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 할매(손진길 소설)

봉천 할매35(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10. 2. 09:45

봉천 할매35(작성자; 손진길)

 

손수석이 고향에 돌아온 날이 1945년 8월 21일 늦은 오후이다. 8월 15일 일본 천황이 정오방송으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지 꼭 일주일만이다;

 그가 내남 너븐들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부모님께 귀가보고를 하고 큰절을 올린 것이다. 그 다음에는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백부집을 찾아가서 백부와 백모에게 큰절을 드린 것이다.

먼저 부모님께 큰절을 올리고 귀국보고를 하였을 때에 부친 손영주는 ‘그동안 수고 많았다. 푹 좀 쉬도록 하라…’고만 말씀하셨는데 봉천 할매 정애라는 그것이 아니다. 그녀는 지난 6월달에 오사카로 건너가서 아들 얼굴을 보고 이제 거의 2개월만에 고향에서 다시 아들 수석의 얼굴을 본다. 그러한 그녀가 아들 손수석에게 할말이 많다; “수석아, 정말 수고가 많았다. 그런데 이따가 내가 별도로 안방에서 급히 할말이 있으니 좀 보자꾸나…”.

손수석이 모친 정애라가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신가?...’하고 약간 의아하게 생각을 하고 그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부친 손영주가 말한다; “수석아, 뭐 큰 문제는 아니니 그리 의아해할 것은 없다. 그저 안방에 함께 건너가서 너의 어머니에게서 최근의 이야기를 조금 들어보면 금방 안다. 그렇게 해라”.

정애라는 손수석과 함께 단둘이 안방으로 건너가서 아들에게 조용하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수석아, 젊은 너븐들 사람들이 16일날 오후에 벌써 너븐들에 모두 들어왔다. 그런데 그들이 들어오자 세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첫째, 오사카에서 시모노세끼로 함께 이동하지 아니한 사람이 한사람 있다고 한다. 바로 너의 나이 많은 족질인 ‘현동 양반’이다. 여기 너븐들에는 그의 아내와 아들들이 살고 있는데 가장이 귀국을 하지 아니했다고 하여 야단들이다”.  

잠시 숨을 쉰 다음에 봉천 할매 정애라가 손수석에게 이어서 말한다; “둘째, 너의 백부 손영한과 백모 이신자가 썩 기분이 좋지가 않다. 너도 알다시피 20살짜리 너의 종매인 손자옥이가 배가 불러서 남편감과 함께 갑자기 마을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수석이 네가 자옥이를 데리고 일본에 들어갔을 때에는 꽃다운 19세의 처녀였는데 어째서 부모에게 아무 말도 없이 일본에서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한 채 신랑과 함께 고향에 들어왔느냐고 질책을 하신다”;

봉천 할매 정애라가 곤혹스러워 하는 아들 손수석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용히 방도를 이야기 한다; “수석아, 따지고 보면 네 잘못이 아니니 너무 걱정할 것은 없다. 그저 백부모님을 찾아 뵙고 자초지종을 잘 말씀드리면 된다. 이 에미가 볼 때에는 그 신랑이 되는 장서방이 사람이 괜찮더라. 어쨌든 자옥이와 장서방 두사람은 본가로 들어가지 못하고 우리집 안채 건너방에 머물고 있다. 이 에미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

이어서 모친 정애라가 말한다; “셋째, 너의 누나 손해선이 드디어 4살이나 된 딸 이문자와 남편 이서방을 데리고 와서 16일날 우리 내외에게 인사를 시켰다. 나는 물론 너의 아버지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서방 말이 자신은 처자식을 데리고 고향으로 가서 부모님께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하면서 예천에는 본처와 자식이 있다고 솔직하니 말하더라. 그러니 우리 내외는 까무러칠 지경이다. 수석아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이냐? 그들은 아직 예천으로 가지를 못하고 수석이 네가 오기를 역시 안채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 에미가 좀 답답해서 그렇다.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으냐? 수석아…”;

손수석은 모친 정애라가 ‘첫째, 둘째, 셋째’라고 하면서 자초지종을 하나하나 자신에게 말하면서 끝에 가서는 ‘후유…’라고 한숨을 쉬시는 것을 본다. 그렇게 또박또박 자식에게 말씀을 전해 주려고 며칠이나 연습을 하신 것일까?... 봉천 할매 정애라의 지극한 아들 사랑을 엿보는 것만 같아서 가슴이 뭉클하다. 그렇게 자식을 위하여 애를 쓰는 모친의 몸에서 자신이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 자랑스럽다.

