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292강(사60:5-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3월 28일(월)
성도들의 나라가 메시아의 나라가 되자면 어찌하여야만 하는가?(사60:5-9)
본문의 해석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지난번 강해에서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두 가지의 해석이 대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유대인들처럼 전통적인 선민우월사상에 의한 시온의 영광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둘째, 메시아가 오셔서 잘못된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을 치유하여 주시기를 앙망하고 있는 이사야의 입장을 적극 반영하여 해석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사야는 당시 히스기야 왕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은(사39:8) 선민 유대인사회의 하나님신앙의 타락에 대하여 절망하고 있는 선지자입니다. 따라서 그는 메시아가 오셔서 부디 하나님의 말씀의 뜻 그대로 선민의 나라와 이방나라를 모두 구원해주시고 통치해주시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사7:13-17, 9:1-7, 11:1-12). 그것은 그리스도가 천하권세를 가지시고 온 세상을 공의의 정신으로 통치하시고 있는 메시아의 나라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마29:18-20, 엡1:20-23).
그런데 이사야의 기대와는 달리 오늘날의 세상은 메시아의 나라인지 아니면 성도들의 나라인지 실제로는 분간하기가 힘듭니다; “겉으로는, 교회와 성도들이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머리로 모시고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엡4:15, 5:23, 골1:18). 하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재화의 배분과 운용이 잘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메시아의 나라는 주권이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권자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재화가 사용이 됩니다. 반대로, 성도들의 나라는 아무리 그 머리가 그리스도라고 천명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주권자가 여전히 성도들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자신들의 뜻에 따라 재화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 다른 집단이기주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옛날 사라진 선민사상이 소위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성도들의 나라에서 재현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외식적인 현실이 본문의 해석에 있어서 어려움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명분만으로 보면, 천하권세를 가지신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재화가 마치 그 옛날의 선민사상처럼 성도들의 나라로 모여드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풀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내적인 기준을 따져보지 아니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 재화를 과연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뜻을 실천하는데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느냐? 아니면 성도들의 자체 이익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내적인 기준에 유의하여 본문의 내용을 상세하게 살펴보면, 성도들의 공동체가 맞이하고 있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극복함에 있어서도 이론적으로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각 구절을 하나씩 검토하면서 행간에 숨어 있는 의미를 깊은 묵상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도출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그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에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나라들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사60:5); 선민의 나라 또는 성도들의 나라에 두 가지의 막대한 이익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하나는 국제무역을 통한 엄청난 이익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방나라의 재물이 하나님의 역사로 그들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민의 나라 또는 성도들의 나라는 정책결정을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섭리로 자신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그 막대한 이익과 재화를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옳을까요? 이하의 구절에서 이사야가 그 방향성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a) 허다한 낙타, 미디안과 에바의 어린 낙타가 네 가운데에 가득할 것이며, (b) 스바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사60:6); 이사야가 낙타를 먼저 언급하고 그 다음에 금과 유향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1) “허다한 낙타, 미디안과 에바의 어린 낙타가 네 가운데에 가득할 것이며”(사60:6a); 여기서 미디안은 아브라함이 후처 그두라에게서 얻은 아들 6명 가운데 넷째입니다(창25:1-2). 그리고 에바는 아버지 미디안의 족장권을 상속한 장자입니다(창25:4);
1) 미디안 족속이 자리를 잡고 있는 땅은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부입니다. 그들은 대를 이어가면서 두 가지 산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목축업입니다. 특히 많은 양을 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은 모세의 일대기를 통하여 잘 알 수가 있습니다(출2:15-22, 3:1). 둘째, 미디안 족속은 이스마엘 족속과 함께 낙타를 끌고서 교역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애굽 사이의 험한 길을 오가면서 장사를 한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모세가 요셉의 일대기를 기록하면서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창37:25-28).
