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 할매(손진길 소설)

봉천 할매34(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10. 2. 09:37

봉천 할매34(작성자; 손진길)

 

6. 일제의 항복과 고향으로 돌아오는 너븐들 사람들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히로히토 천황이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무조건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에게 항복하기로 발표함으로써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일본제국의 패배로 끝난다;

 전쟁의 종결로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되는 집단은 군부와 방산업체이다. 그 가운데 병참을 담당했던 홋카이도 비바이의 석탄회사들이 포함이 되어 있다.

당장 생산한 석탄을 군부가 수입해가지 아니하고 외상을 받을 길도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석탄회사는 탄광에 대해서는 조업단축을 하고 광부의 수와 직원의 수를 줄여야만 한다. 회사의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가고 있으므로 쯔끼모도는 사표를 낸다. 사직을 하기에 좋은 기회인 것이다;

그러자 회사에서는 강제퇴직 전에 자진사표를 내는 사원에 대해서는 우대를 한다고 퇴직금을 제대로 챙겨 준다. 1939년 말부터 5년 9개월간이나 근무를 했기에 퇴직금이 상당하다. 그 다음으로 쯔끼모도가 향한 곳은 홋카이도의 삿포로 인근에 있는 삼판회사이다. 벌목사업도 예외가 아니다. 탄광이 조업단축을 하고 있으므로 목재의 수요가 확 줄고 있다;

이제 완전한 노인이 된 가토 사장이 여니 때와 같이 쯔끼모도를 반긴다. 그는 쯔끼모도가 종전이 되었으므로 이제는 조선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벌써 예상하고 있다. 그래서 그동안 그가 기여한 공로를 반영하여 전별금을 두둑하게 챙겨주면서 이별을 아쉬워한다.

가토 사장이 쯔끼모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쯔끼모도 상 덕분에 나는 노년에 회사의 번영을 다 맛볼 수가 있었오. 그리고 큰 돈도 벌었다오. 이제는 이 사업을 접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노후를 참으로 부자로 이곳 삿포로에서 살 수가 있게 되었오. 그러니 고향으로 돌아가더라도 쯔끼모도 상 이곳을 나중에 한번 찾아 주시오…”.

담담하게 그렇게 말하던 가토 사장이 잠시 목이 메이는 모양이다. 그러나 곧 진정을 하고서 이어 말한다; “그때에는 아마 나 대신 내 양자가 당신을 맞이하고 환대를 해줄 것이오. 나는 양자에게 당신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줄 생각이오. 나의 아들과 같이 든든한 쯔끼모도 상이었다고 말이오”. 가토 상은 진짜 개인적으로 좋은 심성을 가진 일본사람이다.

가토 사장의 마지막 말을 들으면서 쯔기모도가 잠시 혼자서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좋은 심성을 지닌 일본사람들을 마치 광신도처럼 만들어서 남의 나라를 그토록 참혹하게 침략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일본사람들이 천황을 신으로 만들고 전체주의 군국주의 국가를 운영하여 일본제국의 영광을 떨치려고 한 것이 잘못이다. 그리고 그러한 국가목표에 집단적으로 동조를 한 일본사람들의 의식과 문화가 역시 잘못된 것이다”;

손수석이 비바이의 석탄회사를 떠난 것이 8월 19일 아침이다. 그는 동경으로 가서 부동산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손철호를 만난다. 그에게 이제 종전이 되었으니 고향으로 함께 돌아가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본다. 그러자 손철호가 뜻밖에 머리를 가로 젖고 있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한다; “수석아, 나는 이곳에서 아직도 돈을 벌고 싶다. 조선에 가보아야 내가 일할 부동산시장이 없다. 그러니 나는 부자들이 있는 이곳 동경에서 계속 돈을 벌 것이다. 그러니 수석아 너는 조선으로 들어갈 때에 내가 주는 이 돈을 내 아내 유촌댁에게 전해 다오, 그녀는 내 고향 천북에서 아직 시부모를 모시고 있다”.

손철호가 맨정신으로 돈과 고향주소를 적은 명함을 손수석에게 주고 있다. 그러자 손수석이 말한다; “철호 선배, 부인 유촌댁이 시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 돈이 아니라 남편의 귀향일 것이오. 그런데 돈을 계속 벌겠다는 명분으로 고향으로 가지 않겠다고 하니 그것이 어쩐 일이요?...”;

손수석이 잠시 숨을 돌리고 이어서 말한다; “철호 선배도 이미 짐작하듯이 이제 일본과 조선은 원수지간이 되고 말 것이오. 그런데 선배는 지금이 아니면 언제 고향을 찾아올 수가 있다는 말이요. 그렇게 고향의 식구를 버려 두고 혼자서 여기서 계속 돈을 벌면 무엇을 하오? 장차 그 돈을 고향식구들에게 전달할 수도 없을 터인데…”.