그런데 그 다음에 한숨을 쉬시는 것은 55세나 된 봉천 할매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문제라서 그러한 것이다. 그것은 23세의 젊은 손수석이 그 명석한 두뇌로 해결을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손수석이 강하게 마음을 다잡아 먹는다. 한번 용기를 내고 결정을 하면 물러서지를 아니하는 것이 손수석의 강인함이다. 그가 결심을 한 듯이 빙그레 웃으면서 부드럽게 모친에게 말한다; “어머니, 제가 돌아왔으니 그런 걱정과 한숨은 이제 내려 놓으셔도 됩니다. 아무 걱정 마시고 그저 지켜만 보십시오”.

조용하지만 단호한 아들 손수석의 말을 들자 봉천 할매 정애라가 환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그래, 수석아 맞다. 그 어린 나이에 그 추운 일본 북해도까지 가서 용하게 돈을 벌어 23세의 젊은 나이에 집안을 일으킨 장한 내 아들 앞에서 내가 무슨 걱정을 한단 말이냐? 그럴 필요가 없지… 너븐들의 월성 손씨 가주이자 지주였던 서배 할배보다 이제 더 많은 재산을 지니게 된 장한 내 아들 앞에서 이 에미가 무슨 청승인지 모르겠구나…수석아, 그저 네 생각대로 강하게 밀고 나가거라. 이 에미는 누가 뭐라고 해도 무조건 내 아들 수석이 네 편이다. 알겠지?”.

손수석이 모친 정애라의 손을 한번 힘껏 잡아 주고서 옆방으로 건너 간다. 매형 이도성이 아내 손해선과 함께 딸 이문자의 재롱을 보고 있다가 깜짝 놀라서 일어선다. 그러자 손수석이 먼저 매형에게 절을 한다. 이도성이 맞절을 하면서 묻는다; “처남 우리는 나중에 이야기를 나누어도 되는데 피곤한 몸에 어째 건너오셨는가?”.

손수석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매형, 제가 1940년에 오사카에서 형님을 처음 뵙고서 물 설고 낯이 설은 일본 땅에서 서로 형제와 동지가 되어 한번 잘 살아보자고 굳게 손을 맞잡은 것을 기억하시지요?”. 이도성이 그때를 생각하면서 답을 한다; “맞아, 처남, 분명히 우리는 그때 일본 땅에서 그렇게 사나이의 굳은 맹세를 하고 나이를 떠나 서로 동지로 손을 맞잡았지…”.

그러자 손수석이 말한다; “형님,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일본이면 어떻고 조선이면 어떻습니까? 이제는 처남 매부 사이이니 더 한층 한가족으로 힘을 합하여 어려움을 같이 헤쳐 나가야지요. 그리고 그때 일본에서 우리는 언제 조선이 이렇게 해방이 되고 고향으로 곧바로 돌아오게 될지 어떻게 짐작이나 했습니까? 그런데 지금 와서 옛날의 조선의 예법으로 우리를 묶어 놓으려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니 강하게 마음을 다잡으시고 제 누님과 딸 문자를 데리고 고향 예천 용궁 본가로 들어가십시오. 이곳에서는 제가 책임을 지고서 누님과 딸을 매형의 고향으로 함께 보내는 것으로 결론을 짓겠습니다”;

이도성은 처남 손수석의 꽉 다문 입에서 무서운 기상을 본다. 머리는 차갑고 마음은 따뜻하며 한번 결심한 것을 돌이키는 법이 없는 손수석이다. 그대로 밀고 나가는 그 추진력이 대단하다. 일본에서도 그러한 젊은 손수석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이길 수가 없었다.

