 그러면서 말한다; “애라야, 명동 한복판 무너진 폐허 위에서 우리 그런 이야기를 나누지 말고 종로 아들네 집에 가서 따뜻한 차라도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계속 하자꾸나. 이 길거리에서 우리가 무슨 청승이니”. 그 말을 듣자 갑자기 봉천 할매가 ‘깔깔’ 웃는다. 자기가 생각해도 좀 웃기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의사가 살고 있는 집이라서 그런지 그 집에는 식탁도 있고 의자도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은 5월말의 따뜻한 햇살을 쬐면서 식탁에서 차를 마신다;
그러면서 못다한 이야기를 나눈다. 봉천 할매는 이번에 동무 오예은과 헤어지면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을 친구가 없다고 생각을 했는지 자기 이야기를 계속한다.
다시 정애라가 처량한 어조로 말한다; “예은아, 나는 한번도 내 마음대로 길을 나서 본 적이 없어. 어려서는 국밥 집 식당일에 바쁜 부모님을 도와서 어린 남동생을 내가 돌보아야만 했어. 그리고 19살에 내남 너븐들로 시집가서는 5남 1녀를 낳아 기르느라고 쉴 틈이 없었어. 이제서야 조금 쉴 틈이 생겼는데 그만 내가 늙어버렸지 뭐니…”.
오예은이 친구 정애라의 말을 모두 진지하게 들어준다. 그리고 나서 말한다; “애라야, 네가 그런 인생을 살았구나. 그것이 조선여인들의 일생인가 보다... 그런데 나는 다행히 의붓아버지가 미국 선교사이며 의사였기에 좀 다른 인생을 살아온 것 같애. 아버지가 살아가시는 모습을 보고서 오빠는 의사공부를 하고 나는 간호사공부를 하여 각자 전공분야의 일을 하면서 그렇게 살아온 거야. 그런데 너는 그것이 아니구나…”.
그렇게 두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서울 종로를 비추던 5월달 마지막 태양이 자꾸만 서쪽으로 기울고 있다. 내일이면 1953년 6월이 시작된다. 그리고 오예은과 봉천 할매 정애라는 같은 열차를 타고서 한 사람은 경주로 또 한사람은 부산으로 가게 된다. 그들은 언제 다시 만날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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