손수석의 날카로운 지적에 한동안 손철호가 말을 못한다. 그러더니 비로소 속내를 털어놓는다; “사실 나는 벌써 이곳에서 돈 많은 과부와 살림을 차리고 있어. 일본사람인 그녀도 자식이 없고 외로운 신세야. 그러니 내가 조선으로 훌쩍 떠나버리면 그녀는 어떻게 하나?...”.

손철호가 마치 독백을 하듯이 말한다; “나는 그녀를 여기 동경에 혼자 버려 둘 수가 없어… 그렇다고 그녀와 함께 조선에 들어갈 수도 없어… 조선에서는 이제 일본사람이라고 하면 치를 떨 것인데… 특히 연약한 일본여자는 조선에서 분노한 남자들에게 맞아 죽기 십상이야. 그러니 나는 조선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참으로 딱한 속사정이다. 그러나 그것이 손철호 선배의 선택이니 어떻게 하겠는가? 손수석은 그날 그 돈을 반드시 천북에 살고 있는 유촌댁에게 전달해주기로 약속을 하고 손철호와 이별한다. 먼 훗날 그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다시 상봉을 하게 되는 것일까?...

그날 손수석은 ‘쌀 가게’를 방문하여 안춘근에게 이별을 고한다. 안춘근은 잠시 쌀가게를 부인에게 맡기고 손수석을 데리고 집으로 간다. 안용운 내외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벌써 그들은 손수석이 이제는 북해도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손수석이 안용운과 박미자에게 큰 절을 하면서 하직인사를 올린다. 그런데 갑자기 뜨거운 눈물이 쏟아 나온다. 이곳 일본 동경에서 2년간이나 자신을 돌보아 준 마치 부모와 같은 분들이다. 그들의 도움으로 ‘쌀 가게’에서 사환으로 일하면서 야간에 직업학교인 ‘청년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가 있었다. 그 덕분에 홋카이도 비바이에 있는 석탄회사에 경리직으로 입사를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한순간 머리속으로 1937년 말에 일본으로 와서 지금까지 8년 가까운 일본에서의 생활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손수석은 군데군데 자신을 마치 아들처럼 돌보고 또한 배려하여 준 그들의 흔적을 재삼 발견하고 있다. 그래서 하직인사를 하면서 그 이별이 더욱 서러운 것이다;

그러자 그들 60대의 노부부도 눈물을 보이면서 말한다; “수석아. 그동안 쯔끼모도로 일본에서 살아오느라고 참으로 마음 고생이 많았겠구나. 이제는 돈도 많이 벌어 고향에서 천석꾼이 다시 되었으니 서배 할매 이채령과 서배 할배 손상훈의 소원도 모두 풀어준 것이다. 장하다. 수석아. 이제는 ‘쯔끼모도’라고 하는 일본이름을 잊어버리고 조선이름 ‘손수석’으로 살아가거라. 그것은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 안성기 교장도 생전에 바라시던 것이야…”.

그 말을 들으면서 손수석은 조선으로 가게 되면 부산에 들러 아직 생존하고 계시는 이다연 여사를 한번 찾아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그곳에는 안용운의 형인 안용환이 모친 이다연 여사를 모시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안용운이 자신의 명함 뒷면에 모친과 형에게 보내는 안부인사를 글로 적어서 손수석에게 준다. 부산에 들릴 때에 그 명함으로 안부를 전해 달라는 것이다. 그들도 멀지 않아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끊어질 것임을 벌써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날 손수석은 안춘근 부부에게 절을 하면서 말한다; “형님 그리고 형수님, 이 아우를 참으로 잘 돌보아 주어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이제 헤어지면 조선과 일본이 다시 수교를 하는 날 만날 수가 있겠네요. 그 동안 몸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안춘근이 역시 부부간에 손수석에게 반절을 하면서 말한다; “사랑하는 아우 수석아. 부디 조선으로 돌아가서 잘 지내기를 바란다. 먼 훗날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것이야. 그때까지…”;

그리고 고맙게도 그날 안춘근은 그동안 쌀을 북해도 탄광에 납품하면서 번 돈 가운데 손수석의 배당금을 챙겨서 준다. 손수석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그 돈을 벌써 준비를 해 둔 참으로 고마운 형이다. ‘그 돈이면 조선에서 얼마나 많은 농토를 살 수가 있을까?’. 손수석은 그 생각을 하면서 그 돈을 잘 챙겨 둔다.