물론 여기 너븐들 사람들도 고리타분한 시골 양반의 외고집으로는 실리적으로나 명분적으로 도저히 그를 이길 재간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도성은 ‘싱긋’ 웃으면서 말한다; “처남, 너무 무섭게 그렇게 몰아 부치지는 말게. 여기는 일본이 아니니까… 자네의 그 일본의 사무라이보다 더한 두려운 본 모습을 보게 되면 여기 사람들이 모두 까무러칠 게야. 하하하…”.

남편 이도성이 오래간만에 사내 답게 크게 웃는 모습을 보고서 손해선이 고개를 갸웃한다. 처음보는 모습이다. 도대체 자신의 남편 이도성과 남동생 손수석은 일본에서 어떠한 어려움과 맞서서 살아온 사람들일까? 그녀가 모르는 그 어떠한 난관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 어려움을 함께 헤쳐오면서 피보다 끈끈한 동지애를 발휘했던 그들인가 보다… 그래서 그녀는 딸 문자와 함께 남편과 남동생을 크게 의지하고자 한다.

손수석은 그 다음 방으로 건너간다. 그가 들어서자 손자옥과 매제 장기동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손자옥의 배가 불러 있는 것을 보니 임신 6개월쯤이 되는가 보다. 손수석은 먼저 장기동에게 맞절을 한 다음에 그들에게 말한다; “매제는 내일 저와 함께 경주 읍내로 가서 정찰을 좀 하도록 합시다. 여기 내남 너븐들보다는 경주 읍내가 앞으로 살아가기에 훨씬 진취적이고 낫습니다. 여기 내남 시골에서는 농사일밖에 무엇을 더 하겠습니까? 앞으로는 시골에서 농업소득만으로 먹고 살기에는 힘이 들 것입니다. 그러니 경주 읍내에서 달리 일거리도 구하고 일부 농사도 짓고 하는 것이 더 나은 방도이지요. 돈이 부족하다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참고로, 경주 중심지의 지도는 다음과 같다;

그리고 당시의 경주 서천내와 그 근방의 산천은 다음과 같다;

그 말을 듣자 장기동이 말한다; “처남의 말을 듣고 보니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저희 부부가 역시 이곳에서 처남을 기다린 것이 잘한 일입니다. 세상물정을 꿰뚫는 능력과 앞날을 예견하고 대처하는 능력에 있어서 처남이 탁월하다는 사실이야 북해도를 다녀온 조선사람들은 다 알고 있지요. 그렇게 할 터이니 장인어른과 장모님이나 잘 설득해 주십시오. 저희들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손수석이 웃으면서 말한다; “장형이 처남인 나를 그렇게 믿어주고 있는데 내가 무엇이 겁이 나서 백부모님을 설득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니 걱정 마시고 내일 저와 함께 경주 읍내를 한번 둘러볼 준비나 하십시오”. 그 말을 남겨두고 손수석은 바로 너븐들 이웃에 살고 있는 백부 손영한의 집으로 향한다. 그 집에는 손수석의 둘째 형인 손수상 내외가 이제는 백부모님을 양부모로 모시고 함께 살고 있다.

손수상과 그 아내 박재순 사이에는 이제 태어나서 6개월이 된 딸이 있다. 1945년 2월 13일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그 이름을 손수상 부부는 ‘손영자’라고 지었다. 건강하고 예쁜 딸이라서 조부모인 손영한 부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손수석이 그 집에 들어서자 부엌에서 시동생을 먼저 알아본 형수 박재순이 그를 부엌으로 데리고 와서 조용하게 말한다; “도련님, 손자옥이 내외를 보고서 양부모님이 펄쩍 뛰셨어요. 시골 양반 가문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썩 집을 나가라고 꾸중을 하신 거예요.  저희들이 자초지종을 말씀드려도 막무가내이세요. 그렇게 아시고 백부모님을 만나 보세요…”.