2) 그러한 미디안 족속의 조상들이 많은 낙타를 끌고서 이스라엘 또는 성도의 나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사60:6a).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또는 성도의 나라에서 그 낙타를 사용하여 많은 재물을 열방과 여러 족속에게 보내어주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재화의 배분을 위한 수송수단의 마련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민의 나라 또는 성도의 나라가 하나님의 역사섭리로 장차 얻게 되는 많은 재화를 그렇게 배분해야만 하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일까요?
(2) “스바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사60:6b);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의 황금시대를 솔로몬 대왕 시절로 보고 있습니다;
1) 당시 솔로몬의 부귀영화가 엄청났을 뿐만 아니라 그의 지혜는 온 세상이 흠모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라비아의 스바 여왕이 금과 유향 같은 귀한 예물을 많이 가지고 솔로몬 대왕을 찾아 왔습니다(왕상10:10). 스바 여왕은 이스라엘 제국의 부강함을 보고서 솔로몬 대왕이 섬기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왕상10:9).
2) 그와 같은 옛날이야기를 원용하여 본문에서 이사야가 슬쩍 다른 내용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스바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사60:6b). 그 가운데 숨겨져 있는 주요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①첫째,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는 민족과 백성들을 생산하기 위하여 하나님신앙을 온 세상에 전파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②둘째, 그 일을 위하여 충분히 사용할 수 있도록 여호와 하나님이 선민의 나라와 성도들의 나라에 세상적인 교역의 이익과 재물을 많이 보내어 줄 것입니다. ③셋째, 복음전파라는 그 사용목적에 맞추어 성도들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재화를 반드시 온 세상에 재분배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a)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일 것이요, 느바욧의 숫양은 네게 공급되고, (b) 내 제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사60:7); 여기서 이사야가 이스마엘 자손들의 양과 그 제물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일까요?
(1)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일 것이요, 느바욧의 숫양은 네게 공급되고”(사60:7a); 이스마엘의 12아들 가운데 장자가 느바욧이며 차남이 게달입니다(창25:13). 그들은 시나이 반도 바란 광야의 지배자로 우뚝 선 아버지 이스마엘의 뒤를 이어서 아라비아 반도에서 용맹을 떨치는 족속의 조상들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거친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신앙에서 자꾸만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러하던 그들에게 하나님신앙이 전파가 되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만민구원의 복음이 들려오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이 많은 양을 몰고서 하나님의 제단으로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일까요?
(2) “내 제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사60:7b);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제는 선민 유대인들만의 속죄의 제사가 아니라 그들의 화목의 제사까지 받으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 가운데 먼저 여호와 하나님신앙을 회복하게 된 그들이 더 많은 양을 하나님께 바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부디 하나님신앙을 전파하는데 있어서 그 재물을 사용해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방인들이 바친 재물을 선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a) 저 구름같이, (b) 비둘기들이 그 보금자리로 날아가는 것같이, 날아오는 자들이 누구냐?”(사60:8); 이방인들이 제물과 재물만 가지고 선민의 나라로 몰려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애를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하겠다고 결심을 하고서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결심하게 된 깊은 동기에 대하여 본문에서 두 가지를 비유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저 구름같이”(사60:8a); 구름처럼 떠도는 것이 인생살이입니다. 그것은 허무하기 이를 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자 인생의 목적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구름같이 정처 없이 떠돌던 인생들이 목적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빨리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2) “비둘기들이 그 보금자리로 날아가는 것같이, 날아오는 자들이 누구냐?”(사60:8b); 비둘기는 해가 지면 자신의 보금자리를 찾아서 날아갑니다. 사람들도 나이가 들어가면 어디로 돌아가야만 하는지 그 본향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들에게 전파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알게 됩니다. 이제는 영생을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으로 일종의 ‘귀소본능’(歸巢本能, 본능적으로 태어난 둥지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섯째로, “(a) 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 (b)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먼 곳에서 네 자손과, 그들의 은금을 아울러 싣고 와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에 드리려 하며, (c)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드리려 하는 자들이라. (d) 이는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라”(사60:9); 선민의 나라와 성도들의 나라에 들어오고 있는 재화에는 하나님의 꼬리표가 붙어 있음을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 “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사60:9a); 여기서 ‘섬들’은 ‘열방’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장차 열방 여러 족속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여 몰려올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빈손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가지고 올까요?