이별이 길어서는 안된다. 손수석이 모진 마음을 먹고서 일어선다. 그리고 바로 동경역으로 가서 오사카로 가는 열차를 탄다;

 ‘우동 가게’에 들렀더니 저녁이다 이제는 문을 닫을 시간이다. 그래서 배인근 부부와 함께 그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저택으로 들어선다. 다시 보아도 이층집이 참으로 큰 규모이다.

배인근의 부모인 배종성과 장화옥이 손수석을 반갑게 맞는다. 그들은 이제 조선의 나이로 치면 66세와 64세의 노인들이다. 그들도 아들 배인근과 형제의 의를 맺고 있는 손수석을 자식같이 여기고 배려를 해준 사람들이다. 특히 장화옥은 내남 덕천에서 결혼하기 전까지 생활을 한 고 장인식 교장의 딸이 아닌가?

그래서 장화옥이 조선으로 돌아가는 손수석에게 부탁한다; “수석아, 조선으로 돌아가거든 대구에 들러서 나의 어머니 최순옥 여사에게 나의 안부를 전해 다오. 그리고 나의 오라버니 장철민과 조카 장호성에게도 이곳의 소식을 전해주기 바란다. 내가 알기로는 조카 장호성에게 벌써 장성한 아들 장경국이 있다고 한다”.

손수석은 자신이 1937년 12월에 일본으로 오기 전에 부산 장인식 교장의 댁에 들렀을 때에 상주가 되어 있던 그들의 모습을 일일이 본 것을 기억한다. 그래서 최순옥의 옆에서 배인근이 적어 주는 대구 동인동의 그 주소를 받으면서 ‘꼭 그렇게 하겠다’고 공손하게 말씀 드린다.

손수석은 그 집에서 일박을 하고 그 다음날 일찍 시모노세끼로 가는 열차를 오사카 역에서 잡아 탄다. 그런데 손수석이 8월 20일 시모노세끼 항으로 갔더니 문제가 발생한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들 때문에 북새통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그 다음날부터 시모노세끼 항구에서 부산으로 출발하는 ‘관부연락선’의 표가 연일 매진이 되고 만 것이다;

 

선박회사에서는 어쩔 수가 없어서 예매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그런데 벌써 4일후인 24일표를 팔고 있다. 손수석은 그렇게 무작정 기다릴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빨리 조선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 사이에 어떠한 소동이 일본에서 발생할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나카사키 항으로 출발한다.

원자폭탄이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그 근처로 가면 조선으로 가는 선박이 아마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손수석의 생각이 적중을 한다. 나카사키가 핵폭탄을 맞아 아직 방사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기에 조선사람들이 겁이 나서 나카사키 근처에서 부산으로 출발하는 선박을 이용하기를 꺼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21일 아침에 부산으로 가는 선박의 좌석이 아직 남아 있다. 손수석은 그날 하루 20일 밤을 나카사키 인근 항구 가까운 곳 여관에서 숙박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배로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부산에 들리자 마자 항구 근방에 있는 이다연 여사의 집을 찾는다. 장남 안용환 내외와 함께 잘 지내고 계신다. 일본 동경에 살고 있는 안용운 가족의 안부를 전한 다음에 곧바로 부산역으로 가서 기차로 경주역까지 이동한다. 그 다음에는 나가시를 이용하여 내남 너븐들 고향으로 돌아간다.

조국이 해방이 되고 손수석이 맞이하고 있는 진짜 금의환향이다. 고향에는 너븐들 젊은 사람들이 일본에서 8월 16일에 벌써 귀향하여 자리를 잡고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내남 월성 손씨의 새로운 가주이며 천석꾼인 젊은 손수석의 귀향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있다.  

그렇게 젊은 나이 23세에 내남에서 부와 권력을 누리게 되는 손수석이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그의 앞길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서배 할배처럼 순탄하게 시골의 유지 양반으로 계속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어떠한 험난한 인생을 보내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원폭피해를 입은 나카사키 근처에서 일박을 한 손수석에게 어떠한 일이 훗날 그의 가문에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 모든 일을 알자면 그의 이야기와 그의 모친 봉천 할매의 이야기를 더 추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일본에 잔류하게 된 내남 너븐들 사람의 이야기와 너븐들에 살지 아니하게 되는 손해선 부부 및 손자옥 부부의 이야기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고민달은 어디에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