손수석은 이미 모친 정애라로부터 들어서 전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렇게 귀띔을 먼저 해주는 형수가 고마워서 고개를 크게 끄떡인다. 그리고 성큼 사랑채 사랑방으로 헛기침을 하면서 들어선다. 백부 손영한이 자리에 앉아 있다. 손수석이 먼저 큰절을 올린다. 그러면서 말한다; “백부님, 그동안 기체후 일향만강하십니까?”. 장성한 조카가 깍듯한 예법으로 인사를 올리는데 답을 안할 수가 없다; “그래 조카는 그동안 일본에서 고생이 많았겠구나…”.

그렇게 말하면서 손영한이 안방으로 가서 부인 이신자를 불러온다. 함께 있는 자리에서 손수석의 말을 듣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방에서 손수석은 백모 이신자에게 큰절을 올린다. 이신자는 반절을 하면서 조카 손수석의 절을 받는다. 그리고 조용하게 남편 손영한의 옆자리를 지키면서 손수석을 바라본다.

그러자 손수석이 말한다; “백부님과 백모님, 제가 자옥이를 일본으로 데리고 가면서 잘 보살피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그만 수상이 형님 내외에게 맡겨 놓고 잘 돌보지를 못했습니다. 자옥이와 장기동 두사람이 성당에서 백년해로를 하자고 자기들끼리 약속을 했다고 저희들에게 알려 왔기에 저희들도 크게 놀라서 문책을 했더니 일본에서 평생 함께 살겠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부모님 뵐 면목이 없으니 조선에는 나중에 한번 아기를 낳은 다음에 방문하여 양가 부모님을 찾아 뵙고 용서를 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해방이 되어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어쨌든 모든 것이 애초의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지 못한 제 불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를 꾸중하시고 그들을 함께 살도록 선처를 해주십시오. 제가 이렇게 빌겠습니다. 큰 아버지와 큰 어머니”. 

그 말을 듣고서 손영한이 묻는다; “그런데 그 장기동은 어떤 사람인가?”. 손수석이 진중하게 답한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구미 출신이며 인동 장씨가 맞습니다. 그리고 노총각이며 성실합니다. 형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기동이 일본에 밀항하여 북해도 삼판에서 일하면서 착실하게 돈을 벌어 고향에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착실한 천주교 성도라서 성당에 십일조를 내고 나머지 돈은 절반을 고향에 보내고 그 절반은 자신의 장래를 위하여 계속 저축을 하였기에 시재가 단단한 것으로 압니다. 평생 처자식 고생을 시킬 사람은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파악을 하고 있습니다, 큰아버지”.

그 다음에 손영한이 손수석에게 말한다; “조카인 자네가 일본에서 그렇게 파악을 했다고 하니 내가 믿겠네. 그렇지만 이곳 너븐들에서는 저희들끼리 아기를 낳고 그렇게 살게 할 수는 없네. 그러니 수석이 자네가 그들에게 살 수 있는 방편을 좀 마련해 주게나. 사실 정신대에 끌려가지 아니하고 조선총각을 만나서 가정을 자신들 힘으로 꾸린 것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한 일이지. 그렇지만 이곳 시골 양반의 자존심이 그러하니 어떻게 하겠나? 수석이 자네는 이해하리라고 믿네…”.

손수석이 알아 들었다. 그래서 확실하게 말한다;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감사합니다. 그 부모의 마음을 제가 알게 되었으니 반드시 그렇게 빈틈없이 조치를 하겠습니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역시 예부터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라고 말했던가? 어떤 경우에라도 부모의 마음은 자식들이 흠없이 잘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마음을 알기에 다음날 손수석이 장기동과 함께 경주 읍내로 나가서 살기 좋은 땅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제 남은 문제는 일가 조카인 ‘현동 양반’의 문제이다. 그 문제는 푹 쉬고서 내일 손수옥과 손수관 형님을 만나 뵙고서 처리 방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너무 피곤한 하루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손수석으로서는 고향에 온 첫날부터 긴 하루가 그렇게 고단하게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