(2)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먼 곳에서 네 자손과, 그들의 은금을 아울러 싣고 와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에 드리려 하며”(사60:9b); ‘다시스’는 지중해 서쪽 끝에 있는 항구의 이름입니다. 어째서 ‘다시스의 배들’이 언급되고 있을까요?
1) 이사야는 서쪽 가장 먼 땅에서 예루살렘으로 오자면 다시스 항구에서 배를 타고 와야만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먼 곳에서부터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오고 있습니다.
2) 그것은 유대인들이 상상하고 있는 바와 같은 시오니즘이 아닙니다. 그들은 선민들의 종이 되고자 찾아오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 이방인들도 이제는 당당한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 자손들’이라고 이사야가 본문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사60:9b).
3) 새로 성도가 된 사람들이 자신들의 금은보화와 함께 자신들의 생애를 하나님께 바치고자 합니다. 오로지 자신들을 구원하여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인생과 재물을 사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3)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드리려 하는 자들이라”(사60:9c); 이방인까지 구원하신 하나님이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1) 선민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구원해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만군의 여호와이신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렇게 말하지 아니합니다; “선민과 이방인이라는 차별을 두지 아니하시고 만민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가 모든 피조물을 자식처럼 똑같이 사랑하고 돌보는 것은 심히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런데 선민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몽땅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선민의 나라가 망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2)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의 나라가 그 옛날 선민의 나라처럼 자신들만 구원을 받고자 하며 동시에 믿지 아니하는 족속들을 그냥 방치해버린다고 한다면 똑 같은 비극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나라의 재화도 하나님의 공의의 목적에 맞게 재분배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권력은 성도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성도들의 나라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3) 그 사실을 인정하고 순종할 때에 성도들의 나라는 메시아의 나라로 발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 메시아의 나라가 훗날 종말심판의 때에 창조주 하나님에게 진상이 된다고 사도 바울이 예언하고 있습니다(고전15:24). 메시아가 자신의 천하권세와 함께 그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올려드리게 되면 명실상부하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4) 이는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라”(사60:9d); 이 세상에서 100년 안팎의 유한한 인생만을 살게 되면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는 허무한 존재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고 그리스도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복음을 접하게 되고 보니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열리고 있습니다.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존재로 변화가 되고 있습니다. 그 이상의 영화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유한한 삶과 재물을 하나님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사용하고자 합니다. 성도들의 나라가 메시아의 나라가 되고 종말의 때에 메시아가 그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그 영광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사60:9d 의역). 그 일에 참여하게 되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고귀하며 의미가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들의 나라가 그 옛날 선민의 나라처럼 자신들만 구원을 받고자 하며 믿지 아니하는 족속들을 그냥 방치해버린다고 한다면 성도들의 나라 역시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재앙을 예방하자면 성도들의 나라의 재화도 만민구원의 목적에 맞게 재분배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 하나님의 재화의 분배를 결정하는 권력은 성도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성도들의 나라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순종할 때에 성도들의 나라는 메시아의 나라로 발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 메시아의 나라가 훗날 종말심판의 때에 창조주 하나님에게 바쳐지게 된다고 사도 바울이 예언하고 있습니다(고전15:24). 그러한 맥락에서 훗날 메시아가 자신의 천하권세와 함께 그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올려드리게 되면 명실상부하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자신의 인생과 재물을 사용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이 땅 위에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어떠한 방식으로 결단하며 살아갔던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시간과 재물을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기 위하여 전적으로 사용하기를 원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이 그 모범을 그대로 따라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운영도 그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뜻을 그대로 반영하여 재화를 재분배해야만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사야가 본문에서 의미하고 있는 그 내용을 깊이 음미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이율배반적인 성도의 삶을 청산하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의 전파를 위하여 재화와 시간을 모두 사용하시는 귀한 성도님들과 그 공동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설교하는 손진길 목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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